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맑콤 다지원 섹션 발표문- 신지영 <공통성 없는 자들의 연루>

작성자
rakuta
작성일
2019-05-25 11:00
조회
1074
제9회 맑스코뮤날레- 다중지성의정원 섹션 <페미니즘, 정동정치, 그리고 공통장>

2019년 5월 25일(토) @ 서강대학교

공통성 없는 자들의 연루: 차질, 응축된 반작용, 취약성1)

신지영

<1> ‘연대’에 대한 질문 - 교차하는 권력, 보이지 않는 공통성

소수자 코뮌 사이의 연대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타자에 다가가려는 노력과 그 실패로 인한 안타까움을 담은 것이었다. 저곳의 고통이나 슬픔을 이곳에서는 완전히 느낄 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자각, 타자에게 다가가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간극과 위계가 존재한다는 한계에 대한 인식은, 소수자 코뮌 사이의 섣부른 동일화가 아니라 특이성이 공존하는 관계를 상상하게 했다.

그런데 최근 연대 불/가능성에 대한 담론은 교차하는 권력에 의해 생긴 분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들 사이의 갈등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면 난민수용을 여성이 반대한다든가, 일자리를 놓고 난민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든가 등의 담론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실재할까, 또 어떤 효과를 낳을까?

난민에 대한 혐오발언들은 한국 내 연합된 보수세력에 의해 유포된 것임이 알려지고 있다.2) 그러나 출처나 진위 여부와 별도로 이러한 담론들이 계속 이야기되는 것은 세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첫째로 이미 규정된 정체성에 기반하여 소수자들의 코뮌을 규정해버림으로써 생성되는 ‘이름 없는 코뮌’의 구성적 활기를 보지 못하게 한다. 둘째로, 각 신체를 통과하는 교차하는 권력들을 보지 못하고 ‘가짜 적’을 생산한다. 즉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이 소수자들‘의’ 갈등 때문인 것 같은 착시현상을 낳는다. 셋째로, 소수자들의 코뮌을 비교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소수자들의 공통장 형성을 방해하고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찾을 수 없는 포퓰리즘>이란 글에서 “유럽에서는 포퓰리즘의 위협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듣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 그러나 이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면서, 포퓰리즘의 담론적 효과를 비판적으로 논한다.3) 포퓰리즘 뿐 아니라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과장되게 설파하는 담론은 민주주의적 인민을 군중의 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만들고, 현재의 통치자들과 체제를 신임하지 않으면 위험한 전체주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설파한다. 이처럼 “포퓰리즘의 치명적 위험에 대한 오늘날의 대대적인 선전”은, 결국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없다는 생각을 이론으로 수립”하는 것이라고 한다.4) 이러한 포퓰리즘은 사실 난민처럼 “인구구성원의 일부를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언제나 추방당할 수 있는 노동자들”과 “프랑스인으로 남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프랑스인”을 만들어내는 데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 간파한다.5) 바로 이 지점에서 소수자 코뮌은 비교와 갈등의 대상이 되고, 소수자들은 더 낮은 위계의 소수자가 되거나 그들과 겹쳐지지 않기 위해 분열된다.

다른 한편, 소수자들 간의 관계를 갈등과 비교의 언어로 담론화하는 경향은 한국 사회의 변곡점을 반영한다. 즉 촛불혁명으로 이뤄낸 민주주의는 그 속에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나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사고를 심화시키지 못했고 이는 혐오발언이나 혐오 범죄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단식장 앞 피자 폭식행위, 5.18에 대한 모독, 묻지마 범죄의 확산, 난민에 대한 혐오발언 등 최근 대중의 움직임에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공존한다. 미류는 이 상황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을 넘어 정치의 기반 자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상황이라고 진단한다.6) 또한 이렇게 질문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대중적 움직임들에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가득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7)

김현미는 예멘 난민들의 유입과 함께 불거졌던 난민에 대한 혐오발언의 배경에는 “개혁정당이 대두된 2018년 한국사회의 정동 속 “히스테리적 혐오”8)가 있다고 말한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외국인이나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함께 “재분배, 평등, 안전 등과 같은 가치지향적인 의제들”이 얽혀 있었고, 이는 10년간 신자유주의적 보수 우파 정권에서 가속화된 경제격차와 불안 이후에 “‘이게 나라냐’로 시작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특권주의적 정서가 강화된 문재인 정부를 관통하는 사회장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분석이다.9) 문재인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바뀐 것은 없었고 일자리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차별에 대한 분노는 공정성에 대한 집착으로 수렴되었다”는 것이다.10) 소수자들 사이의 관계가 비교와 갈등과 경쟁으로 이야기되는 상황 속에는 바로 이러한 촛불 정권에 대한 실망과 함께, 소수자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 불안이 있다.

어떻게 하면, 포퓰리즘에 가담하지 않는 형태로 소수자 코뮌 사이의 관계를 섬세하게 말함으로써 태어나고 있는 소수자 운동을 연결해 갈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하면 소수자 코뮌 사이의 갈등을 낳는 핵심에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권력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소수자 코뮌 내부에서 다시금 반복되는 폭력과 억압을 끊어내는 연대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마이너리티 코뮌』(갈무리, 2016)에서는 생성되고 있는 무명의 코뮌을 기록하면서, 소수자 코뮌 사이 혹은 내부의 어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다. 한 예로 <여자와 퀴어들의 외치는 회>의 경험이 있다. 미야시타 공원을 개발하고 유료화하려는 나이키 회사는 그 이유로 미야시타 공원에 홈리스가 많아 여성과 아이가 무서워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들었다. 당시 이 회를 하자고 메일을 보낸 이치무라 미치코의 메일에는 “여성과 아이들의 공포를 마주하지 않고 야숙생활자에게 돌려, 여성과 아이들을 야숙자와 대립시키”려는 논리에 반발하면서 “저주, 화, 한, 분노, 슬픔, 증오, 원망, 비방과 같은 소리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성과 퀴어의 외치는 모임”을 연다고 쓰여 있었다. 이날 모인 여성과 퀴어들은 소수자 코뮌들의 용어를 차용하고 소수자 코뮌 사이에 갈등과 비교를 낳는 권력의 소리를 벗어나, 미야시카 공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소리를 지를 때마다 참여자들의 얼굴은 마치 어린애들의 얼굴처럼 환해졌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그 소리는 너무나 여성적이지 않아 ‘소프라노로 소리지르는 여성’이라는 시나리오에 파격을 가했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달려 왔지만, 참여자들은 “소리를 지르면 안된대”라며 ‘무지한 여성’의 모습을 패러디하며 타이르고 그 와중에도 다른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곤 하여 경찰을 당황시켰다. 즉 “홈리스를 ‘무서워한다’고 정의된 여자들은 소리를 지름으로써 그들 스스로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비명’이라는 두려워하는 소리가 아니라, ‘외침’이라는 두렵게 하는 소리로. ‘두려워하는’ 수동태가 아니라 ‘두려운’ 능동태로.”11) 이처럼 소수자 코뮌의 관계를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소수자 코뮌을 비교/경쟁/대립시키려는 힘에 맞서 새로운 정체성과 공통장을 발명하는 제스추어와 목소리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포퓰리즘과 포퓰리즘에 대한 위험을 선전하며 다중의 접속을 무력화하는 힘들 속에서 <<마이너리티 코뮌>>에서 말했던 ‘연대’라는 말은 권력에 자주 활용되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한 활동가의 질문, “권리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 가능할까?”처럼, 기존의 정체성으로부터 과감히 이탈한 공통장은 계속해서 생성된다.12) 이번 글은 바로 공통성 없이 보이는 것들 사이의 연루를 살펴봄으로써 소수자 코뮌의 연결고리를, 정체성과 민주주의의 근거가 문제 제기되고 있는 현재의 변곡점 위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특히 난민의 상태와 난민화된 소수자들의 상태가 구체적인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긴밀히 관련될 뿐 아니라 난민인권운동과 소수자운동이 서로에게 얼마나 깊은 자극이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적’이라는 명확한 차이와 간극을 인식하고, 동아시아 및 현재의 전지구적 내전 상태에서 ‘연대’와 ‘연루’를 고민한 사상가들(최일수, 모리사키 카즈에, 김시종, 주디스 버틀러)을 통해서, 이 각 소수자 코뮌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여러 정동과 반응과 표현들(차질, 응축된 반작용, 류민의 언어)을 불/가능한 연대의 사상적 좌표들로 모색해 보았다.

