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쪽 번역...... 아아....

작성자
rakuta
작성일
2019-07-20 17:00
조회
291
Willing Slaves of Capital 중 1~11쪽

Chapter one : Making Others Do Something

무엇인가를 하려는 욕망(The desire to do something)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를 “각 개체(each thing)”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의 존재 속에서 인내하려고 애쓰는 노력이라고 명명했다. 이 말은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노력이 요구되고, 처음으로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존재 가운데 인내(perseverance)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는지(designate, 또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구체적인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행하도록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관찰할 수 있게 자신을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아이디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필요한 요소들을 제공하여, 사람들이 그것의 완전한 영역을 파악하게 해 주고 모든 곳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각 개체each thing . . . . 왜냐하면 conatus는 존재의 힘(Force of existence)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신체 안에 거하고 신체가 작동하게 하는 근본적인 에너지이다. Conatus는 몸의 운동원리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말하자면 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려면 존재론적인 코멘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에 맞게 적당히 좋은 대답, 반정도 분명하고 반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답---그리고 주제가 인간의 일(human affairs)일 것이기 때문에--- conatus의 에너지는 단순히 그냥 삶이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가깝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욕망(desire)의 에너지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욕망의 존재(being of desire)이다. 실존한다는 것(to exist (is))은 욕망한다(to desire)는 것이고 그러므로 욕망의 대상(object of desire)을 추구하는데 행동적(to be active)이다. 실로 존재 가운데 인내를 위한 노력의 효력(effectuation)으로서의 욕망, 그리고 신체활동으로 셋팅하는 것(the setting in motion of the desire) 이 둘 사이의 관계가 conatus 라는 바로 그 용어로 종합적으로 표현된다. 라틴어 동사 ‘condor’는 “to begin(시작하다)”라는 통상적인 의미로 “착수하다(undertake [entreprendre])”를 의미한다. “impetus(추동력)” 처럼 르네상스 물리학에서 비슷하게 차용한 conatus는 어떤 것something의 조건을 정지(rest)에서 운동(motion)으로변 화시키는 힘(thrust), 즉 신체를 흔들어(shake up) 어떤 목적(object)을 추구하는 과정 속으로 신체를 옮겨 놓는 기초적인 에너지(fundamental energy)를 의미한다. 각 사회의 역사는 그 사회 안에서 가능한 작업의 착수(undertakings [enterprises] )와,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사회가 합법적이라고(legitimate) 간주하는 욕망의 대상을 생성하고 그것들에 대한 범위를 제약하는 것이다. 자유기업(free enterprise ?)은, 착수하는 자유freedom to undertake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말하자면, conatus의 의미에서, --- 결론적으로 욕망하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자유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한 사회가 명기해야 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제약들 밖에서, 자유기업free enterprises들이 일종의 선험적인 명백성a priori obviousness을 누리는 이유가 된다. 유형 재화 (material goods)생산의 적법성legitimacy에 주목하면서, 기업가적인 한탄(entrepreneurial lament)---이번에 특정적으로 자본주의자적인 의미의 표현을 사용해서---은 “자유기업free enterprise”에 가하는 제약들에 도전하기 위해서 계속하여 이 근원적인 논리에 의존한다: “나는 (노동)분업을 따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막는다(I have a desire that conforms to the division of labor and I am prevented from pursuing it).” 기업의 자유에 대한 이런 비난 받을 만한 호소로, 기업인은 그/그녀의 conatus의 추진력(thrust)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각 존재(each being)가 지닌 존재론적으로 욕망하고 활동적인 기질이라는 맥락과 앞에서 이야기한 제약 안에서 이러한 자유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The desire to make others do something: Bossing and enlistment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하는 욕망: 상사노릇하기와 협조(가담, 복무?)

