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1.04.10] 디스토피아로 구현된 유토피아의 이상,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성상민 문화평론가

보도
작성자
갈무리
작성일
2021-04-11 18:00
조회
138


[프레시안 2021.04.10] 디스토피아로 구현된 유토피아의 이상,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성상민 문화평론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0610365170661


흔히 19세기를 '진보에 대한 낙관'이 넘실거리던 시대라고 말하곤 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 같은 모험 소설이나 <해저 2만리>, <지구 속 여행>과 같은 초기 SF 소설을 집필했던 프랑스 작가 쥘 베른(Jules Verne)의 시선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이전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기술의 발전으로 해결되고 끝없이 발전하리라고 생각했던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정서가 넘쳐흐르던 시기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19세기만이 그러한 낙관주의가 존재하던 시기였는가? 작가의 의도에 상관없이, 이제는 '감시'에 대한 기술적‧구조적 접근을 드러내는 초기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18세기 말에 제기한 판옵티콘(Panopticon)은 본디 최소한의 비용을 통해 최대의 감시 효과를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관리 모델'로서 제시된 구상이었다. 어떠한 의미로 판옵티콘은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구축하기 위해 관리된 하나의 도상같은 셈이었다.

그리고 이는 21세기에 일상의 일부를 넘어, 이제는 신체의 일부로서 자리잡은 디지털-인터넷 기술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국 정부가 인민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배포한 각종 홍보 자료, 언론들에서 무수하게 생산-전송하던 이상적인 디지털 사회의 상, 이외에도 온갖 창작물이나 광고와 같은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21세기에 찾아올 '아름다운' 인터넷 사회의 모습…. 물론 2021년을 살아가는 이들은 20세기에 앞다투어 제시되었던 이 유토피아의 모습이 실제로는 어떤 양상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 속에서, 감히 쉽게 잊거나 축적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기 쉽지 않았던 정보의 축적체들은 '빅 데이터'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유토피아를 살고 있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유토피아의 구현은 유토피아를 상상했던 당시에는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동시에 오히려 이 유토피아의 상이 실제 현실에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발생 자체가 쉽지 않았을 문제도 등장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의 모습은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상상했던 이들의 구상과도 가까워 보이는 면이 있다. 먼 미래의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기후 위기는 이미 일상의 일부가 된지 오래다.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는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에 충격을 받은 각국 정부는 부랴부랴 플라스틱 및 내연기관 사용 규제나 대체 에너지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0년대 이후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장을 넘어 매체나 일상 생활에서도 점차 흔하게 보이는 모습은 이러한 위기 의식을 드러내는 단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분명 과거의 인류가 꿈꾸었던 꿈들은 모두 이뤄졌다. 인류는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우주에도 갈 수 있게 되었고, 기후와 인력에 상관없이 무수한 물자를 생산할 수 있으며, 정보는 어디에 있던 간에 접근할 수 있고 연결하지 못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들로 인해 발생하는 엔트로피(entropy)는 눈 앞에서만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쉽게 간과했다. 과거에 꿈꾼 유토피아의 실현은 도리어 더 많은 숙제들을 만들었다.

미술평론가 안진국이 최근 펴낸 저작 <불타는 유토피아>는 이러한 역설을 탐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제목에서부터 기이한 감각을 자아내는 '불타는 유토피아'라는 이 명명은 프롤로그를 통해서 기술 진보에 관한 이중적인 생각을 상징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신의 전유물이었던 불을 인간에게 전했다. 이는 인간이 기술과 함께 진보한다는 믿음에서 기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복수하고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인간 세계에 '판도라'라는 존재와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하나의 상자를 내려보낸다. 그리고 모두가 잘 아는 숙어 '판도라의 상자'처럼, 판도라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어버리는 바람에 온갖 재앙과 부정들이 인간 세계로 번져 나갔다. 황급히 상자를 닫았을 때는, '희망'만 남았을 뿐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에서 판도라의 상자로 이어지는 그리스 신화의 구성은 당대 그리스인들이 인류의 진보가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드러낸 하나의 통찰과도 같았다.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불타는 유토피아'라는 제목을 붙인다. 기술에 대한 믿음으로 세워진 유토피아는 '불타고' 있는 것인가, '불태워지고' 있는 것인가? 어찌 되었든 21세기의 기술 유토피아가 활활 타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그 결과물이 유토피아의 존속인지, 파멸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러한 역설의 서두에서 시작하는 <불타는 유토피아>는 총 4개의 챕터를 통하여 21세기 기술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키워드를 짚고, 다시 그 키워드들을 횡단하는 예술의 시도와 현재의 상황에 접근한다. 키워드들은 앞서 언급했던 '디지털'이나 '빅데이터', '인류세'를 비롯해 깊게 본질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면서 존재는 알고 있는 존재의 것이지만, 저자는 때로 창작 그 자체의 과정이나 '저작권'과 같이 기술적인 것과는 살짝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을 삽입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요소들이 결코 '기술 유토피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섬세하게 짚어내며 키워드 간의 연결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저자는 1부의 서두에서 공장에서 생산된 튜브형 물감의 등장, 근대 사진술과 영화라는 '복제 매체'의 등장이 예술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미친 충격을 짚고, 해당 충격이 '저작권'을 거쳐 현대 소셜미디어를 지탱하는 '감춰진 노동'으로 이어짐을 짚는다. 이런 전개의 흐름은 우리가 당연하며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진보'가 사실은 마냥 당연한 것도, 결코 완벽하게 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는 지점으로 이어지고, 독자가 기술을 바라봄에 있어 필요한 통찰을 얻는다.

