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눈과 응시의 분열

작성자
Namhee Kim
작성일
2018-08-17 19:07
조회
905
http://blog.daum.net/windada11/8769425

6 눈과 응시의 분열

주체의 분열
트라우마의 작위성
모리스 메를로퐁티
철학적 전통
의태
모든 것을 훔쳐보는 관음증자
꿈속에서 그것이 보여준다

109
? 이 중핵은 실재적인 것-지각의 동일성을 원칙으로 하는 한에서의 실재적인 것-이라고 지칭돼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 중핵은 프로이트가 일종의 [표본] 채취prelevement라 지적한 것, 우리가 지각의 영역에 있음을 그것을 인증하는 현실감을 통해 확신하게 해주는 그 [표본] 채취에 근거를 둔다.

잠을 깨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현실이란 ... 혹시 이 꿈에 깃들인 불안의 밑바닥에서 표현되고 있는, 부자 관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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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사이 마치 우연처럼 일어난 일-..., 불운-과 아무리 감춰져 있더라도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라는 말에 담겨 있는 가슴을 아리는 무엇 사이에는 반복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에게 운명신경증이나 실패신경증이라는 이름을 통해 형상화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놓치고 만[결여된] 것은 적응이 아니라 ‘투케’, 만남이다.

반복의 근거를 만남과 관련해 주체에게 일어나는 분열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이 분열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그것의 변증법적 반향 속에서 근원적으로 적당치 않은[잘못 도래한] 것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분석 경험과 발견의 특징적 차원을 구성한다. 실재가 주체에게 있어 충동의 가장 가까운 공모자가 되는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111
문제는 원장면이 왜 그토록 트라우마적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우리의 지평은 성욕과의 근본적인 관계 속에서 작위적인factice 것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분석경험에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만일 원장면이 외상적이라면 분석 가능한 것으로 하여금 변주되도록 지탱해주는 것은 성적인 감정이입이 아니라 어떤 작위적인 사태라는 사실이다.

지난 시간에는 주체의 분열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시하고자 했다. 이 분열은 잠에서 깬 후에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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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분열은 여전히 보다 심층적인 분열을 대리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보다 심층적인 분열을 한 편으로는 꿈이라는 무대 장치 속에서 주체 탓을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아이의 이미지, 원망이 가득한 그 응시와,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의 원인이 되면서 주체를 추락시키는 것, “아버지...안 보이세요?”라고 하면서 바라봐주길 간청하는 아이의 애원, 아이의 목소리 사이에 위치시켜야 할 거다.

우리가 주체의 여정을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과 만나게 될 일종의 교차로가 되는 물음이 제기되는 쪽으로 건너뛰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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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은 우리에게 철학적 전통이 출현한 시점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이데아’ 감성적 세계에서 출발, 존재에 부여된 최고선이라는 어떤 결말[목적]에 의해 규정되고, 이로써 마찬가지로 이데아 자체의 한계점인 미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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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현상학은 우리로 하여금 주체의 눈뿐 아니라 그의 기대, 움직임, 쥐기, 근육 및 내장의 흥분 등 요컨대 주체의 총체적 지향성이라는 말로 지칭되는 구성적 현존에 의해 지배되는 형태의 조절 기능을 주목케 했다.

메를로퐁티는 현상학 자체의 한계를 헤치고 다음 발걸음
그가 인도하는 길이 단순히 시각적 현상학의 차원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눈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쪽으로 나 있으니 말이다.
누구의 눈이란 내가 오히려 그의 ‘싹’이라 부를 수 있는 것-그의 눈에 선행하는 무엇-에 대한 은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가 일러준 길을 따라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응시의 선재성이다.

내가 본원적으로 종속돼 있는 이 ‘보다voir'가 바로 우리를 이 저서의 야망에, 즉 형태를 좀더 원시적인 수준에서 정립하는 것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는 존재론적 전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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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통과해야 할 곳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가 아니다.
응시는 우리의 지평에 나타난 경험의 막다른 골목, 즉 거세불안의 구성적인 결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묘한 우발성이라는 형태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눈과 응시의 분열, 바로 이것이 시관적 장의 수준에서 충동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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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을 통해 구성되고 표상의 형체들 속에 정돈되는 것과 같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계 속에서는 무언가가 층에서 층으로 미끄러지고 통과되고 전달되면서 결국 항상 어느 정도는 빠져나가 버린다. 이것이 바로 응시라 불리는 것이다.

미메시스(의태,미메티즘mimetisme)
의태에 있어 가장 근본적 문제는 의태가 그것을 가시적으로 발현시킨 유기체이 어떤 조형 능력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야 하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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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기능/응시의 기능 구분
반점이 눈과 닮았기 때문에 강한 인상?
눈이 매혹적인 까닭이 그것의 반점의 형태와 닮아서인지?

반점 예=얼룩 기능을 보이는 한 가지 예

얼룩의 기능이 자율적인 것임이 인정되고, 응시의 기능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관적 장을 통해 세계가 구서오디는 모든 단계에서 그것의 경로, 실마리, 흔적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얼룩과 응시의 기능이 그 시관적 장을 극도로 은밀하게 조종하는 것임을,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의식이라 상상하며 자족하는 시각 형태로는 절대 포착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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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하나의 은폐술과 같은 것에 의해서이다. 거기선 응시 기능에 대한 회피가 일어난다.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퍼져 나와 그토록 근본적인 몰의식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만족감과 자족감 속에서, 그리고 주체가 관조라는 형태로 만나게 되는 충일성이라는 철학적 전통의 참조점 속에서 역시 우리는 달아나는 것, 즉 응시의 기능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를 의식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리를 speculum mundi(세계의 거울)로 위치시킨다.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엇보다 우리를 응시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응시, 바로 그러한 응시에 의해 우리는 응시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의 광경은 모든 것을 훔쳐보는 자omnivoyeur처럼 보인다.

119
세계는 관음증자 이지만 노출증자는 아니다. 세계는 우리의 응시를 촉발하지 않는다. 만일 세계가 우리의 응시를 촉발한다면 즉시 생경하다는 느낌을 받을 거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응시가 생략되어 있다. ‘그것이 응시한다’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보여준다’도 생략돼 있다.
-반면 꿈의 장 속에서 이미지의 특징은 바로 ‘그것이 보여준다’는 데 있다.
하지만 거기서도 어떤 형태로 주체가 미끄러진다는 점이 드러난다.
꿈 속에서 우리는 결국 근본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
주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다는 것은 그가, 실제로는 [그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나비를 본다는 뜻이다.

장자 나비 꿈
그는 포획된 나비이지만 그 나비를 포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꿈속에서 그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타자들에게 장자가 되는 것, 그가 타자들의 포충망에 걸려드는 것은 바로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다.

응시는 라캉의 대수학에서 주체가 추락하는 지점인 대상 a를 그 자체 안에 포함할 수 있다. 구조적인 이유들로 인해 시관적 장에서는 주체의 추락이 제로에 가깝게 축소되어 항상 인식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시관적 장을 특징짓는 것이자 그 장에 고유한 만족을 유발하는 원천이다.
응시는 그것이 거세 현상에서 표현되는 중심적인 결여를 상징화할 수 있는 대상a인 한에서 주체를 현상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무지한 자로 남게 만든다.
이 무지야말로 철학적 연구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사유가 진보하면서 줄곧 보여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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