이처럼 소수자 코뮌 사이의 불/가능한 연대라는 말을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는 원래적 의미로 되돌림으로써, 활동가, 연구자, 시민, 당사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맺어지면서 형성되는 관계성을 ‘매듭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름 붙이고 이때 형성된 증언이자 선언이자 요청인 표현물들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불/가능한 연대가 일종의 매듭으로 연결되어 가면서 난민인권운동, 소수자운동, 평화운동이 기존의 정체성을 변형시키고 구성적 공통성과 공통장을 형성해가는 과정이었고, 그 속에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2> ‘어떤’ 난민인가 - 전지구적 내전 상태와 소수자 코뮌의 연루

낙인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의 이름은 빨갱이->종북->여성->난민->성소수자로 트윅스터처럼 교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각각 떨어져 존재하는 신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 정체성들은 권력과 맺는 관계에서 볼 때 긴밀한 공통성을 갖고 있다. 동시에 각 시기별로 드러나는 한국의 사회운동의 특이점 혹은 변곡점들을 가시화한다. 그 중 ‘난민’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난민’을 ‘국적’이 있고 없다는 정체성에 한정시키지 않고 ‘난민화’된 상태(state)을 통해서 사고해 보려고 한다.13) 그렇지만 ‘난민화’되어가는 삶의 양태에 대한 사유는, ‘난민’의 상태가 다른 소수자들과 달리 ‘국적, 시민권’이 없는 법적 제도적 군사적 상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이전부터 한국 사회에 난민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중반 경 예멘난민 500여명이 집단적으로 들어오면서 가시화되었다. 이때 한국사회는 식민지기, 해방직후, 한국전쟁 때 난민의 위치로 살 곳을 찾아다녔던 경험에서 받아들이는 위치로 변화되었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한국 내부의 상황에서만 보면 그러하다. 그런데 북한으로부터의 난민도 아닌 예멘, 이집트, 시리아 등 중동지역 혹은 아프리카로부터의 난민이 한국사회에 눈에 뜨일 정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전지구적 차원의 변화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소수자 코뮌의 관계는 예전부터 국가, 민족, 인종, 성 등으로 환원될 수 없었지만, 난민의 확산, 혐오발언, 테러의 양상을 보면 소수자 운동은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지구적인 차원과의 관계를 가져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샤를르 엡도 사건이 일어났던 2015년, 제1세계 내부에 제3세계가 파고들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형태에 대한 짧은 글인 <In War>를 발표한다. 전쟁은 저 멀리 떨어진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테러라는 형태로 제1세계 한복판에 끼어들었으며 제1세계 사람들은 제3세계의 ‘인질(otage)’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들은 전쟁상태에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들은 이미 ‘전쟁’ 한복판에 있다. 우리들은 공격을 하고 그 응보를 받았다.”라고 말하며 이 전쟁의 근본에 제1세계의 선제공격이 있지 않은가 반성한다.14) 그리고 일종의 전지구적 내전의 형태를 띤 현재의 폭력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복수하려는 열망에 저항하면서 “용기와 비타협”을 통해 평화를 일상의 질서로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식민지 해방 이후에도 줄곧 내전과 독재를 겪어 온 아시아와 한국의 상황에서 생각해 볼 때 새삼스러운 느낌도 든다. 한국을 포함한 식민지 경험을 지닌 아시아는 지금 새삼 내전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쭉 내전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잠시 너무 익숙해 잊혀졌거나 비가시화되었던 내전상태가, 이번에는 한국 내부로부터가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난민’을 통해 실감되고 있다. 비록 탈분단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 내부의 휴전상태에 더하여, 저 멀리 있었던 분쟁과 전쟁이 한국 내부에 깊숙이 들어왔다. 이 내재하는 전쟁상태는 한국사회의 소수자 운동의 연대와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지구적 연루가 발생하고 있다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예 삽입) 난민인권활동이 평화활동 및 소수자 활동과의 연관성을 재구축하는 지점이 여기다.

따라서 이러한 설명들은 다른 소수자의 상태 보다 난민의 상태가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전지구적 내전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난민의 상태와 다른 소수자의 상태가 어떤 공통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유도한다. 이 질문은 난민의 특수한 조건을 규정할 때보다, ‘난민’이 아닌 다른 소수자들의 난민화된 상태를 가시화할 때 래디컬해진다.

미류는 3월 23일에 개최한 사회인문학 포럼 티치인 <신인종주의와 난민>의 발제문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무엇을 포괄하는가>에서 소수자운동과 난민운동의 접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소수자운동과 난민운동은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성소수자로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 한국으로 와 난민신청을 했지만 다시 한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난민들의 상황을 예로 든다.15) 이처럼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해서 성소수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난민운동과 소수자 운동의 접점이 아니라 난민운동 안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성소수자 문제를 자각하게 하며 동시에 성소수자들 중 난민이 있음을 가시화한다.

난민X여성. 난민이면서 여성인 상태는 복합적이다. 난민인권센터에서 나온 난민들의 에세이집 <<안녕 한국!>>16)에서 자로스는 안정된 취직을 할 수 없는 인도적 체류지위 상태에서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고통에 대해 쓴다. 그 고통 속에는 가난과 동사무소에서 “떠돌이 개처럼 밖으로 돌려 보내졌”던(안녕/43) 기억과 흑인이라고 당했던 인종차별이 드러난다. 이러한 고통을 난민이며 여성이며 가난한 자이며 흑인이며 싱글 맘이며.... 라고 수많은 이름을 겹쳐 놓음으로써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수많은 이름을 붙이기 전에, ‘난민의 재생산 권리’라는 주제로 접근하면 이름들은 후경화된다. 그리고 ‘원치 않는 임신’이 전시성폭력 뿐 아니라 가정폭력, 무국적자의 이동 등 다양한 상황에 동반되는 위험임이 드러난다.17) 고은지는 <난민과 임신 중지 권리에 관한 메모>라는 글에서 난민여성은 전체 난민의 50%를 차지하며 그녀들이 난민이 된 원인에 전시성폭력이 있을 뿐 아니라 난민으로 이동하는 과정 뿐 아니라 정착한 뒤에도 끊임없이 강간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간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그녀들은 한국에서 또 다른 어려움에 부딪힌다. 한국의 이주/난민 정책이 난민들을 삶의 기본권으로부터 철저히 배제시켜 왔기 때문에, 난민지원이 종교단체에 의해 이뤄진 경우가 많고 난민여성의 재생산 권리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못했다. 따라서 임신을 한 여성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의료체계에 접근할 수 없는 상태에서 비합법적 임신중절을 시도하게 된다. 비합법적 임신중절은 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이것이 알려지면 강제송환될 수도 있다. 즉 난민여성의 강간 등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상황을 낙태시술의 접근성과 관련시켜서 살펴보면, 그녀의 몸을 통과하는 수많은 폭력들이 가시화된다. 전쟁 속 성폭력, 일상 속 성폭력, 말할 수 없는 피해경험, 집안의 감금, 불법낙태시술 등이 그녀들이 처한 상태이다.

난민여성이 난민인정 심사 절차에서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에 초점을 맞춰보자. 심사 과정에서 난민 여성들은 기본적 인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피해경험을 감추거나 침묵해야 한다. 고은지는 난민 여성들에게 난민심사가 그녀들의 경험을 침묵시키는 과정임을 지적한다. 난민심사는 “가족패키지” 즉, 가족단위로 이뤄지는데 여성들은 생존과 보호를 대가로 가정 내 폭력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임신이 강간이나 성매매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상황 속에서만 난민으로서 심사를 받고 난민의 인권이라는 제도적 승인을 받을 수 있다는 이 모순된 심사 앞에서, 여성들은 스스로의 몸에 대한 재생산 권리에 대해서도 그 권리를 위해 시스템이나 정보에 접근하는 루트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즉 인권을 인정받기 위한 심사과정이 곧 말할 장소로부터의 박탈이라는 인권침해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침묵함으로써만 (‘시민’도 아닌) ‘난민’이 될 수 있는 그녀들의 상황은, 침묵함으로써만 ‘시민’이 될 수 있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상태를 비춘다.