선험적으로 자명하지 않은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데 다른 사람의 힘power[puissaces 불어로 힘]을 모집할(recruit) 자유이다. 그러나 매우 자주, 인간 욕망과 노동 분업 의 깊이가 결합된 효과는 재화 생산 material production을 향한 욕망이 집단적collectively으로 추구되어져야 하고, 그러므로 엄격한 어원학적인 의미로는 협동적collaboratively,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용관계가 생겨난다: 고용 관계는 어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업enterprise을 실현시키는데 관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조적 사실structural facts (이중 분리의 사실들 those of the double separation)과 법적인 명문화(체계화/성문화)의 총합totality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협조(enlisting [enrolement])의 관계이고, 그것의 에센스는 어떤 한 사람의 사업적 욕망을 추구하는데 다른 사람의 행동하는 힘이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업enterprise은—일반적인 그리고 특히 생산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업 모두에서---일 인칭으로in the first person 생겨나거나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업가의 감탄(exclamation)은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다”라고 본질적으로 환원(축소)될 수 있다. 그렇군, 대단해! 그것을 해라! 그러나 할 수 있다면---너의 혼자 힘으로 해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문제는 완전히 바뀐다.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한다는 타당성이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하길 원하도록 확장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업이 협동 작업collaborations을 필요로 하는 수준까지 사업을 야심 차게 발전시키는 것은 이 협동 작업이 취해야 하는 형태forms의 문제에 대한 완전히 독립적인 대답을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이슈가 되는 문제는 집단적인 생산과정의 조직 속에 개인들이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그들의 공통된 행위의 산물을 전유appropriation하는 문제다.; 다른 말로 그것은 처음 욕망하기 시작한 주체(master-desire subject)에 의한 획득capture의 문제이다.

획득capture의 관점에서 보면, 협조(enlistment)가 더 일반적인 카테고리이고 고용employment이 그 일반적인 범주의 특수한 사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포괄하는 개념containing concept에 포괄된 개념contained concept을 따라 포괄하는 개념을 명명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master-desires가 그들의 사업(enterprise)에 협조한 사람(enlistee)이 행하는 힘을 이용하는 관계를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지칭하기 위해서 상사노릇하기(bossing)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정복에서, 군대 사령관; 십자군 운동에서 십자군 운동가; 주권권력 sovereign power [puissance]에서, 군주sovereign (주권 권력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다중에 속한다.); 산업적 성취가 가져다 주는 이익과 꿈에서, 자본주의 사업 소유자business-owner.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bossing은 획득하기capturing의 관계이고, 오늘날 그것에 주된 의미를 부여하는 자본주의 착취 영역 밖의 많은 영역에서 이 capturing 관계의 예가 발견된다. 활동가들의 활동 결과가 주는 중요한 몫을 전유하는 NGO디렉터들(NGO directors); 후배들의 중요한 몫을 전유하는 대학 고위층(mandarin); 조수의 그것을 전유하는 예술가들---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 사업체 밖에 있고 금전적 이익과 관계가 없는 일들을 추구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그 누구 못지 않은 boss들이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boss의 특정한 굴절inflection이며, master-desire의 일에 협조한 하급자(subordinates)의 코나투스(conatus)를 획득한 자들(capturer)이다.

Interest, Desire, Setting in Motion 이익/관심, 욕망, 작업 착수

획득capture은 획득자capturer를 위해 몸을 작동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동원(mobilising)은 그것을 구성하는 집착(preoccupation)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래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욕망을 위해서 자신의 열심을 다 해야 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우리가 상하관계(bossing relation)에서 살아가는 결과로 나타나는 관습의 힘만이, 그렇게도 큰 규모로 남의 노동을 대신하여 “자신을 작동시키는 setting oneself in motion” 행위를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그 엄청난 양의 사회 노동 social labor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enlistment relation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추상적인 어떤 수준에서 생각할 때, 그 관계가 가지고 있는 굴절들inflections의 구조와 내용의 특이성specificity 중 그 어떤 것도 간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자 boss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방법method”이 있고, 그것은 십자군운동의 보스나 대학의 보스가 갖고 있는 방법과 같지 않다. 그리고 자본주의자의 방법은 무엇보다 먼저 돈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잘 알려진 사소한 일이 아닐까?

