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비평 웹진 쪽 2021.10.15]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서평 / 손보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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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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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비평 웹진 쪽 2021.10.15]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서평 / 손보미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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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지털

최근 포스트휴먼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며 관련 논의들도 활발해졌다. 그중에서도 이 책,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에서 눈에 띄는 점은 ‘디지털’이라는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이 무엇일까? 단어 자체가 낯설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해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에 비해 정작 그 의미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

책을 펼치기에 앞서 디지털이라는 말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찾아봐야 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간단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디지털이란 기술의 하나이며 정보의 형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디지털 정보는 0과1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디지털 정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0과1로 구성된다는 설명만으론 감이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정보의 특징을 설명하는 글을 보며 조금씩 감을 잡아 볼 수 있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디지털 정보는 완벽한 복제가 가능하다.
② 디지털 정보는 빠른 검색이 가능하다.
③ 디지털 정보는 편집과 조작이 쉽다.
④ 디지털 정보는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된다.

문득 이 특징들에 ‘포스트휴먼’이라는 단어를 붙여보고 싶어졌다.

①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완벽한 복제가 가능하다.
②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빠른 검색이 가능하다.
③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편집과 조작이 쉽다.
④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된다.

그럴듯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문장들이 만들어진다.

2. 디지털 포스트휴먼

책의 서문은 ‘디지털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이유로 시작한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은 “디지털 기술에 의한 인간과 비인간의 혼종적 결합의 상황을 진단(5)”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인상적인 도입이다. 짧은 문장 속에 우리는 이미 혼종적이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과 비인간의 혼종적 결합이라는 주제가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이때 흔히 기계팔이나 기계심장 등을 이식받은 기계인간의 모습이 일례로 제시되곤 한다. 물론 이러한 기계인간의 출현도 중요한 현상 중 하나이고 또 무엇보다 쉽게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지만, 되려 그 쉽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생겨나는 한계도 분명한 것 같다. 보철을 이식받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을 그리는 순간 혼종성은 그것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간에 여러 인간 중에서도 특별한 이들만이 겪고 있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비인간의 보편적 혼종성은 아직은 아니지만, 곧 다가올 미래의 일로 느껴지게 되고, 그 효과를 가늠할 수 없어 생겨난 불안 속에 막연한 희망 혹은 절망만 부추기는 이야기들이 금방 들어차게 된다.

이에 반해 디지털 기술에 초점을 맞춘 책의 서문을 따라가다 보면 기계와 인간의 혼종적 결합은 디지털이라는 용어가 익숙한 것만큼이나 이미 오래되고 광범위한, 매우 보편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포스트휴먼과 관련된 문제들은 불안한 미래를 예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진행될 데로 진행되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긴급하게 제기된 것임을 더 잘 실감할 수 있다.

책 서문의 저자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디지털 매체의 등장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때부터 기계는 인간들을 매개하는 단순한 도구이기를 넘어서 인간의 일부가 되었고, 인간도 단순한 사용자를 넘어 완전히 새로운 존재 양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디지털 기기가 그럴까?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디지털 매체의 사용은 감각의 매개를 필수적으로 요구할 뿐 아니라, 기존의 수용된 감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을 작동하게 하며, 감각의 수용과 작용의 영역을 변화(6)”시키기 때문이다. 감각이 변했다는 것은 곧 몸이 변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몸의 변화는 개별적, 집단적 삶의 양식 변화를 요구한다. 이 책의 마지막 주제가 “디지털 감각의 변화와 포스트휴먼 윤리”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3. 디지털 쓰레기

새로운 몸들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당연히 그 몸들은 위험에 처하고 존립마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휴먼을 이야기하며 현재의 기술을 비평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단호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의 3부 <디지털 감각의 변화와 포스트휴먼 윤리>에 실린 저자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기술 이후 등장한 포스트휴먼은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몸의 활동들이 시시각각 디지털로 전환되어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고 또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재생되며 수많은 몸과 다시 연결된다. 따라서 우리가 인터넷이라 부르는 일종의 가상공간도 몸이라는 물질성에서 탈각된 공간이 아니다. 되려 수많은 몸과 욕동이 들끓고 흘러넘치는 공간이다. 문제는 이 몸들, 몸들의 얽힘이 현재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가이다.

책의 3부에 수록된 글, 「디지털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 플랫폼, 개인, 그리고 디지털 쓰레기」는 팬대믹 이후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급증한 독성 디지털 쓰레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독성 디지털 쓰레기는 여러 혐오표현을 총칭하는 말인데 “주로 성적이거나 포르노그라피적인 콘텐츠, 아동 및 성인에 대한 성적, 육체적 학대, 동물 학대나 고문, 전쟁이나 분쟁과 관련한 폭력적 콘텐츠, 충격을 주거나 호색적 관심에 호소하는 음란한 콘텐츠 혹은 불쾌한 콘텐츠 등이 이에 포함된다.(242)” 저자는 이러한 “디지털 쓰레기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글로벌 네트워크, 타자화와 폭력의 인류 역사, 기술적 장치의 배치 등 다양한 인간-비인간 행위자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고 있다(243)”고 말한다.