이런 구체성 앞에서, 난민과 여성이라는 두 소수자 정체성의 비교와 갈등 담론은 설 자리조차 찾을 수 없다. 드러나는 것은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한 몸 위로 교차하는 수많은 권력들이며, 그 몸의 고통과 떨림과 연약함에 공감하면서도 침묵하고 있는 ‘우리, 난민화한 여성’의 상태들이다.

난민X하층노동자(혹은 청년). 난민과 하층 노동자 사이의 경쟁과 비교는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혐오발언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실 한국사회의 현 상황에서 ‘난민의 노동’이란 형용모순이다. 난민인정을 받는 비율이 5%로 되지 않을 뿐더라 대다수는 인도적 체류자격을 받는데, 이 자격으로는 안정된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난민신청을 한 뒤 받는 G-1비자 상태에서는 6개월간 취업이 불법이다. 한 난민의 말을 빌리자면 난민들은 법을 어기면서 살거나 법을 지키며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난민들은 일자리를 필요로 하며, 현상적으로는 한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는 위협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죽음 노동을 하는 불안정한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누구인가를 질문해 보면, 난민인 노동자와 하층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라는 담론의 기만성이 드러난다. 난민이 사라진다고 해서 죽음 노동을 하는 조건이나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 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과 위계를 만들어내고 늘 더 취약한 자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자본의 노동자 관리 전략이다.

난민인 무사 사피엔툼은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 사장님은 노동시간위반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그분은 취업이 어려운 저를 채용했으니 이미 저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안녕/48쪽) 난민의 노동이 합법화되고 정당한 노동법에 의해서 다루어져야만 노동조건 전반이 개선될 수 있다. 난민과 노동자는 대립하는 항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착취 시스템에 의해 공통된 장에 연루된 존재들이다.

난민X성소수자. 난민이면서 성소수자인 경우는 드러나지도 이야기되지도 않는다. 튀니지 출신 난민이자 성소수자인 아마두는 한국에 온 뒤 다시금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만나 시설화된 상태에 빠진다.

저는 혼자서 고시원이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아주 작고 창문이 없는 방 한 칸이 전부였습니다. 고시원에서는 다양한 국적, 종교, 문화, 나이 대의 사람들과 화장실을 함께 사용해야 했습니다. 저는 성 정체성을 이유로 한국에 온 것이었기 때문에 고시원에서는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알지 못하는 남성들, 저와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남성들과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변과 단절된 채 매우 외롭게 살았습니다. 외출도 하지 않았고,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응하지도 않았으며 밥도 거의 제대로 챙겨먹지 않은 채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거나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문자만 주고받았습니다. (안녕/90~91쪽)

난민심사과정 또한 성소수자에게는 폭력에 노출되는 과정이며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국가의 심사와 언어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이다. <신인종주의와 난민> 의 나영정 토론문은 성소수자의 난민심사라는 문제를 파고든다.18) 나영정은 난민운동을 통해 “정체성이 정당성을 보증한다거나 정체성을 진술하는 것 자체가 권리라는 말이 어떤 조건에서나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소수자 난민이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때 “성소수자가 나를 규명하기 위해서 찾고 가다듬어왔던 ‘정체성의 언어’가 임의적으로 자격이 부여된 몇몇 사람에 의해서 검증되고 승인된다”고 문제제기한다.

난민 성소수자는 일상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감춰야 하는데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서 심사절차에서는 내밀한 경험과 고투 속에서 정립해 온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국가의 언어와 제도에 맞춰 입증해야 한다. 이 모순된 상황은 소수자성이 마치 비교가능하거나 측정가능한 것처럼 담론화함으로써 오히려 구체적인 성소수자들의 고통과 복수성을 정형화하고 보이지 않게 만든다. 이처럼 소수자성을 비교할 수 있거나 측정할 수 있는 국가의 언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소수자성을 폐쇄적이고 규정된 정체성으로 환원해 버림으로써, 다른 소수자들의 상태와의 연대의 조건 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난민X여성, 난민X하층노동자, 난민X성소수자와 같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에서 시작하더라도, 그 각각의 상태가 만들어내는 훨씬 더 구체적인 상황들을 파고들면, 기존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폭력과 억압의 복잡성과 함께, 몸을 가진 존재들의 취약성이라는 상호의존적인 공통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연루됨은 난민과 여성을, 난민과 노동자를 대립시켜 혐오의 정동을 확산시키고 공분의 벡터를 혼동스럽게 하는 권력의 언어이자 포퓰리즘의 언어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난민 일반’, ‘소수자 일반’이 아니라, ‘어떤 난민인가, 어떤 소수자인가, 어떤 ~ 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3> 이행의 순간들과 연대의 불/가능성 -최일수, 모리사키 카즈에, 김시종

그러나, 난민의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하나의 몸에 교차하는 수많은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만을 드러내는가? 혹은 소수자 코뮌의 연대는 고통을 통해서만 피해자다움을 통해서만, 수동적인 위치에서만 가시화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비록 1세계 서양 백인 여성의 입장이 뚜렷하지만, 성소수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는 “행위를 당하기도 하고 행위를 하기도 하며 우리의 ‘책임’은 그 두 상황의 접점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19) 행위를 당하는 것은 우리를 우리를 둘러싼 조건에 속박시키지만, 행위를 하는 것은 그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수행적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들이 우리의 행위에 대해 최종적 책임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폭력의 역사적 대물림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라고 질문한다.20) 이러한 해석은 폭력을 당하고서야 그 폭력을 자각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는 점에서 제1세계의 경험이 그 핵심에 있다. 따라서 식민지를 경험하고, 전쟁상태 속에서 냉전을 경험하고, 독재와 내전과 민주화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아시아의 역사 속으로 바로 끌어들이려면 다소간 위화감이 든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조건을 바꾸려는 행위 속에서, 책임이 이야기될 수 있다는 언명은 중요하다.

난민들이 난민이 된 상황에는 바로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조건을 ‘이행’시키거나 ‘창조’하려 했던 결단의 계기가 나타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삶의 환경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노력, 새로운 공통장에 대한 욕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결단과 행위들을 전지구적 연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윤리적 기반으로 삼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이집트 거주 팔레스타인 ‘난민’의 신분이었던 라흐만은 <나의 연대기>라는 에세이에서 이집트의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던 순간을 적는다. “정권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두려웠지만, 흥분도 되었습니다. 시위 현장에 다가가다 보니 어느새 저는 시위대의 일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이 나라를 지배하는 깡패들로부터 사랑하는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그 감정에 푹 빠졌고 그때부터 종종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안녕/118쪽)

안젤로는 <평화로운 마음>에서 사람들의 아귀다툼 안에 스스로를 출연시키길 그만두기로 결심 한다. 독재로 인한 연료부족사태가 지속되자 아침마다 “힘세고 강한 사람들만이 버스에 겨우 올라탈 수 있”고 “노인,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자리를 구하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용이 없”는 상태가 된다.(안녕/83쪽) 안젤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소득 없는 아귀다툼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안녕/83쪽). 래리 마도워는 <소망>이라는 글에서 부족 간 싸움이 여성들에 대한 전시 성폭력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다시금 집 안에 갇힌 상태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에이즈에 걸리는 상황에서 도망쳐온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딸이 제가 겪었던 끔찍한 고통을 다시 겪지 않기를 기도합니다.”(안녕/16쪽)

헨리는 <고향의 처지>에서 자신이 양성애자임이 알려지면서 모든 것이 변화했다고 쓴다. 단지 양성애자라는 이유로 죽이려고 드는 부족사람들을 피해 캄팔라거리로 가지만 우간다 정치상황으로 젊은 사람들은 다시금 위험에 처한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알렉스는 예멘에서 살면서 몰랐던 자유의 의미를 해외에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 자유의 공기가 좋았던 그는, 어머니 장레식장에서 스스로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게 되고 이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쳐 온다. 그는 한국에서 어둡고 냄새나고 벌레가 많은 쉼터에서 묶게 되지만, 의지가지 없는 상태에서도 “쉼터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거리를 나선다.(안녕/99쪽). 그는 말한다. “제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자유의 대가임을 깨달았습니다”라고.