의심할 바 없이 사소하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따분하고 상투적인 경험banality of experience은 그것의 깊이를 줄이는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자본주의적 bossing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particularity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의 bossing이 무엇으로 “길게 유지하는지run on”를 보여주는 일에 가장 적합하다.: 그것은 이익interest 에 의지하고 유지된다---말하자면, 묙망에. 여기서 스피노자의 말을 다시 풀어 말한다: 이해(관계) 또는 욕망 (interesse sive appetitus) 그러나 혹자는 이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것의 결과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이 욕망하기라면 이것을 인정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해관계로interested 생각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사심없이 선물을 주는 사람의 능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질문한다: “진정한 우정의 따뜻함과 고결한 감정에서 무엇이 남는가?” 전부이자 전무이다. 만일 우리가 순수한 이타주의 이념, 자아self 가 어떤 이익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the self maintains no stake 자아에서 나온 행동movement에 고집스럽게 집착한다면 아무것도 없다. “이해관계interest”를 공리주의적인 계산utilitarian calculation에만 한정하는 “이해관계”에 관련된 환원적 이해 reductive understanding를 거부한다면, 전부 다 이다. 이해관계는 만족의 성취이다; 그것은 욕망의 대상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고, 똑같이 무한하게 다양하다. 우리들이 우리의 욕망에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것 we are interested in our diesire (우리가 우리 욕망에 관심을 가진다)을 부정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면,단순한 경제적 욕망 범위 밖에 있는 모든 욕망의 대상에 이해관계라는 지위/상태status of interest을 어떻게 거부할 까? 마치 손익의 균형을 계산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의 선물을 주고 바라는 고마움을 향한 기대에서, 주고 받는 사랑에 대한 기대, 기부나 관대함을 보이는 행위에서, 위대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이익이나 자선의 행위가 주는 명성으로 행하는 현금 기부에서, 그러나 자명한 계산 형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단순히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데 이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까? 그러나 또 다른 욕망, 어떤 특별한 강한 욕망, 황홀함을 느끼려는 욕망으로 우리는 사심이 없다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 the defender of disinterest들이 투쟁하려고 시작하였던 바로 그 공리주의적 환원주의utilitarian reduction의 희생자가 된 것처럼, 이해관계의 존재를 부정하도록 강요 받는다는 것도 사실이기도 한다. 냉정한 계산의 파고를 막겠다는 흥분시키는 과업을 스스로 맡고서, 경제적 이론과 공리주의적 철학이 이런 식으로 그 용어(interest) 를 사용한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공격대상enemy에게 이해관계interest라는 단어를 한정해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어사용 평가에 두 가지 대가를 치른다: 환원을 재가하기와, 그런 태도로 그리고 다른 타당한 이유없이, 그렇게도 광범위한 가능성의 폭을 좁히는 두 가지 대가. 그러나, 어떤 길을 택하던, ---모든 가능한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다른 것을 통과하는 길을 포함해서---욕망으로서 존재 being as desire를 인내하고 유지하는 노력(persevering)은 일인칭 이외의 것으로 추구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추구하는 사람들은pursuers 그 욕망이 주고자 하는, 돕고자 하는, 관심을 보이는, 그리고 걱정을 해주는 욕망이건, 필연적으로 이해관계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스스로 천명한self-declared 경제적 이해와 역사가 자의식을 가지고 금전적 단위로 계산하는 형태로 자신을 인지하듯이 as it self-consciously recognizes itself in the form of accounting in monetary units 역사적으로 구성된 이해관계 표현에서부터, 다양한 수준의 자각self-awareness이 존재하는 책략에 내포된 모든 형태의 이해관계를 포함해서via, 가장 최소의 경제적 형태, 사실상 도덕적이고, 상징적이고, 또는 심리적인 것 같은 가장 비경제적인 이해관계까지 모두 망라하는 이해관계의 완전한 총체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욕망의 보편성(generality of desire)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는 단순한 경제적 이해reading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많은 것을 이끌어 낸다. 이 말은 이 관계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통일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설명account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을 요구할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이해관계의 뿌리에 있는 욕망하는 힘. 모든 노역(servitude)의 뿌리에 있는 이해관계-욕망인 코나투스(conatus).

