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1.03.02] 소진되지 않는 삶의 무기들을 발명하기 / 김효영 수유너머 104 회원

보도
작성자
갈무리
작성일
2021-03-02 19:43
조회
252


[프레시안 2021.03.02] 소진되지 않는 삶의 무기들을 발명하기 / 김효영 수유너머 104 회원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0212172664489


소, 닭, 풀이 있다면, 이들을 어떻게 분류할까? 소는 닭과 묶이면 본질적 범주를 지시하지만, 풀과 묶이면 관계적 범주를 드러낸다. 스피노자도 유사한 사유를 제안한다. 그가 보기에 경주용 말과 경작용 말의 차이는 소보다 크다. 느릿한 리듬으로 성실히 밭을 가는 말은 소가 되지만, 속도라는 벡터를 갖고 도시를 질주하는 말은 자동차가 된다. 그처럼 스피노자에게는 한 개체가 갖는 본질보다 그 본질의 이행이 중시된다. 운동과 정지, 느림과 빠름의 각 관계 속에서 우리의 행동능력은 어떻게 증대되고 감소할까? 정동받고 정동되는 능력은? 그로써 우리는 어떻게 해체되고 또 다른 신체가 되어갈까? 이것이 스피노자가 전념한 ‘윤리학’이었고, 들뢰즈가 ‘행동학’이라 재조명했던 ‘실천학’이었다.

‘들뢰즈 실천철학의 행동학’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 <개념무기들> 역시 이러한 맥락을 잇는 또 하나 윤리학의 시도이다. 한편으로 이는 스스로 형이상학자를 자처하며 존재론에 전념했기에 ‘그에게는 정치학이 없다’고 혹자가 비판했던 들뢰즈의 사상 전체에서 ‘행동학’으로서의 정치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기획을 가시화하려는 작업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그러한 들뢰즈의 정치학을 어떻게 현재의 시점에 불러내어 새로운 이행을 만들까하는 ‘실천학’적 모색이다. 그를 위해 저자는 들뢰즈의 사상으로부터 개념무기들을 충분히 날카롭도록 벼려낸다. 결과를 창출하면 소진되어버리는 도구와 달리 자기운동적이기에 소진되는 일이 없는 그런 무기들을 우리는 들뢰즈의 사상으로부터 얻게 될까?

저자가 무기들을 벼리기 위해 택하는 숫돌은 마르크스주의다. 그러나 이 숫돌은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로 호명되면서 대중의 착용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미 만들어진 기성복처럼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창안되어야 하는 개념이자 충분한 “민감성”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새롭게 조형되길 요청받는다. 이는 책머리에 저자가 밝히듯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시각으로 옮겨갔던 개인적 사상의 이행과정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는 저자의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발견되는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수고>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사이 노동 개념의 변화를 관통한다. 나아가 이는 그에 기반해 전개되는 들뢰즈/니콜라스 쏘번과 네그리가 각기 제안하는 정치적 해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기에 저자는 한편으로 쏘번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들뢰즈간 매개를 확보하며 들뢰즈가 사유한 ‘마르크스의 위대함’을 찾는데 집중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 구분되는 ‘생산’ 쪽으로 나아갔던 들뢰즈와 달리 ‘산 노동’에서 자율개념을 찾는 네그리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처럼 네그리의 ‘산 노동’을 주목하는 일 역시 들뢰즈의 개념무기를 벼리는 과정이다. 네그리는 ‘산 노동의 내재적 연합’의 가능성 없이, 개인들이 자본이라는 초월적 추상기계의 부품으로 포섭되고 편입될 사태를 경계한다. 그렇기에 비록 ‘노동거부’가 기존 자본 관계의 변형을 요구하는 특이한 운동일지라도, 노동 그 자체를 통해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힘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무기가 된다. 이는 자본주의기계에서 탈영토화하는 방식으로 소수자의 정치학을 제안하는 들뢰즈의 사유에 “일종의 내재적 코뮤니즘”을 하나의 분기축으로 더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산 노동’의 연합으로서의 전통적 코뮤니즘을 거부하기보다 새로이 갱신하는데 몰두하는 편이 우리를 더욱 전략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안내이다.

나아가 저자는 들뢰즈가 잠재성과 구분하길 요청했던 ‘가능성’ 개념을 재조명해, 들뢰즈에게 가능성에 대한 다른 개념이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알려져있듯 들뢰즈의 존재론을 비롯한 그의 사유 전반을 관통하는 것은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두 국면이다. 들뢰즈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던져지고(분화와 극화, 밖주름 운동) 다시 현실성에서 잠재성으로 떨어지는(미분화, 안주름 운동) 주사위 놀이, 영원회귀의 운동”을 전 저작에서 변형·반복한다. 그렇기에 들뢰즈에게 현실성만큼이나 실재성을 갖는 잠재성의 독립적 영역을 규명하는 일은 중요했다. 반면 네그리는 그러한 두 국면 사이의 원환적 운동보다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의 이행운동을 중시한다. 그러한 관심에서 네그리는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이행이 경유하는 “가능성의 장”을 탐구한다. 그곳이 바로 앞선 “내재적 코뮤니즘”의 하나의 양상으로서의 산 노동의 행위할 힘이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다중 속에 있는 (존재하고, 사랑하고, 변형하고, 창조하는) 행위할 힘”이 규명되고, 그 해방적 역량을 드러낸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의 장이 들뢰즈의 도래할 민중 개념에도 이미 예견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물론 들뢰즈의 민중 개념은 그를 전경화하지 않는다. 때문에 저자는 그러한 민중 개념이 자리한 잠재성의 영역에 다중 개념이 지시하는 가능성의 장이라는 이행축을 부가함으로써 그 모호함을 해소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들뢰즈가 잠재성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현실성을 잠재성에 종속시켰다는 비판, 잠재성이라는 비물질적인 부분에 부당한 특권을 부여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의 무기 세공은 들뢰즈의 실천학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정치하게 견고화하는 작업이 된다.

이처럼 저자는 노동 바깥에서 파열선과 탈주선을 그렸던 들뢰즈의 실천학에 노동 안에서의 내재적 연합을 이루는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접속시킴으로써 그 무기를 보다 단단하고 유능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가 손에 쥐게 될 무기가 애초에 누구로부터 연원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원본의 형상에 종속되지 않는 괴물 같은 무기를 얻었다면, 그리고 그 무기가 쉬지 않고 자기를 변형시킬 수 있는 자율동력장치를 몸에 달고 있다면 성공이다. 우리는 이제 소진되지 않는 삶의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갈 수 있다. 포탄 냄새가 나지 않는 아곤의 전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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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무기들』 | 조정환 지음 | 갈무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