사르다르는 파키스탄 정부기관의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온다. 구금과 같은 상황인 보호소의 열악한 환경에 단식농성으로 저항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길을 걷다 길 한가운데에 놓인 돌을 발견한다면, 그 돌을 주워 도로변에 두어 길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지나간 뒤 시각장애인이 그 길을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요.-중략-이것은 누가 봐도 작은 실천에 불과하지만 이로 인해 누군가를 어려움으로부터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터득한 지혜에 의하면 ‘삶은 대부분 투쟁의 연속입니다’ 계속해서 싸워 나가세요. 절대 희망을 잃지 마세요.”(안녕/115쪽)

이들의 글에는 스스로의 삶을 독재정권이 좌지우지하게 놔두지 않겠다는 결심, 숨길 수 없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 전쟁과 폭력을 피해 생명을 보존하려는 의지, 더 나은 관계를 만들려는 욕망 등이 표현되어 있다. 우연하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져 온 지층을 뚫고 나오는 순간들,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히 삶을 바꾸는 순간들로 차 있다. 이것들은 극한적 상황이 아닐지라도 소수자 코뮌이 공통장을 형성하기 위한 정동이며, 이 말들은 그들의 몸이 놓인 상태들과 떨어져서는 말해질 수 없는 슬픔, 고통, 애도, 고양, 반려로 점철된 수행적 발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의 계기들을 곧바로 한국의 소수자 운동의 해방의 계기들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한국에 온 그들은 ‘국적’이라는 종이 한 장(임화 <비오는 시나가와 역>)이 낳은 법적 지위의 차이 때문에 한국에서 더 큰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다. 따라서 다시금 연대의 불/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연대의 불/가능성’은 소수자 코뮌들 사이의 비교와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난민과 한국의 소수자가 연루된 기반을 사유하고, 소수자 코뮌의 마주침의 순간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반응, 정동, 표현들을 불/가능한 연대의 에너지로서 적극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최일수의 ‘차질’, 모리사키 카즈에의 ‘응축된 반작용’, 김시종의 ‘류민’, 주디스 버틀러의 ‘취약성’을 이론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이 연대의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상태들은, 동아시아와 한국의 경험 속에서 구성되어 온 관계의 사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1950년대 최일수의 ‘차질’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난민과 난민은 연대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한국역사 속 제3세계 연대론 속에서 검토해 보자. 난민 에세이집 <<안녕, 한국!>>에는 시기는 다르지만 식민지, 해방, 독재, 혁명, 군부독재,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는 이야기가 중동이나 아프리카 지방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수단에서 온 나오라스는 “한국은 번영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까지 참혹한 인권침해를 겪어 왔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부터 시작하여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정부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안녕/103쪽)라고 하며 그러한 한국의 역사가 수단의 현 상황을 극복하는 한 모델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1950년대 한국의 문학비평가였던 최일수는 바로 이 문제를 고민했다. 한국에서 제3세계와의 연대론이나 제3세계 문학론은 1970년대에 들어서 창작과 비평 계열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일수는 1950년대 중반이란 이른 시기에 한국의 민족문학과 동남아시아의 민족문학은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쓴다. 이런 주장을 담은 대표적인 비평글로는 「동남아의 민족문학」21)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민족문학론을 동남아의 약소 민족(타이, 버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파키스탄, 실론 등) 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한다. 동남아 민족문학은 오랜 식민지 지배로 “외래문학에 대한 비판적 토대와 민족고유성의 창조적 계기”가 약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민족적인 비판의식과 저항의식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족문학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동남아/82쪽)

동남아 약소 민족들의 문학은 표면에 있어서는 외래문학의 극단적인 모방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만치 강력한 민족의식이 내면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러한 이율배반의 양상을 띄우고 있다.

원래 이런 현상은 오래인 세월을 통하여 지배해 온 식민지 또는 半식민지적인 외래제약에서 오는 것이다. -중략- 표면적으로는 외래문학에 대한 비판적 토대와 민족고유성의 창조적 계기가 약화되었으나 반면에 민족 간에 의식 있는 지성인의 성장과 더불어 독특한 민족적인 저항의식이 짙게 흐르고 있었다. -중략-이 행동은 외래제약이 아시아 독특의 정체성과 겹쳐서 그 후진성을 여지없이 강요받은 그러한 저차원의 상황하에서 발현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옹호를 주제로 한 유우럽의 ‘레지스탕스’와는 근본적인 차질이 기재하고 있었다. (동남아, 81~82쪽)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차질’은 근대와 구별되는 현대의 특질이며 서구현대문학과 구별되는 아시아현대문학의 특질을 의미한다. 약소민족이 서구의 보편성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와의 지속적인 접촉과 투쟁 속에서 한국문학의 특이성(particularity/singularity)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22) 을 그는 ‘차질’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괴테의 세계문학론이 “초민족적인 보편적 인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비판하고,23) ‘세계문학’과 ‘세계성’을 구분한다. 세계성은 약소민족이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서구 보편의 근대를 비판하며 길러온 과정에 내재한다.24) 따라서 2차대전 이후의 문학은 “내면적인 신변잡사의 심리”를 그리고 있는 서구문학이 아니라 “강인한 자주 정신의 행동적인 사고 방식”을 담은 아시아 문학이 열어갈 것이라고 예견한다.(현대문학/11쪽, 동남아/86쪽)

이처럼 ‘차질’이란 타자화된 민족의 문학이 서구의 보편적 문학을 욕망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약속 민족 각각의 특수성에 매몰되는 것도 아닌, 약소민족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상호공통의 계기와 가치들을 보기 위한 인식틀이다. 또한 그는 차질을 지닌 약소민족들이 서로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계를 꿈꾸었다. “민족이 민족으로써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민족의 존재이유도 인식해야 하며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계라는 위치에서 평등하게 집단되고 형성되어 있는 한 단위로서의 민족이어야 하며 국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5)

타자들 간의 관계를 통한 최일수의 민족문학론은 50년대의 서구 문학 추수나 보수적 전통론 모두에 거리를 두고, 이미 70년대에 등장하는 제3세계 문학론을 선취했으며, 식민지기와 70년대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된다.26) 최일수의 이런 논의는 1955년 반둥회의의 비동맹 사상과 알제리 민족해방 투쟁을 지지했던 사르트르의 영향 등이 그 배경에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27)

최일수의 사상은 난민들이 제3세계, 비서구로부터 온 존재들이며 식민지, 내전, 독재 등의 역사를 한국과 공유하고 있음을 가시화한다. 제국-식민지기의 폭력과 억압의 역사가, 현재 전지구적 내전의 형태로 반복되면서 두 지역을 만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드리 키아리가 제기한 서구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그는 인민을 말할 때 “어떤 인민”인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하면서 “‘인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연히 ‘인민은 무엇에 맞서 구성되는가?’라는 다른 질문으로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28) 프랑스에 망명한 난민으로 살아가는 그는 현재의 ‘인민’ 개념이 국가주의적으로 변화하는 지점들을 비판한다. “프랑스 좌파의 논의도 결국 이슬람, 아랍인, 흑인들의 “비시민 지위를 보존하는 데 기여”하며 “가장 불우한 사회 계급들의 많은 부분을 정치적 장 밖으로 추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인 인민 계급들과 이민자 출신 인민 계급들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구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좌파는 그 백인의 특권에 맞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단언한다.29)

최일수의 사상은 한국의 경험을 제3세계의 폭력과 억압의 경험 속에 위치 지우면서, 난민들이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연결시키고, 한국역사 속 난민성을 자각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의 논의 속에서는 약소 민족 속 여성, 성소수자, 등 비민족의 위치가 보이지 않을 뿐더라 타자와의 구체적인 접촉의 경험들이 드러나 있지 않다. 식민주의의 타자들 간의 연결 속에서, 피식민자 내부의 소수자들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 및 최근의 촛불혁명 이후에 형성된 문재인 정권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에서 오래된, 그러나 현재적 질문을 던져준다.