Bare Life and Money 벌거벗은 삶과 돈

자본주의가 이용하는 모든 욕망들 가운데, 자본주의는 돈으로----아니 오히려 재생산이 필요한 삶이나 근근이 살아가는 삶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노동 분업(division of labor)을 가진 분권화된 경제decentralized economy에서, 물적 재생산material reproduction은 돈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매개mediation는 순순한 자본주의적 창조물이 아니다: 분업 노동division of labor과, 자본주의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 심화될 때 그 자본주의와 같이 동반하는 금융상품교환(Monetary market exchange)은 수세기에 걸쳐 발달해왔다. 오랜 기간을 두고 진화하고 쌓여 온 시장(layering of markets)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적인 개인이나 (소규모의) 집단 생산의 마지막 통로를 봉쇄해서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물질적 타율성을 올려 놓음으로써만 진정한 모습을 지닐 수 있었다. 노동의 시장 분업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 중에도 맑스와 폴라니는 일반 대중the commons을 인클로저(enclosure)를 통해서 프롤레탈리아화하는 조건(conditions of proletarianization)이 어떻게 대두되었는지를 풍부하게 밝히고 있다. 가장 완전하고 조직적인 궁핍화 행위의 뒤를 따라서, 유일한 선택지로써 자신들의 노동력을 구분없이 파는 행위만 사람들에게 남겨진다.
그러한 사소하고 분명한 사실들을 반복하는 것은 지겨운 일이지만 그래도 “노동력 강화 labor enrichment,” “참여적 경영 participative engagement,” “피고용자 권력강화 employee empowerment” 와 기타 “자아 실현self-realization”에 근거한 기존의 픽션이 고용 관계 employment relation와 관련된 그 본래의 진실에 대한 기억을 성공적으로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의존적 관계이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물질적 재생산의 조건들을 보유하는 행위자(agent)간의 관계이고, 이 관계는 그것 위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의 영원한 배경이고 부동의 기초이다. 그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면, 고용관계는 돈의 매개(mediation)가 물질적 재생산을 위한 기본적인 욕망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만 하는 의무적 통관, 또는 유일한 통관(배타적인 통관)이 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피고용인들이 계속해서 발견하듯이, 자본주의적 고용관계는 자신들의 배경을 풍요하게 하고 노동장소에서 더 정제된 이해관계/이익interest를 끌어내기 위해서---진급, 친목socializing/교제, “성취fulfillment” 같은 이익---자본주의 고용관계가 성공적으로 무대위로 올려 놓은 모든 인센티브/장려책들이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지고, 물질적 의존material dependence이라는 무너지지 않는 기초와 새로이 만들어진 근근이 살아가는 삶에 감도는 위협이라는 잔인한 배경만을 남긴다.
돈이라는 매체는 의무적 통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돈의 공급자에 의지하는 것이 시초부터 물질 재생산의 책략 가운데 그리고 그것의 가장 기초적인 사실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 돈의 공급자는 오직 두 가지 이다: 고용주와 금융업자. 피고용인에게는 공급자는 고용주이고; 공급자는 후에 은행원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미미하게 그리고 기존에 존재한 보수가 보장하는 상환능력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후에 그렇게 될 것이다. 한계에 도달하면, 물질적 타율성material heteronomy이 ---다시 설명하면, 노동력으로써 스스로를 재생산reproduction하는데 필수적인 것들necessities을 독자적으로 공급할 수 없는 무능력과 그래서 노동의 분업 시장에 참여해야 하는 필요성---돈에 대한 접근을 반듯이 하게 만들고 돈을 욕망의 주요한 대상으로 만든다. 즉 모든 다른 것(욕망) 또는 거의 모든 다른 것(욕망)의 조건이 되는 욕망, 그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스피노자는 경제에 대해서 언급한 많지 않은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돈은 “모든 것들 하나로 요약해서 이룬 총체 a digest of everything”가 되었고 “그것이 그것의 이미지가 어떤 다른 것보다도 더 다중multitude의 마음을 일반적으로 사로 잡는 이유가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기쁨의) 원인으로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유형의 즐거움(joy)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스피노자는 이런 날카로운 관찰을 하면서 자신을 공동 운명에서 절대로 제외시키지 않았다. 철학을 하기 전에 그는 렌즈를 다듬어야 하였다. 가장 경제적으로 부흥하였을 때, 네덜란드 연합주의 시민으로서 그는 욕망과 집단적 영향collective affects의 순서로 노동 분업이 더 심화되는 것과, 물질 재생산material reproduction 시장에 바탕을 둔 조직organization이 가져다 주는 돌연변이/변형(mutations)을 인식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 물질적 책략(material strategies)이 주는 거의 배타적인 매체로써, “모든 것의 총체/요약 digest of everything” 로써 돈은 메타 욕망meta-desire의 대상이 되었다. --- 메타 욕망은 모든 다른 (시장)욕망들이 꼭 통과해야 하는 의무적인 관문이다.

Currency-relation, Money-relation 통화-관계, 화폐-관계

그런데, 지금 통화currency와 화폐money라는 두 용어에 대한 개념적인 구분을 해야 할 때이다. 이 두 용어는 지금 직관적으로 서로 섞여서 사용될 수 있으며interchangeable, 이 두 용어를 구별하는 것이 지닌 유용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왜 하나의 대상/물건thing에 대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가? 이런 어휘적 차이를 적절히 조사한 사람들 중에, Pepita Ould-Ahmed가 변별력이 있는 학문적 전유의 결과(the effect of distinctive disciplinary appropriations)를 ----인류학 (그리고 사회학)에서는 화폐money, 경제학에서는 통화currency---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엇이 근본적으로 단 하나의 같은 대상으로 유지하게 되는지와 관련하여서, 단순한 관점 상의 변형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분석을 확대하여 통화currency는 어떤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의 이름이고, 화폐는 이러한 관계를 낳게 하는 욕망의 이름이라고 명명하고, 이 관점상의 변형(variation in perspective)를 관념적으로 수정할 수 있다.

