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4부 정리23~46

작성자
eiron90
작성일
2019-08-15 17:20
조회
726
<에티카> 4부 정리23~46

4부 정리23
“인간이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가짐으로써 어떤 것을 행하도록 결정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가 덕에 의하여 행동한다고 절대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인식하는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결정되는 한에 있어서만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 어떤 행동의 원인이 내재적이지 않을 때, 즉 ‘나’가 유일한 원인이 아니고 외부원인(이 포함한 원인)에 휘둘려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수동), 그것은 덕에 의한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덕이란 인간이 자기의 본성을 유일한 원인으로 삼아 행동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4부 정의8) 그러나 인식하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할 때는(->능동) 덕에 의하여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식하는 한에 있어서만 작용하기”(4부 정리24의 증명) 때문이다. 여기서 왜 ‘인식’이 등장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인식하는 것”의 의미는 문맥상으로는 ‘타당한 관념 혹은 참된 인식을 갖는 것’이라는 뜻일 테지만. 일단 해석을 해보자면, 이때 인식은 감정을 동반한 인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과 악의 인식은, 우리에게 의식된 한에 있어서의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일 뿐이다.”(4부 정리8) 즉 인식은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을 의식하고 그것을 증대시키거나 억제하려는 코나투스의 실현 노력 전반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물론 여기에는 이성의 지도(다스림)이 개재한다. “우리가 이성에 근거하여 노력하는 것[선]은 모두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4부 정리26)
뒤로 가니 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정리들이 본격적으로 나온다. 가령 “욕망은 정신의 본질 자체인데, 정신의 본질은 인식에 있고, 이 인식은 신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정리37의 증명)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신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제시하기 위해 ‘인식’을 등장시켰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4부 정리30
=> 모든 사물(존재)들의 본성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악이 될 수 없다(3부 정리4에 의함). 따라서 인간들 사이에 공히 내재해 있는 공통점은 좋은 성격을 가지므로,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것은 선한 방향을 띨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인류가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는 필연적으로(4부 정리31 참조) 선한 가치이다.


4부 정리34의 주석
=> 바울-베드로 예를 읽으니 ‘본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헛갈림. 수동의 감정에 휘둘리는 두 경우를 제시하면서, 바울과 베드로가 각각 슬픔과 기쁨으로 자극받아 변화되기 때문에 본성이 다르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본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김. 정리29부터 ‘본성’이 언급되는데, 이때는 본성을 ‘인간 내면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신의 속성’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 정리37의 주석 1(265)에서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했을 때, 이때의 본성은 바울과 베드로의 본성이 다르다고 할 때의 그 본성과 같은 개념인가?


4부 정리37의 주석1
“각자의 권리는 각자의 덕 또는 능력에 의해 한정되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이 인간에 대해 가지는 권리보다 훨씬 큰 권리를 동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다.”(265)
=> 의외의 주장이다. 스피노자의 관심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있는 것 같다. 모든 양태가 신의 본성의 변용이라면 동물도 신의 본성을 자신의 양태대로 담지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인간보다 낮게 평가한다는 점은 현대적 시각에서 많이 낯설다.


4부 정리37의 주석2
=> “정의와 불의, 죄와 공적은 정신의 본성을 설명하는 속성이 아니고”(267) 제도와 법률에 의해 강제된 ‘일반적 동의’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의 정리30에 나온 ‘공통점’과는 다른 개념이며,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기제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이런 ‘일반적 동의’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인간을 ‘자연상태’에서 구원해 주는 최소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피노자의 궁극적 주장(이성의 지도를 통해 능동적으로 본성을 실현)을 보았을 때, 그에게 ‘일반적 동의’는 필요악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혹은 양가감정.



질문>
1. 참된 인식은 단지 인식으로 머물지 말고 정서화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2. 정리39의 증명. 운동과 정지의 비율 문제. 병에 걸려서 변하는 것 말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것은 ‘비율’이 달라지는 경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