둘째로, 모리사키 카즈에의 사상을 통해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실패한 순간의 에너지를 불/가능한 연대의 조건으로 사유해 볼 수 있다. 식민자의 위치에서 모색된 아시아 유민과 연대론에는 식민자가 라는 위치의 한계와 함께 타자와의 간극을 인식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이 드러나 있어서, 한국사람과 난민과의 연대 불/가능성을 사고할 때에도 시사적이다.

모리사키 카즈에는 재조 일본인 2세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단일민족신화가 지배하는 일본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따라서 모리사키 카즈에는 1958년 8월에 큐슈 탄광에서 다니가와 간(谷川雁), 우에노 에이신(上野英信), 나카무라 키이코(中村きい子), 이치무레 미치코(石牟礼道子)등과 함께 네트워크 문화운동잡지『서클마을(サークル村)』을 창간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탄광부, 오키나와와 조선으로부터의 이주민, 전쟁 귀환자 등 이질적인 집단과 함께 코뮨을 실험했다. 이 코뮨은 국가와도 스탈린주의적 공산당 조직과도 거리를 둔 이족들의 코뮨이었다. 특히 모리사키 카즈에는 탄광에 있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 1958년 9월에는 그녀들과 함께 ?무명통신(無名通信)?을 발간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당시 우먼리브 중심의 일본 페미니즘과도 거리를 둔 활동이었다. 또한 1965년 다니가와 간이 도쿄로 이주한 뒤에도 계속 탄광촌에 남아 활동을 지속했으며 이후 여성 어부의 이야기, 해외 매춘부 여성의 이야기 등을 듣고 쓰는 독특한 글쓰기를 지속했다.

모리사키 카즈에의 글은 크게 보아 세가지 측면에서 읽을 수 있다. 재조 일본인 2세의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 일본 페미니즘의 계보, 아시아 유민의 역사. 본 논문에서는 세 번째 지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때 「민중이 지닌 이질적인 집단과의 접촉 사상 - 오키나와 ‧일본‧조선의 만남」은 중심적인 텍스트이다. 이 글에서 모리사키는30)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식민지적 관계를 극복하고 타자들간의 자율적인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접촉사상(接觸思想, colonial contact)’을 탐구한다. 즉 오키나와, 일본, 조선의 ‘이족’들이 자본・식민주의・국민국가에 의해 타율적으로 접촉하지만, 그 속에는 노동을 통한 접촉 속에서 이족들간의 자율적인 관계 또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모리사키 카즈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국가의 근대화란, 이처럼 먹고 살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불안으로 계속해서 내달려 왔던 계층에 의해서 지탱되었다. -중략- 이런 형태로 이질적인 생활의식과 직접 만나 왔던 민중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생활의 사상으로서 남기고 있다. 이것들은 타율적인 민중 역사 속에 존재하는 자율적인 부분이다. 근대에 걸쳐 일본이 오키나와 및 조선과 가졌던 만남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리사키의 연대론 속에는 피식민지 민중과 종주국 민중 사이의 큰 간극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사키의 논의 속에는 이러한 간극이 불거진 순간을 불/가능한 연대의 사상으로 구축하려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북큐슈 탄광 노동자들과 「우리 오키나와(わがおきなわ)」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고 오키나와 민중과의 교류를 시도한다. 그런데 이 기관지를 오키나와에 가져갔던 노동자 회원은, “우리 오키나와라니 말도 안 된다”는 반응에 부딪친다. 내부 식민지로서 오랫동안 본토 일본인에게 고통을 받아온 오키나와인에게 본토 일본인이 ‘우리’라는 말을 붙여 그 고통스러운 역사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나는 북큐슈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오키나와를 생각하는 회(沖縄を考える会)」라는 소집단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 우키나와(わがおきなわ)」는 그들이 편집해서 발행하는 프린트 인쇄 기관지이다. 「우리 오키나와」란 우리들 몸 속에서 오키나와의 사상을 발견하고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기관지를 오키나와에 가져갔던 회원은, “우리 오키나와라니 말도 안된다”라는 즉각적인 반응과 부딪쳤다. 우선 그렇게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 속에야말로, 오키나와는 이야기되고 있다. 나는 그러한 반응이 지닌 ‘적극성’과 ‘보수성’의 결합을, 오키나와 공동체가 지닌 대외에 반응하는 민중의 촉수로서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땀으로 가득찬 응축력, 그 반작용들을, 오키나와가 본토 민중에게 발신하는 「나의 본토(わが本土)」로 삼아 귀 기울이고 싶다.

모리사키는 이 에피소드를 언급하면서 일본인 하층 노동자가 내부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를 향해 “우리 오키나와‘라고 부를 때, 오키나와인이 이를 즉각 거부하는 “고통스런 땀으로 가득찬 응축력”인 반작용들, 그것이 내포한 “적극성과 보수성의 결합”을 접촉사상의 촉수로서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리사키의 이러한 통찰은 난민에 대해서 논의하는 이 글 곳곳에서 재현된다. 내가 ‘난민’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에세이를 인용할 때마다 한국에서 기본적인 인권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겪는 축적된 고통과 반발이 느껴진다. 저항감과 비판의식을 지닌 난민들의 ‘응축된 반작용’을 통해 국적을 가진 나의 위치는 관통당한다. 이러한 응축된 반작용 속에서 난민과 난민화되고 있는 소수자들의 불/가능한 공통장은 형성되고 있으며 이러한 반응과 정동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모리사키의 글은 보여준다.

세 번째 좌표는 재일조선인으로서 ‘流民 의 사상’을 전개한 김시종이다. 류민으로서 일본에서 일본어로 시를 쓴 그의 행보는, 한국 역사 속 난민의 경험을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한국의 미래를 난민의 미래를 통해 상상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류민의 기억’을 둘러싼 논쟁은 재일조선인 동인지 『진달래』 15호와 16호에 걸쳐 시집 『지평선』(1955)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31) 홍윤표는 <유민의 기억에 대해서 – 시집 『지평선』의 독후감>이라는 글에서, 김시종의 ‘유민의 기억’과 관련된 부분이 부르주아적 감상에 젖어 있다고 비판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의 긍지가 주어지고 있는 지금, 유민의 기억과 연관되는 부르조아 사상의 일절을 우리들의 주변으로부터 일소시켜야만 한다.”32)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김시종은 <나의 작품의 장과 ‘유민의 기억’>이라는 글을 통해서 반박한다.33)

