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3부 정리21~39)

작성자
eiron90
작성일
2019-07-18 17:39
조회
553
3부 정리39 주석

“그러므로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따라서 탐욕스러운 자는 부의 축적을 가장 좋은 것으로 판단하며, 가난을 가장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야심적인 사람은 무엇보다도 대중의 갈채를 바라며, 그 무엇보다도 치욕을 두려워한다. 질투하는 자에게는 타인의 불행만큼 유쾌한 것이 없고, 타인의 행복만큼 불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어떤 것이 선인지 아니면 악인지, 유용한지 아니면 유용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다.”(195)

“그런데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라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바라도록 하는 감정은 소심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소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미래의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게 하는 한에 있어서의 두려움일 뿐이다.”(195)
=> 이 내용을 위의 ‘질투하는 자’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미래의 악이 너무 커서, 즉 ‘타인의 불행’을 바람으로써 생긴 결과가 너무 끔찍해서(끔찍할 것으로 예상되어) 오히려 나를 더 큰 슬픔에 빠지게 하기(할 것이기) 때문에, 아예 현재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덜 슬프게 하며 그러므로 그것이 더 작은 악이 된다. 요컨대 ‘더 작은 악’으로 ‘미래의 [더 큰] 악’을 방지/억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원하지 않는 것을 바라도록 하는 감정’(소심)은 ‘두려움’이다.
=> 그렇다면, 인간이 타인의 불행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도덕적(?)이거나 선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코나투스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리주의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가령 사회악을 제거하는 경우,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선이 된다는 점에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얼핏 모순으로 보이지만 코나투스의 관점으로 보면 일관성이 견지되고 있다.
=> 반론: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미래의 더 큰 악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혹은 않고) 눈 앞의 작은 악을 실현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정리39에 따르면 이것은 코나투스를 거스르는 것인데, 이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질문: 선악이 자신의 감정에 의해 판단된다면 선악의 기준은 자의적인 것인가?
선악을 자신에게 유용한지의 여부로 판단하는 것은 실용주의적 관점인가?

“그러나 만일 그가 두려워하는 악이 치욕이라면, 그 경우의 소심은 수치라고 불린다.”(195)
=> ‘야심적인 사람’의 경우, ‘대중의 갈채’를 바라는 만큼 ‘치욕’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가 대중의 갈채를 추구하다 보면(인정욕구?) 미래의 어느 순간에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대중으로부터 갈채는커녕 실망과 비난이 쏟아질 것이고 이것은 그에게 ‘치욕’이라는 악을 가져다 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원하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되는데(소심), 이유는 그가 겸손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겪게 될) ‘수치(심)’ 때문이다.
=> 그렇다면 야심적인 사람일수록 매우 소극적이고 최소한의 것만 하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이것 역시도 그의 코나투스에 충실한 결과일 테지만.

“자신이 의도한 해악을 증오하는 사람에게 가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해악[악]을 가하는 것을 단념하려고 할 것이다(정리28에 의해). 더욱이 이 노력은 (정리37에 의해) 해악을 가하도록 그를 인도한 노력에 비해 보다 클 것이다. 그러므로 더 큰 이 노력은, 우리가 말한 것처럼, 우위를 점할 것이다.”(정리39 증명)
=> 해악을 가하는 것을 단념하려는 노력이 왜 해악을 가하려는 노력보다 크다고 했는지, 논리적 관계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