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팅 에티카(4부47~73)

작성자
diatime23
작성일
2019-08-22 14:28
조회
726
정리47의 증명에서 "희망은 공포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모든 감정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누군가 어느 순간 평화를 느꼈다면, 이 전까지 그는 두려움과 공포에 차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타인으로 하여금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다면 그는 이전에 타인을 믿고 존중했을 것이다. 에티카는 감정의 원인을 추적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하거나 일면적이지 않다. 배후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

정리68의 증명에서 "이성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사람을 자유로우며, 이 사람은 타당한 관념만을 가지므로 어떠한 악의 개념도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사람은 선의 개념도 갖지 않는다. 여기에서 창세기 선악과 이야기가 인용된다. 신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 선악과 열매를 먹고나서 인간이 앎의 세계, 개념의 세계,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선과 악, 생과 사의 굴레를 쓰게 된다. 자유로운 인간은 존재 가능한가? 자유로운 것은 오직 신만의 영역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오직 언어를 가진다는 점이라는 명제를 기반으로 할 때 인간은 언제나 반대 개념에 의해서만 일정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늘 선악이 존재하고 태어났으니 반드시 죽게 된다.

여기에서 정리47의 증명을 보면, "가능한 한 운명을 지배하고 우리의 행동을 이성의 확실한 권고에 따라 관리하도록 더욱더 노력하게 된다."는 말에서 운명을 지배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티카는 기본적으로 본성에 따라 살 것을 피력했다고 보는데, 그것을 운명에 대한 순응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운명에 순응한다는 것은 삶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가 아닌 엄청난 용기를 전제로 가능하다. 태어난 깜냥대로 살지 못해서 인간은 고통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운명에 순응한다는 것은 곧 운명을 지배함과 다름없다고 보인다.

정리67 자유인은 다른 그 어떤 것에 대해서보다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관조가 아니라 삶에 대한 관조이다. 여기서 '관'에 대한 불교적 해석을 끌고오면,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본다는 것인데, 정리 73의 주석에서 말하길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온갖 것과 부도덕하고, 혐오스럽고, 부정하고, 비열하게 보이는 온갖 것은 자신이 사물 자체를 혼란스럽고, 단편적이고, 어지러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생긴다는 것을 유념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마음이 정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인간의 근원적 불안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온다고 볼 때 자유인은 지구상에 얼마나 존재할 수 있는가. 역으로 죽음에 대한 철저한 관조만이 삶을 의미있게 살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