이 글에서 김시종은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교사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조선옷을 입으면 어색하고 ‘반쪽바리 말(半일본인의 말)’을 사용하면서, 당위로서의 조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재일 청년들의 갈등을 ‘류민의 사상’으로서 구체화한다. 일본문학에도 한국문학에도 포섭될 수 없는 독특한 말의 자리를 구축해 온 김시종의 류민의 사상과 작품들이 시작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류민의 언어와 작품은 현재 한국 안에 들어와 있는 이주자와 난민들의 2세, 3세가 어떠한 말의 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가를, 한국 역사의 외부이지만 한국 역사와 함께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재일조선인의 난민화된 경험 속에서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몸의 근원적인 취약성 논의는, 백인, 여성, 제1세계 엘리트이지만, 성소수자인 그녀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타자와의 ‘연루’와 그 윤리적 함의를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위태로운 삶>>은 9.11 테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 “내 삶이 저 밖의 타인, 내가 알지 못하고 또 절대로 알게 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의 순간이며, “이름 모를 타인에 대한 이 근원적 의존은 내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말한다.34) 따라서 상처는 “상처에 대해 성찰하고 상해가 배분되는 기제를 알아내고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국경과 예기치 못한 폭력과 박탈과 공포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가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받는지를 알아낼 기회를 갖게 되는 일”이 된다(위태로운/10쪽)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취약성의 사고 중심에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몸들”이라는 사실이 있다.(위태로운/47쪽) “몸은 삶의 유한성, 취약성, 행위주체성을 암시” 하며(위태로운/53쪽), “육체적 취약성에 대한 사유, 즉 우리가 정복당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한 사유”를 계속하는 것이 관계의 구축에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위태로운/59쪽) 이러한 몸의 취약성이라는 근본적 조건을 보면, 난민은 난민화하고 있는 소수자들과 긴밀히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연루에 대한 자각은 난민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의 한 양태로서의 젠더나 섹슈얼리티는 ‘소유(possession)’가 아니라 박탈(being dispossessed)로 존재한다.(위태로운/52쪽) 이 관계는 정념으로 인해 자아를 초월하여 이동하는 과정이며, 어떤 분노와 슬픔을 난민의 상황 속에서 공유한다면 그것은 “ec-static”의 상황, 즉 “문자 그대로 자아의 밖에 있다. to be outside oneself는 뜻”이 된다.(위태로운/53쪽) 주디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또는 그 조건들에 나를 포함할 수 있다면, 나는 성적인 정념에서든 슬픔의 감정에서든 정치적 분노에서든 어떤 식으로 우리 자신의 옆에서/우리 자신이 아닌 채로(beside ourselves)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위태로운/52쪽) 주디스 버틀러의 몸의 근본적 조건으로서의 취약성, 상처를 통한 타자에 대한 인식, ‘우리’에게 말걸기가 전형화된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에 대한 탐색은, 난민화된 소수자들과 난민들과의 연대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루됨과 말걸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난민들이 보여주는 해방의 계기들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 해방의 계기들이 난민화되고 있는 소수자들의 해방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국적을 보유했는가 여부는 난민과 소수자 운동 사이의 명확한 간극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논의된 차질을 간직한 제3세계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의 공통성, 타자에게 다가간 순간 나타나는 응축된 반작용의 에너지, 난민의 미래를 재일조선인의 난민화 경험 속에서 한국의 미래와 함께 꿈꾸게 하는 류민의 언어, 몸의 취약성을 통해 난민과 소수자가 연루되어 있다는 인식은, 난민과 난민화의 간극이 포기와 단절의 지점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과 공감이 태어나는 지점임을 보여준다. 이는 소수자 코뮌 사이를 비교하고 경쟁시키면서, 소수자성을 규정된 정체성이 포박하거나 측정가능한 국가의 언어로 만들어버리는 담론들에 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가 구성되는 공통장이기도 하다.

<4> 매듭이 되는 것

다양한 소수자 상태가 부딪치며 직조해내는 차질, 응축된 반작용, 류민의 언어, 취약성의 연루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주침’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을 매듭이 되는 것, 매듭을 만드는 것이라고 부르고 현재의 활동들 속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최근 한국에서 출판되는 많은 저작들은 기록, 증언, 구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말의 장소를 갖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담으려는 행위이자 아카이브를 ‘다중’의 수행 수단으로 만드는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그러한 저작이나 기록 중에서도 관계의 매듭이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여태까지 여러번 언급한 <<안녕, 한국!>>(난민인권센터, 2018년)이 그 하나이다.35) 다른 하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53명의 소견서를 모은 <<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전쟁없는세상 엮음, 포도밭, 2014년)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저작은 나를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로 이끌고, 다시금 그 홈페이지에 실린 <여성들의 병역거부 선언>과 만나게 했다.36)

첫 번째 책은 난민인권센터에서 독립출판되었는데, 난민들의 에세이를 모아 번역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증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 대한 요청이자 인권선언이다. 두 번 째 책과 블로그의 글은 국적을 갖고 있지만 ‘국민의 의무’로 규정된 병역을 거부함으로써 선거권을 박탈당하거나 직업이나 사회 생활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난민화되었던 병역거부자의 경험을 담았다는 점에서 선언이자 증언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증언이며 선언이고 선언이며 요청인 이 두 글모음에는 이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관계가 끊임없는 매듭으로 이어져 있다. 활동가, 당사자, 연구자, 독자, 그리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매듭들이 계속되는 활동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안녕, 한국!>>은 알 아흐마드의 <선언문>으로 시작되고, 난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고 싶다는 활동가 고은지의 문제의식이 나오고, 난민들의 에세이를 번역한 장유진님이 주저하면서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이 나온다. 당사자, 활동가, 번역가의 매듭 속에서 탄생한 이 책은, 최근 난민법의 개악을 막기 위한 활동 속에서 시민들의 법무부 장관에게 편지쓰기 활동과 이어진다.37) 이러한 매듭을 만들어내는 동력은 난민들이 처한 취약성에 대한 공감이자,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연루되어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통에 대한 공감과 해방에 대한 욕망이 당사자, 활동가, 연구자, 번역가, 독자, 시민을 잇는 매듭마다 새겨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국적 없는 난민의 말이 국적있는 시민의 말과 만나, 난민들의 공통장을 구성하는 장면이다. 난민들의 에세이는 정식출판도 아니며 한국의 정치적 공론장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한 위치에서 발화된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는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발언권’을 가진 ‘시민’들의 편지쓰기 속에서 드러나며 말의 자리를 마련되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 인민”이라는 수행적 발화를 분석하면서 인민주권이란 자기 입법적인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우리 인민’이란 ‘자기구성적(self-constitution)’ 형태의 표시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인민’의 수행적 실행은 바로 그 특정한 어구를 발음하기에 앞서” 일어나며 체현된다고 말한다.38) 즉 난민과 난민화된 상태의 존재들은 서로 매듭을 이어가면서 에세이와 편지쓰기라는 수행적 실행을 통해 난민의 말이 드러날 공통장을 형성해 가고 있다.

물론 말하기의 순간은 보호에서 박탈된 채로 노출되는 것이기도 하다. 편지쓰기를 하는 시민들 보다 에세이를 쓴 난민들은 보다 취약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없는 셈 쳐지는 그들의 수행적 발화들은 새로운 정치적 조직 혹은 공통장을 형성하는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39) 그런 점에서 청년들이 쓴 편지가 눈에 띤다.

스무살인 한 청년은 자신은 매우 가난하지만 “내 이웃과 이 세상의 생명들과 더불어 살 때 저는 제가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을 배제하며 내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한다.40) 2년 전 대학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자취를 한다는 한 청년은 마을 공동체에 속해 살면서 공동식사를 하며 돕고 사는 삶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고, 또 도움을 줄 수 있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난민들과 더불어 사는 삶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41) 29살 청년은 자신이 이민을 가고 싶어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는 이른바 ‘청년 문제’의 청년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한국에서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이 사회의 끔찍함을 목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난민신청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인격적 사건이나 “난민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냉혹함, 무신경함, 적대감은 제가 속해 있는 이곳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42)

난민들과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될 거라는 청년들은 오히려 자신과 난민의 삶이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듯이 그들도 그러함을,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다면 자신의 삶의 기반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시민의 자리에서 발화하지만 활동가들과의 매듭을 통해 당사자와 연결되어 가고, 다른 한편으로 난민들을 대신해 법무부장관에게 말하는 입이 되어 간다.43)

한편, 여성들의 병역거부선언은 이미 규정된 정체성의 자리를 뒤흔드는 매듭을 만들어 가고 있다. ‘여성’으로서 병역거부를 함으로써 병역의 주체로부터 소외된 자리(따라서 시민의 평등한 권리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를 드러내고, 모두가 전쟁에 연루된 상태라는 것을 가시화한다. 특히 병역거부자들이 모두 제주 강정의 미군기지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은 새로운 매듭들을 드러낸다. 평화 시민으로서 평화운동의 시간과 장소를 폭넓게 연결시키며 다른 활동들과 링크되어 간다.

<여성은 왜 병역을 거부하는가?>44)라는 선언에서 왕유쉔(王郁萱)은 “여성으로서 병역거부를 하는 것” 보다 “평화시민으로서 병역거부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고 서두를 연다. 이분법으로 남녀를 나누고 정체화함으로써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폭력의 구조에서 벗어난 말의 자리가, ‘평화시민으로서의 병역거부’인 것이다. 평화시민이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예를 들어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살며 감수성과 상상력 그리고 창조력으로 흔들리는 정체성을 가꾸며 폭력을 변혁시키는 노력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신을 둘러싼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행위는 정체성을 만드는 권리가 권력에게 양도되어 있는 상태에 파격을 가한다.