이외에도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다다르기까지 다양하게 수집한 데이터들에서 하나의 맥락을 발견하며 흥미롭게 이어내는 저술의 리듬을 놓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키워드를 횡단하는 예술의 시도'라는 말에 뭔가 진입 장벽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예술의 시도'는 그저 형식적인 미디어아트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대로 대중문화의 창작물들이 이제는 반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존재가 된 플랫폼에 대한 접근이 되기도 하고, 우연한 계기로 미국을 넘어 이제는 한국에도 알려진,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극단으로 치달아 작가 스스로 캐릭터의 운명을 끝내버린 '페페개구리'(Pepe the Frog)와 같은 사례처럼 일상 생활에 어느덧 녹아든 표상에 대한 고민이 되기도 한다. 쉽게 예측할 수 없고, 도리어 모든 것이 예측되었다고 생각한 무렵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기묘한 화학 작용을 드러내는 기술의 발전 경로처럼, 저자 역시 최대한 다양한 현상에 대한 접근을 통해 교잡하며 성장해온 유토피아에 대한 반응과 대응의 양상을 그리는 것이다.

2020년 초, 인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급격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 국면은 갑자기 이전까지 없었던 흐름의 등장이라기 보다는, 마치 20세기 초의 세계 대공황이나 2008년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이 이전부터 서서히 축적되던 갈등과 에너지가 특정한 계기를 맞아 단숨에 폭발하는 것에 가깝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에 대한 시선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때로 이 같은 관심은 한국에서 감염자 추적이나 코로나 감염 확대를 위해서 잔뜩 쏟아져 나온 정책에 대한 반응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일부는 이러한 조치가 낳은 사생활 침해를 걱정했지만, 다수는 한국의 감염 상황이 북미나 유럽 등지보다는 낫다는 것을 이유로 수직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소리 높여 강조했다. 1990년대부터 조금씩 싹터온 한국의 정보 운동이 2000년대를 맞이하며 불합리한 국가 검열 폐지와 함께 주민등록번호 제도, 지문 날인 의무화와 같은 감시 체계의 철폐를 주장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기술에 대한 믿음이 다시 기술이 낳을 부작용을 애써 가리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렇게 위기는 다시 또 다른 기술 유토피아의 믿음을 만들고 있다. 자신들을 보호하고, 다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소환하는 감시와 기술의 체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에 반대하거나, 결코 체제 내에 쉽게 속할 수 없는 경계의 존재를 더더욱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마치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온갖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시위자들을 대거 체포, 구속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도, 염세적인 거부도 아니다. 대신 이들은 기술을 다시 인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대안’의 시도를 만들어 나간다. 정부가 인터넷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감시에 나서면, 다시 이를 우회하거나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이나 플랫폼을 만드는 식으로 대응한다. 인민의 언로를 틀어막으면, 새로운 언로의 창구를 찾아내고 더욱 멀리 전파하려 나선다. 마치 <불타는 유토피아>의 부제기도 한 "'테크네의 귀환' 이후 사회와 현대 미술"이라는 말처럼, 한동안 잊혀진 개념이었던 '테크네'(techne)는 유토피아가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것과 함께 다시 인민 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불타는 유토피아>는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과 제시를 통해 어떻게 테크네가 돌아오고 있는지를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의 움직임을 고민하고,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불타는 유토피아>는 생각의 물꼬를 뚫어낼 하나의 움직임과도 같은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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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유토피아』 | 안진국 지음 | 갈무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