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호] 신자유주의 서바이벌 가이드ㅣ권두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1-03-03 11:37
조회
754
 

신자유주의 서바이벌 가이드


권두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신자유주의적 존재론으로서 ‘기생(寄生)’이라는 익숙한 파격을 제시함으로써 전지구적 공명을 이끌었다. 이 공명과 함께 <기생충>은 2019년 칸과 2020년 아카데미를 차례로 석권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영화’의 아카이브에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동시대 스크린을 통해 본 것은 <기생충>이 아니라 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한국인의 환호작약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비로소 ‘당당히’ 기생하게 된 속물주체성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성공신화를 완성함으로써 ‘기생충적’ 패러디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생충>을 통해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거장’의 반열에 오른 봉준호의 시작은 단편 옴니버스 영화 <지리멸렬>(1994)이었다. “일상이 마구 흩뜨려지고 찢기고 헝클어져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무질서하여 제멋대로인 상태, 어떤 형태의 일말의 규칙성이나 리듬을 찾을 수 없는 혼돈의 상태”를 의미하는 ‘지리멸렬(支離滅裂)’은 김형식의 『좀비학 : 인간 이후의 존재론과 신자유주의 너머의 정치학』(갈무리, 2020)에서 신자유주의적 삶의 비루함 또는 완강함을 표현하는 숙어로 등장한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파국’으로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능동적으로 ‘파쇄’해나갈 것인지, 우리에게는 ‘결단’이 필요하다. 김형식은 그 결단에 필요한 용기 또는 ‘긍정성’을, 어쩌면 이것과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해 있다고 여겨지는 ‘좀비’로부터 발견해내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김형식이 주목하는 ‘좀비서사’는 통사적 흐름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우화로 귀결된다. 이 우화의 주역인 좀비는 ‘예속’과 ‘해방’의 양가성을 지닌 채 서사체 안팎에 폭넓게 존재하며, 그 존재론에 대한 해석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좀비라는 존재의 ‘어떠한’ 측면에 주목할 것인가. 이 질문은 서는(보는) 자리, 즉 ‘시좌(視座)’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시좌의 전환과 함께 비로소 출발하는 ‘위치의 정치’는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는 대사와 함께 웹툰 <미생>을 통해, 또한 ‘보는 지점(관점 : point of view)’이 달라지면 동일한 대상의 다른 면을 보게 되지만, ‘보는 자리(시좌 : position of view)’가 달라지면 풍경 자체가 달라진다는 설명과 함께 장애 문제를 다른 자리에서 보기를 제안하는 김도현(『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을 통해서도 개진된 바 있다. 김도현이 주목한 장애인을 비롯하여, 노숙자와 그 밖의 수많은 신자유주의적 ‘타자’들의 형상을 김형식은 좀비라는 대중문화적 형상에 오버랩시킨다. 그리고 바로 좀비의 시좌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곤경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며 ‘인간 이후의 존재론’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형식의 『좀비학』은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 곤경’ 또는 ‘포스트휴먼 조건’에 대한 사유와 공명하게 된다.

브라이도티적 포스트휴먼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한 ‘포스트좀비’라는 김형식의 표현은 좀비서사의 역사적 변천이 이끌어낸 새로운 주체성을 가리킨다. 좀비라는 형상, 이 형상화에 수반되는 힘-관계들의 지도를 그야말로 종횡무진하는 김형식의 글쓰기에도 일정한 규칙은 있다. 그 첫 번째 규칙은 “그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물으며, 좀비(서사)의 ‘기원’과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이 탐색은 영화 <화이트 좀비>(1932)에서 제시되는 “영원한 노예가 되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부두교좀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시체들의 새벽>(1978) 등에서 제시되는 “본능만이 남아 제 몸이 부서져 가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달려드는 시체좀비”, <28 일 후>와 <레지던트 이블>(2002)에서 제시되는 “빠르게 뛰기 시작했으며 바이러스의 형태로 감염됨으로써 파괴력과 전염력의 측면에서 한층 강화된 밀레니엄좀비”를 거쳐, 마침내 <웜 바디스>(2013)에서 제시되는 ‘포스트좀비’에 이른다. ‘후-좀비’이자 ‘탈-좀비’에 해당하는 이들은 “이전 시대의 좀비가 내포했던 노예성, 괴물성, 파괴성 등의 부정적 특성을 극복하려 하며, 주체로서의 좀비, 인간으로서의 좀비, 생성으로서의 좀비”로 드러난다.

비체에서 객체로, 객체에서 다시 한 번 주체로 ‘변신’하는 좀비를 가리키는 “인간으로서의 좀비”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김형식의 ‘좀비학’은 “그것은 그것이 아닌 것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 질문에 ‘인간’과 ‘좀비’를 대입시킨다. 여기서 저자가 취하는 방법론적 전략은 인간과 좀비의 ‘대비’와 ‘분별’이 아니라 ‘상호구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전략에 따라 좀비는 인간 또는 휴머니즘의 잔여 또는 잉여에서 소여로 탈바꿈한다. 이는 김형식의 ‘좀비학’이 인간과 좀비를 비롯하여, 일상과 혁명, 파괴와 생성 등을 두루, 또 ‘함께’ 고려하는 ‘앙상블’의 철학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앙상블은 이미 분할된 개체들의 존재론이라기보다 개체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 또는 현상―레비 브라이언트(『존재의 지도』, 갈무리, 2020)에 따르자면 어떤 ‘회집체(assemblage)’―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양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앙상블은 존재자의 ‘역능(potentia)’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권력(potestas)’의 규율로부터의 탈주선이 시작되는 거점으로 다시 한 번 자리매김된다.