평화시민인 왕유쉔의 병역거부 선언 끝에는 “병역거부 선언문을 쓰게 만드는 여정에서 많은 영향을 주신 분들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말에 이어, 평화복무의 꿈을 꾸는 친구에게, 군사기지 저항활동에서 고통을 겪은 활동가, 현지주민, 새로운 정착민, 군인, 경찰, 공무원, 노동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등 다양한 존재에게 감사한다고 쓴다. “나눠진 아픔들이 저를 행동하게 만든 용기가 되었”다고 쓴다. 왕유쉔의 병역거부 선언은 여성/남성으로 나뉘어진 정체성을 벗고 평화시민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이행과 해방의 과정이 드러나 있다. 또한 이 이행과 해방의 과정 속에는 포괄적인 관계의 매듭이 새겨져 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너를 알려면 나의 언어가 부서지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언어로 바꿔 말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내가 ‘우리’를 소환할 수 있는 길은 없”으며 이것이 바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이자 “또다시,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방식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45)

병역거부자 멸치는 세월호를 보면서 더 이상 음식을 삼키지 못한 날로부터 1년이 지난 뒤 제주 강정에 온다.46) 멸치는 “나에게 남은 이름은 무엇일까 생각”했고, “모든 일의 당사자가 되기로 했”으며 이를 통해 “세계시민의 책무성을 알았”다고 쓴다. 또한 “논의의 주체도 못되면서 폭력에 가담”했으며, 그 폭력에 가담하는 자리가 단지 군인만이 아니며 성소수자로, 비정규직노동자로, 신자유주의에 희생당하는 세대로, 시민화 교육의 장에서, “동원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폭력의 구조, 폭력의 정당성을 위해 동원되는 일상의 시스템을 확인해야”한다고 말하는 멸치의 말을 통해, 4.3은 5.18로, 강정으로, 4.16으로, 더 나아가 예멘으로 시리아로 세계 곳곳의 전쟁이 있는 곳으로 그 매듭을 확장해간다. 동시에 이것은 역사적인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제주 강정으로 그곳의 평화활동가들 속으로, 난민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 속으로 모두의 싸움으로 장소적 시간적 매듭을 심화시켜 간다.

병역거부자 최성희는 <왜 나는 ‘병역 거부 선언’을 하는가?>47)라는 선언문에서 “제국주의 시스템의 부속품으로서 시스템을 공고히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당사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자각에서 병역거부를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부속품이 그 거대한 설비에서 튕겨 튀어나오지 않는 한 그 설비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병역거부 선언은 바로 그 “튕겨 나온 부속품으로서의 선언”이라고 말한다.

연루되어 있음이란 단지 긍정적인 상태만은 아니다. ‘연루’라는 말은 ‘연대’라는 말과 달리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어서, 저 멀리 있는 타자의 고통에도 연루되지만, 구조화된 폭력이나 시스템에도 깊이 연루되어 있다. “튕겨나온 부속품으로서의 선언”이란 바로 이러한 폭력에 구조에 연루된 상태에 대한 거부이다. 이 거부를 통해서, 군사체험과 교육을 받는 어린이들과, 동북아와 중동에서 군사주의로 인해 죽어가는 어린이들과, 여러 생명들과 매듭을 만들면서 연결되어 간다. 세 명의 여성 병역거부 선언문은 그 안에 이처럼 다양한 관계의 매듭들을 담고 있으며 이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의 관계는 병역거부라는 “기존의 용어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48)

네그리와 하트는 Assembly에서 “오늘날 정당하게 말을 잡으려 하는 모든 정치적 주체성들은 이주자처럼 말하는(행동하는·살아가는·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49) 이질적 다중인 이주자들은 새로운 장소를 발명하고 특이성을 유지한 채 새로운 공통성을 구성하는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주자들은 장차 다가오는 공통체이며, 가난하지만 언어가 풍요롭고, 피곤에 짓눌리지만 신체적·언어적 사회적 협동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연대 불/가능성을 넘어서서 연결되는 매듭들은 바로 이러한 이행의 순간들을 새로운 공통장의 순간들의 표시이다. 난민인권센터의 난민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싸움 속의 매듭들은 불/가능한 연대의 차질, 응축된 반작용, 류민의 언어가 발명되는 시작점이 된다. 여성들의 병역거부는 평화운동이 난민인권운동과 소수자운동과 매듭을 형성해 가면서 각각의 활동이 보지 못하거나 쉽게 간과했던 지점들을 환하게 비추는 힘이 된다.

<5> 무명의 소수자성을 위하여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 보자. 소수자들 사이의 관계를 비교와 갈등으로 담론화하는 것에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소수자들이 처한 상태가 지닌 무수히 많은 섬세한 차이들을 드러내면서도, 불/가능한 연대에 대한 모색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결국 어떤 난민인가, 어떤 소수자인가 라는 ‘구체적 상태’에 대한 질문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너무나 인간화, 정상화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연루라는 말도 연대라는 말도 어디까지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되어 버린다. ‘우리’의 언어가 인간화된 문법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지닌 취약성이라는 기반은 인간만의 것은 아니며, 인간화된 조건 속에서 가장 착취당해 온 몸은 동물이다. 그렇다면 난민의 상태는 어떻게 난민화된 동물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 각각의 운동은 서로를 어떻게 비추고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을까?

기타다 나오토시(北田直俊)의 다큐 「보이지 않는 오염 – 이타테 마을의 동물들(みえない汚染 飯舘村の動物たち)」(2016년)은 원전에서 20km 이내의 강제피난지구인 후쿠시마 이타테 마을(飯舘村)에서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개 150~200마리, 고양이 400~800마리, 닭 50마리, 돼지 1마리를 돌보는 히라야마 간만(平山ガンマン)의 활동을 담은 것이다.

다큐에 나오는 가축, 애완동물 등은 재해 후 몇 년간 방사선량이 높아서 인간의 거주가 금지된 곳에 방치된다. 애완용으로 키워졌던 고양이나 개를 보호소에 보내려고 해도, 주인의 허가를 받을 수 없어 빈집에 묶여 있는 경우도 많다. 주인들은 일이주에 한번 올 뿐이지만, 그 동물들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개들은 목줄에 묶여 거동이 자유롭지 않고, 때로는 줄이 얽혀 죽기도 하고,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기도 하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거나 추위로 죽기도 한다. 방사능에 오염되어 더이상 식용 가치가 없게 된 소나 돼지들은 집단 살처분을 당하고 그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소나 돼지는 죽은 소나 돼지가 즐비한 축사에서 살아간다. 이 영화 속에서 정신이상이 되어 버린 개는 가끔 발작적으로 울부짖으며 자해에 가까운 행위를 하곤 했다. 후쿠시마로부터 도망의 권리를 주장할 때, 이 말이 동물에 대한 학대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발언과 닿아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을까?

난민 인권이라는 말도 ‘인권’이란 말이 표시하듯이 어디까지 인간에게 해당되는 용어로 여겨진다. 난민인권운동이 동물권 운동과 만날 매듭을 형성할 때, 그 매듭에는 또 어떠한 차질이, 응축된 반작용이 발생할지 고민하게 된다. 소수자 코뮌 사이의 마주침이 중요한 것은, 그 마주침의 순간 드러나는 응축된 반응들이 무명의 소수자성을 회복시켜 주기 때문일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말을 덧붙고 싶다. 류은숙은 <이야기에 기대어 말을 이어간다>50)라는 글은 소수자의 고통을 소재화하는 경우를 ‘소재주의’라고 비판하고, 피해자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부각시켜주길 요구하는 경우를 ‘관심독점주의’라고 비판한다. 이때 인권의 언어는 사유화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글을 포함하여 소수자 코뮌에 대한 현재적 아카이빙을 시도하는 모든 글은 이 윤리적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수자의 상태를 말할 때에는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전제된다는 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유화의 위험과 폭력을 넘어설 수 있는 것도, 활동가, 연구자, 당사자, 또 무명의 무수한 매듭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나 자신의 부족한 활동과 관계성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런 부족함이 또 다른 매듭을 만들고 나아가는 동력이 되길 바라게 된다.

