[56호] 흑인노예 소년, 어떻게 노예무역철페를 이끌어냈나? / 김낙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5-21 15:33
조회
1554
흑인노예 소년, 어떻게 노예무역철페를 이끌어냈나?

마커스 레디커의 『노예선』 (갈무리, 박지순 옮김, 2018)

김낙현(한국해양대학교)

* 이 서평은 2018년 5월 15일 인터넷신문 <대자보>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jabo.co.kr/sub_read.html?uid=37126&section=sc6&section2=#

지금까지의 노예서사(slave narrative)는 노예체험담에서부터 대영제국의 아프리카 노예무역 철폐와 미국의 노예제 폐지까지 다양한 출판물로 등장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백인 문명을 경험했을 때, 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이중 의식’(double consciousness)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노예선: 인간의 역사』(The Slave Ship)은 영국(1807)과 미국(1808)의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7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4장에 소개되는 아프리카 소년 올라우다 에퀴아노(Olaudah Equiano)는 어려서 이웃 부족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린 이후 서인도 제도, 영국, 아메리카, 북극해 등지를 오가는 선원 생활을 하였다. 32살에 자신이 모은 돈으로 영국 정부로부터 자유인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에퀴아노는 노예제 비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문해능력(literacy)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노예무역 철폐 법안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인물이 된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 소년 에퀴아노는 구전문화의 사회를 떠나 글자로 소통하는 문명사회로 진입하였다. 교회의 예배에 처음 참석하고 백인들의 지혜에 감탄하지만, 이들이 희생제물을 바치지도 않고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에는 의아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책읽기였다. 처음 책으로부터 소외당한 경험은 “책에다 말을 거는 행위”를 열망하고 배우도록 이끌었다.

주인님과 딕(Dick)이 독서에 몰두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나는 책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두 사람이 독서하는 모습이 내게는 그렇게 비쳤다. 그리고 모든 것을 시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신기했다.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면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자주 책에 대고 말을 한 다음 책에다 귀를 갖다 댔다. 책이 나에게 대답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렇지만 책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걱정했다.(『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The Life of Olaudah Equiano) p.101)
책은 백인들의 문명에 접근하고 싶어 하는 그의 열망을 대변한다. 독해능력을 갖춘 후 생겨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에퀴아노가 그의 문해능력을 노예무역과 노예제의 폐지를 위해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때 에퀴아노는 노예제 비판에 기독교적 정의를 동원한다. 하지만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던 사람들의 종교에서 자신의 구원과 위안을 찾는 상황은 다른 노예 서사에서처럼 에퀴아노의 서사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결국, 아프리카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적극적인 행위로서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작품이 에퀴아노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에퀴아노가 노예제 폐지 운동에 동참한 것은 자신의 문해능력에 의존했다. 노예제 폐지라고 하는 정치적 결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적 잠재력과 문해능력을 활용한 아프리카인의 능력을 증거하는 글이기도 하다. 당시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흑인과 백인의 지적 능력에 차이가 없다는 점과 아프리카인은 가르침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다는 점을 주장하였고 노예폐지론자들에게는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현재에도 인간을 한낱 ‘물건’(thing)으로만 취급하는 사례는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양각색의 대중으로부터 너무나 당연하고 인도주의적 목적이 담긴 인간을 억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에 반하는 인권회복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에서의 노예폐지 운동은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영향이 담긴 권한을 부여하는 데 있어서 문학의 잠재력을 강조하였다. 에퀴아노의 경우, 문해능력이 노예무역 시스템과 대항하고, 아프리카인들의 이미지를 되살리는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노예선』이 노예서술을 연구하는 데에 생산적이고 유익한 경험이 될 것이다. 특히 『노예선』은 동시대 세계를 추구하는 인도주의적 사안 위에서, 우리에게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명저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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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히드라 : 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마커스 레디커, 피터 라인보우 지음, 정남영, 손지태 옮김, 갈무리, 2008)

제국주의 초기 식민지 건설과 노예제 상황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밝혀낸 역사서이다. 공식적인 역사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장작 패고 물 긷는 사람들’, 흑인 하녀들, 혁명적인 해적 선장, 아프리카 노예들, 진정한 아메리카 혁명의 주역인 잡색 부대 등을 만날 수 있다. 히드라는 ‘헤라클레스 신봉자’들에게 맞서 싸운 선원들, 노예들, 평민들 즉 다중(multitude)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17세기 초 영국 식민지 확장의 시작부터 19세기 초 도시중심의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지배자들은 점점 세계화·지구화되는 노동체계에 질서를 부과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피터 라인보우 지음,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12)

저명한 역사가 E. P. 톰슨의 제자인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의 대표작. 인류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전제(專制)를 제한해 온 방책들 ― 인신보호영장, 배심재판, 법의 적정 절차, 고문 금지 그리고 커먼즈(the commons) ― 이 어떻게 축소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215년 이후 이러한 방책들의 원천인 마그나카르타의 역사적 궤적을 제시하면서, 사유화의 탐욕, 권력욕, 제국의 야망이 국가를 사로잡을 때마다 예의 오래된 권리들이 어떻게 무시되는가를 보여준다.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로지스틱스 -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데보라 코웬 지음,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7)

로지스틱스(logistics)는 비즈니스의 물류와 전쟁의 병참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지스틱스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로지스틱스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서도 상품을 이동시키는 순수 기술적인 문제로 다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이 책은 두 분야, 즉 전쟁과 비즈니스 중 무엇을 다룬 책일까? 이 책은 유통 기술에 대한 책이 아니며 전쟁술에 대한 책도 아니다. 저자는 로지스틱스가 순수 기술적인 방편이 아니라 “완전히 정치적인” 기획이라고 주장하며 로지스틱스를 현대 세계의 중심적인 문제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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