김형식의 『좀비학』이야말로 네그리와 하트, 바디우와 들뢰즈, 버틀러와 브라이도티를 두루 경유하고, 비판적 정치경제학, 윤리학, 존재론, 기술철학, 페미니즘이 앙상블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작동시키는 회집체적 벡터도라 할 수 있다. 좀비서사를 매개하는 『좀비학』을 통해, 『좀비학』이 매개하는 현대 철학을 통해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팬데믹’의 ‘병원균’에 대한 ‘항체’를 마련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형식의 『좀비학』은 ‘신자유주의 서바이벌 가이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낸다. 『좀비학』이 제안하는 서바이벌은 타자―장애인, 노숙자, 그리고 ‘좀비’―를 방치 또는 제거하고 혼자만 살아남는 생존 게임을 전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좀비학적 생존이란, “가장 이질적인 존재와 가상이 아닌 ‘실제로’ 만나고 신체적으로 ‘함께-있음’을 경험하며, 궁극적으로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키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타자와의 공생을 통한, 공생적-되기에 해당한다.

‘기생’보다 더욱 파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과 좀비의 ‘공생’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비학』에서 그 관계가 시종일관 호혜적으로만 그려지고 있지는 않다. 단적으로 말해, 『좀비학』이 묘사하는 ‘인간적 좀비’는 긍정적이지만, ‘좀비적 인간’은 부정적이다. 인간과 좀비는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탄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엄 하먼(『비유물론』, 갈무리, 2020)이 비판적으로 지적한 공생의 ‘비대칭적’이고 ‘비호혜적’인 관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하먼은 이 관계를 다름 아닌 ‘비유’의 형식으로부터 발견했다. 『좀비학』은 종종 ‘좀비 수사학’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으며, 이 수사학의 전략적 장치로서 메타포와 알레고리가 빈번하게 활용되는데, 이는 우화적 접근의 필연일 것이다. 하지만 비유의 인식론적 한계를 꼬집어 ‘좀비학’의 모험적-유목적 사유를 문제 삼는 일은 저자가 비판하는 ‘냉소’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비유의 인식론으로서 ‘비교’와 ‘유추’는 관계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형식의 『좀비학』은 비교와 유추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비교되고 유추되는 대상과 비교하고 유추하는 주체가 놓여있는 동일한 지평 또는 맥락을 거듭 환기한다. 그 지평 또는 맥락의 역사적 변동에 따라, 좀비는 병리적 또는 기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 생성적 또는 저항적으로도 읽힌다. 양극단으로 찢겨진 좀비 아포리아에 대해 냉소할 것인가, 아니면 논쟁할 것인가. 비유가 아닌 실재의 ‘팬데믹’과 함께, 존재와 인식을 재구성해야 할 ‘결단’의 시간은 이미 도래했다. 이 결단을 위한 사유의 단초들을 『좀비학』은 충분히 다채롭게 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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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1년 3월 2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s://bit.ly/3bahaH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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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정치 실험』(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주형일 옮김, 갈무리, 2018)


오늘날 어떤 ‘정치 실험’을 상상하고 감행하는 것이 필요할까?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임시직, 계약직, 일용직, 기간제, 비정규직, 파트타임, 불안정노동 등 노동의 형태가 셀 수 없이 많은 유형으로 다양화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용 기간과 고용 부재 기간이 뒤얽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고용이 부재한 기간에도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고 교육, 실습, 무보수 협동작업, 지식 유통 같은 노동 활동을 해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프랑스 엥떼르미땅들의 사회적 투쟁은 새로운 정치를 고안하고자 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과 시사점을 제공한다.


기호와 기계』(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이성혁 옮김, 갈무리, 2017)


이 책에서 랏자라또는 현대 사상의 급진적 정치성을 되살리면서 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권력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들뢰즈/가타리와 푸코 등의 급진적인 현대사상을 바탕으로 바흐친과 빠졸리니, 라이프니츠와 타르드와 같은 이들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구제’하며 현실화한다. 가능성의 발명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고 있는 『사건의 정치』는, 현대의 저항 정치가 가지고 있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적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사건의 정치』(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이성혁 옮김, 갈무리, 2017)


이 책에서 랏자라또는 현대 사상의 급진적 정치성을 되살리면서 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권력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들뢰즈/가타리와 푸코 등의 급진적인 현대사상을 바탕으로 바흐친과 빠졸리니, 라이프니츠와 타르드와 같은 이들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구제’하며 현실화한다. 가능성의 발명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고 있는 『사건의 정치』는, 현대의 저항 정치가 가지고 있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적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선언』(안또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12)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시위 첫 날인 2011년 9월 17일의 1주년을 기념하며 출간되는 이 책은 2011년의 봉기들의 정치철학적 의미와 그 반란들의 세계사적 위치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또 이 책은 월스트리트 봉기가 사그라진 이후 등장한 여러 갈래의 냉소주의적 접근법들과 전혀 상반되는 접근법을 보여준다. 2008년 촛불 이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광장들에서 텐트가 사라지자 유럽과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그 많던 텐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자들에 의하면, 봉기는 지속될 수 없지만, 매번 다르게, 계속해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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