1) 초고 형태의 글이며, 여러 활동들과의 연결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으니, 인용을 삼가 주세요.-필자

2) 난민인권센터 홈페이지

3) 자크 랑시에르, <찾을 수 없는 포퓰리즘>,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2016년, 173쪽

4) 자크 랑시에르, 위의 책, 181쪽

5) 자크 랑시에르, 위의 책, 177~179쪽

6) 미류, 「지금 여기,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 ?차별금지법 궤도에 올리다?, 2018. 발표 자료집, 6쪽

7) 미류, 「평등에 거듭 도전해야 한다면」, 『인권운동』, 2018년 12월, 124쪽

8)김현미, <난민포비아와 한국 정치적 정동의 시간성>, <<황해문화>>, 새얼문화재단, 2018년 12월, 211쪽

9) 김현미, 위의 글, 쪽

10) 미류, 「지금 여기,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 6쪽 재인용 (천광욜 <문재인 정부를 흔든 ‘공정의 역습’> <<시사인>> 제 546호, 2018년 3월

11) 졸저, <<마이너리티 코뮌>>, 2016년, ~ 쪽

12) 나영정, <정체성 정치, 교차성 정치, 인권의 정치-이름없는 권리와 책임감을 공유하는 운동을 향해 >, <<인권운동>>, 2018년 12월, 66쪽

13)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대담, 주해연 번역,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산책자, 2008년, 14쪽

14) https://www.opendemocracy.net/en/can-europe-make-it/in-war/

15) 미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무엇을 포괄하는가>, <<신인종주의와 난민-서로의 낙인을 짊어지는 연대는 가능한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사업단 <난민X현장>팀 주최 사회인문학포럼 티치인, 2019년 4월 23일

16) <<안녕, 한국!>>, 난민인권센터, 2018년(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안녕/쪽’으로 표시함)

17) 고은지, <난민과 임신 중지 권리에 관한 메모: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부쳐>, <<난민인권센터>>홈페이지, 2019년 5월 7일 https://nancen.org/1932

18) 나영정, <심사라는 구조적 차별>, <<신인종주의와 난민>>, 2018년 4월 23일 티치인 자료집에서.

19) 주디스 버틀러,윤조원 번역,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년 41쪽

20) 위의 책, 41쪽.

21) 崔一秀, 「동남아의 民族文學」『現實의 文學-崔一秀 評論集』, 螢雪出版社, 1976年. (초출은 「東南亞文學의 特殊性-文學一般의 紹介와 批評을 兼하여」,『詩와 批評』第一輯, 1956年2月, 58~69쪽. 원문에는 동남아 여러 문학에 대한 개괄이 적혀 있지만, 평론집에는 그 부분을 생략하고 서론과 결론 부분을 중심으로 문제의식을 명확히 했다. 이후 이 글에서의 인용은 (동남아/쪽)으로 표시.

22)崔一秀, 「現代文學의 根本特質」『現實의 文學-崔一秀 評論集』, 螢雪出版社, 1976年, 133쪽. 초출은 「現代文學의 根本特質(上, 下)-定義를 세우기 爲한 論爭을 展開하면서」『現代文學』, 1956년12월, 1957년1월).

23) 崔一秀, 「民族文學과 世界文學」『現實의 文學-崔一秀 評論集』, 螢雪出版社, 1976年, 90쪽. (초출은「문학의 세계성과 민족성1~4」『현대문학』, 1957년12월, 1958년 1,2,4월).

24) 崔一秀, 「現代文學과 民族意識」 『現實의 文學-崔一秀 評論集』, 螢雪出版社, 1976年, 10쪽 (초출은 「現代文學과 民族意識」, 『朝鮮日報』, 1955년1월1일 문학평론 당선작).

25) 崔一秀, 「民族文學과 世界文學」『現實의 文學-崔一秀 評論集』, 螢雪出版社, 1976年, 118쪽

26) 한수영,「최일수 연구-1950 년대 비평과 새로운 민족문학론의 구상」,『민족문학사연구』, 1997년, 167쪽 /이나영, 「1950년대 최일수 민족문학론 연구」『문학과 언어』vol.25, 2003, 384쪽.

27) 한수영, 위의 논문, 160~161쪽

28) 사드리 키아리, <<인민과 제3의 인민>,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2016년, 149~ 150쪽

29) 사드리 키아리, 163쪽, 169쪽

30) 모리사키 카즈에(森崎和江), 「민중이 지닌 이질적인 집단과의 접촉 사상 - 오키나와 ‧일본‧조선의 만남 (民衆における異集団との接触の思想 -沖縄・日本・朝鮮の出逢い)」, 『이족의 원세포(異族の原基)』大和書房、1971. (초출은『沖縄の思想』, 木耳社, 1970년 11월.)

31) 호소미 가즈유키 지음, 동선희 옮김, <<디아스포라를 사는 시인 김시종>>, 어문학사, 2013년, 54~57쪽

32) 洪允杓, <유민의 기억에 대해서 – 시집 <지평서>의 독후감(流民の記憶についてー詩集『地平線』の読後感より>, <<진달래(ヂンダレ)>> 15호, 1956년 5월

33) 김시종, <나의 작품의 장과 ‘유민의 기억’(私の作品の場と「流民の記憶」), <<진달래(ヂンダレ)>> 16호, 1956년 8월

34) 주디스 버틀러,윤조원 번역,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년, 9쪽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위태로운/쪽으로 표시.

35) <<안녕, 한국!>> 에세이집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오늘의 문예비평>>에 <목소리의 자리 – 선언, 기록, 고발, 요청, 상상>라는 제목으로 게재예정. - 필자.

36) http://www.withoutwar.org/?p=15309

37) https://nancen.org/1927?category=118718

38) 주디스 버틀러 저, 서용순 임옥희 주형일 옮김, <우리, 인민- 집회의 자유에 관한 생각들>,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2016년, 74~74쪽, 82쪽

39) 위의 책, 93쪽

40) https://nancen.org/1919?category=118718

41) https://nancen.org/1902?category=118718

42) https://nancen.org/1905?category=118718

43) 최근 나와 친구들은 <난민&현장> 모임을 만들어 연구자와 활동가가 함께 논의하는 장을 만들어 보려고 하고 있다.

44) http://www.withoutwar.org/?p=15305

45)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윤조원 번역,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년, 85~86쪽

46) http://www.withoutwar.org/?p=15302

47) http://www.withoutwar.org/?p=15299

48) A. Negri, M. Hardt, Assembly, Oxford Univ Press, 2017, 9장의 부록 혹은 에세이 부분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https://minamjah.tistory.com/213 [百手의 블로그]번역인용

49) A. Negri, M. Hardt, Assembly, Oxford Univ Press, 2017, 9장의 부록 혹은 에세이 부분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https://minamjah.tistory.com/213 [百手의 블로그]

50) 류은숙, <이야기에 기대어 말을 이어간다 – 인권운동을 묻다>, <<인권운동>> 창간호, 2018년12월,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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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예술과 공통장』 권범철 저자와의 인터뷰
자율평론 | 2024.02.05 | 추천 0 | 조회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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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그라디바를 통한 동아시아의 ‘여성’ 정체성 모색ㅣ백주진
자율평론 | 2024.01.28 | 추천 0 | 조회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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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하바로프스크블루스ㅣ김명환
자율평론 | 2024.01.23 | 추천 0 | 조회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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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초월과 자기-초월』 김동규 역자와의 인터뷰
자율평론 | 2024.01.06 | 추천 0 | 조회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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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살아있는 체계이자 인지 과정으로서, 개별적인 인간의 자율성을 논증하는 혁명적 생물학 연구ㅣ정경직
자율평론 | 2024.01.05 | 추천 0 | 조회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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