Michael Alietta 와 Andre Orlean은 통화currency를 이해하는데 본질적인/내재한 가치(substantial /intrinsic value)의 접근(연구)와 기능적인 접근(연구)를 거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들은 오히려 통화currency를 기관institutions에 보호를 받는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로 보고, 자본의 사회적 관계만큼 복잡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통화는 그것 자체가 가치가 아니고 가치를 작동시키는 것operator이다. 우선 통화는 기본적으로 지불 수단means of repayment으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효능/효과efficacy에 전체적인/집단적인collective 믿음belief의 효과effect인데,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역시 동등하게 그리고 상호간에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화폐 상의/금전적인 상징/표시/사인(monetary sign)을 받아들이는 것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내재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완전히 자의적arbitrary 것인, 이 사인/상징/표시를 공동으로 인정하는 (생산)행위production는 아주 훌륭한 화폐상의 문제이다. 우리가 통화가 본질적인 특징substantial character을 가지고 있지 않고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interpersonal 라는 것---다시 말하면, 사회전체의 규모로 볼 때 그것은 사회적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금속적인 페티시즘metallic fetishism이 주는 환상으로 오랜 기간 봉쇄되었던 통화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탁적인 본질(essentially fiduciary nature)을 밝혀야만 한다. 화폐 기관monetary institution은 공동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 of shared recognition 와 어떤 표시sign에 부착된 상태로, 보편적으로 인정된 지불 수단으로 확립된 신용trust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통화는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재)생산되거나 또는 파괴된다. 그것이 양자간의 상호 작용dyadic interaction으로 환원할 수 있기는커녕, 화폐가 통치권sovereign power으로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가 표현하는 집단적 권력collective power이 작용하는 사회 전체 수준에서 통화가 사회적 관계로써 수단이라면, 화폐는 주체subjects의 관점에서 파악한 통화이고, 말하자면, 욕망의 대상으로써 통화이다---(화폐는) 이것digest of everything이 지닌 “동기cause로써 동반하는 개념이 없다면 어떠한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의 총체/요약(digest of everything)”이다. 화폐는 욕망의 형태로, 화폐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주관적인 표현이다. 이 사회적 관계는 화폐 표시monetary sign에 대해 커먼common의 승인을 낳고 그렇게 해서 그것(화폐)을---개인의 관점으로---욕망의 대상 또는 상위 욕망meta-desire의 대상으로 바꾼다. 그 이유는 이 특별한 대상물(화폐)이 모든 (물질적) 욕망 대상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대체로 동일한 가치general equivalent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관계와 그것의 제도적 틀은, 그러므로 상품commodity에 의해서 구축된 욕망의 경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구심력(attractor)을 생산하는 원인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통화와 화폐 각각의 분석적 영역 analytical registers 사이의 차이와 그것들이 가지는 상보적 본질을 분명히 본다: 하나는 전체적인 믿음-신용collective belief-trust을 생산하는 기구상의 그리고 사회적인 메커니즘institutional and social mechanism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의 욕망을 신비화(mystification)하는 것이다. 분명 필요한 것은 다른 관점으로 또 다른 한 관점을 실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객관주의objectivism과 주관주의subjectivism 사이의 잘못된 자가당착적인 생각 false antinomy에 반대한 부르디외를 따라서, 화폐의 대상을 충분히 조사하기 위해서 오히려 이 두 가지(화폐와 통화)를 모두 사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객관주의)는 오로지 구조에만 관심이 있어, 행위자agents를 단순한 수동적인 전달자(bearers)로 무시하고, 반면에 후자subjectivism는 어떤 것도 개인의 살아온 경험lived experience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직/구조를 무시한다: 개인의 정신(individual psyche)을, 다시 말하자면, 주체subject자체 내부에 있는 조직/구조structure의 존재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러나 기질disposition 욕망desire, 믿음beliefs 그리고 감정affects의 형태로, 구조들에 관한 표현expression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 두 가지 (객관주의objectivism과 주관주의subjectivism) 모두 똑같이 갖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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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이 열립니다.
ludante | 2019.12.06 | 추천 0 | 조회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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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치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1.30 | 추천 0 | 조회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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