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제3부 (정리1)과 (정리2)

작성자
nykino
작성일
2019-07-11 01:34
조회
329
《에티카》
[3부] 정리1 – 정리20
작성자: 김민수

※3부 (정리1)에 나오는 부분 (1) (황태연 역, 161면)
“‘신 안에서 타당한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사람의 정신은 (2부 정리11의 계에 의해) 타당한 원인이 아니고 부분적인 원인일 뿐이다. 따라서 (정리2에 의해) 정신은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는다.”

(이 부분 다시 써 보기) 인간인 우리의 정신은 ‘부분적인 원인’으로서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가지기 때문에 필영적으로 작용을 받는다. 곧 인간의 정신은 ‘수동적’이다. 그리고 계의 결론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더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더 ‘수동적’이라는 의미로 확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3부 (정리1)에 나오는 부분 (2) (황태연 역, 161면)
“다음으로, 신이 어떤 사람의 정신만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함께 다른 것들의 정신들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신 안에서 타당한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사람의 정신은 (제2부 정리11 계에 의해) 타당한 원인이 아니고 부분적 원인일 뿐이다. 따라서 (정의2에 의해) 정신은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는다.”

(이 부분 다시 써 보기) 신 안에 어떤 사람의 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의 정신들도 가지고 있다면, ‘신 안에서 타당한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모든 대상에 대해, 그 사람의 정신은 부분적 원인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더 많이 보유할수록 수동적이다.

(질문) 그럼 인용부의 밑줄 표시한 부분 “그 사람의 정신과 함께 다른 것들의 정신들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신 안에서 타당하지 않은 ‘관념’으로서 ‘자유의지’를 상정할 수 있을까?


※3부 (정리1)의 결론
▶ 여기서는 무엇보다 관념의 수동성과 능동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하다.
→ ‘타당한 관념’은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능동성을 띤다.
→ ‘타당하지 않은 관념’은 필연적으로 작용을 받으며 수동성을 띤다.




※3부 (정리2) (황태연 역, 161-162)
▶ “신체가 정신을 사유로 결정할 수는 없으며, 정신도 신체를 운동이나 정지로 또는 (만일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 결정할 수 없다.”

▶ (정리2)의 영문 표현
“The body cannot determine the mind to thinking, and the mind cannot determine the body to motion, to rest, or to anything else (if there is anything else)”

(이 부분 다시 써 보기) 여기서 영문번역자는 thinking을 ‘사유’표현했다. 일단 ‘생각하기’로 접근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determine’을 ‘~을 하기로 결정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해보면, (정리2)를 다음과 같이 다시 써 볼만 하겠다.
: ‘신체는 정신이 생각하도록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정신은 신체가 움직이고 멈추게 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을 하도록 결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신체’나 ‘정신’은 각각 단독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대신 정의3에 의하면, 신체에 변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감정’이다.

【참고】
에티카 제3부의 요청에는(황태연 역, 160면) ‘표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표상’의 개념이 제2부에 나오므로 부분 인용해보았다.

▶제2부 정신의 본성 및 기원에 대하여 (123면) 정리17의 주석(‘표상’의 개념, ‘표상’의 정의에 대해)
“예를 들어 베드로의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베드로의 관념과, 다른 사람, 예컨대 바울 안에 있는 베드로의 관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베드로의 신체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며, 베드로가 존재하는 동안 이외에는 존재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베드로의 본성보다는 바울의 신체의 상태를 더 많이 나타내며 (정리16의 계2참조), 따라서 바울의 신체의 상태가 지속하는 동안, 바울의 정신은, 베드로가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베드로를 자신에게 있어 현존하는 것으로서 고찰할 것이다.”

“인간 신체의 변용은 비록 사물의 형태를 재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심상’(images of things)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이런 식으로 물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정신이 (사물을) 표상한다(it imagines)고 말할 것이다.”

(이 부분 다시 써 보기) 영문 번역본에서 image를 황태연 버전에서는 ‘심상’ 혹은 ‘표상’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image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적 혹은 회화적 영상’의 개념과는 분명 다르다고 구분해야할 것 같다. ‘인간 신체의 변용은 비록 사물의 형태를 재현하지는 않지만’이라는 표현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