디지털 쓰레기는 그 어떤 쓰레기보다 강한 독성을 내뿜으며 생명을 죽인다. 게다가 이 쓰레기는 ① 완벽하게 복제되고 ② 빠르게 검색되고 ③ 쉽게 편집, 조작되며 ④ 네트워크로 전송되어 수많은 몸과 연결되면서 어떤 몸은 죽게 하고 또 어떤 몸은 죽이게 한다. 저자는 이러한 디지털 쓰레기를 분석하며 기술의 편향성 문제를 지적한다. 인터넷 플랫폼 기업의 경영 주체들은 기술의 중립성을 근거로 들며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만, 사실상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그 어떤 기술도 결코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에 유리하게 운용 관리되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알고리즘은 기존의 사회적 편견을 그대로 재생산하며 한층 강화하고 또 더 많은 이윤 축적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획기적인 상품 생산의 도구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4. 디지털 원유

“검색 엔진의 데이터는 내연 기관이 발명되기 전에 발견된 석유같은 거야. 아무도 쓸 줄 모르는 천연자원 같은 거지.” _ 영화 「엑스 마키나」, 네이선 베이트먼의 대사 중에.

네이선 베이트먼은 소프트웨어 회사인 블루북의 CEO다. 네이선은 디지털 데이터를 정확히 석유로 지칭한다. “~ 같은 거야.”라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실제로 데이터를 원료로 삼아 구동되는 내연기관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내연기관이란 연료를 연소시켜 에너지를 얻는 기관이다. 그리고 이렇게 에너지를 얻는 과정 중에 이산화탄소라는 부산물이 만들어지는데 이 부산물은 현재 지구에서 산소를 호흡하며 살아가도록 진화된 많은 생명체에게 매우 유독한 물질일 뿐 아니라 현재 지구의 평균 온도를 상승시켜 전체 생태계를 위협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검색 엔진의 데이터는 석유처럼 쓰인다는 네이선의 표현은 옳다. 하지만 디지털 원유를 잘 쓸 수 있는 내연 기관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는 말은 틀렸다. 이미 독성 디지털 쓰레기라는 부산물을 세계 곳곳에 배출하며 활발하게 작동하는 내연기관들이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디지털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 플랫폼, 개인, 그리고 디지털 쓰레기」에 흥미로운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이지은의 연구는 구글에서 한국어로 ‘길거리’를 검색한 결과가 한국의 길거리에서 여성의 몸매, 외모를 관음증적으로 불법촬영한 사진들로 나타나며, 이 이미지들을 따라가다 보면 남초 커뮤니티의 ‘야짤’로 이어짐을 보여준다.(250)” 이 연구 사례에서 등장하는 ‘구글’을 디지털 포스트휴먼에서 시추한 원료인 데이터로 구동되는 내연기관으로, ‘야짤’을 그 내연기관이 에너지를 얻는 과정에서 생겨난 독성 쓰레기 부산물로 지칭하는 것이 과연 과장된 것일까?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평균 온도를 상승시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듯, 독성 디지털 쓰레기는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왜곡된 욕망을 더욱 증폭시켜 디지털 포스트휴먼 생태계를 파괴한다.

5.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주체성

책에 실린 많은 글이 기술의 편향성을 지적했다. 책에 실린 글들뿐 아니라 최근 여러 논의 속에서 기술의 편향성을 말하며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기술의 중립성과 편향성을 대비 시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과연 좋은 방법일까? 이러한 논쟁 구도는 오히려 그 뒤에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CEO들의 시선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기술 그 자체는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작동 중인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이 둘을 동시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활발히 작동하고 있는 기술은 생명에 해로운 쪽으로 혹은 이로운 쪽으로 어떤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술이 과연 중립적이냐 편향적이냐를 가르기보다는 그 기술이 현재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는지, 또 그렇게 연결, 작동될 때 그 기술은 어느 쪽으로 기울 게 되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동시에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현재 기술이 취하고 있는 편향성이 절대적인 게 아님을 알려 주고 따라서 그 방향을 바꿀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생명을 죽이는 방향으로 치우쳐 작동하는 기술을 향해 단순히 편향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면 기술에 대한 지나친 반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술에 대해 가지는 막연한 반감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되려 문제의 기술을 이로운 방향으로 돌리고자 하는 관심과 힘이 약해지게 만들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이 불러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포스트휴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이 기술이 현재 무엇과 가장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실은 잘 알고 있다. 바로 자본, 더 구체적으로는 자본에 예속된 주체들이다. 현재 수많은 인터넷 플랫폼과 인공지능 컨탠츠들이 포스트휴먼으로부터 시추한 데이터를 연료로 태우며 작동하는 내연기관이 되었다. 이 안에서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들은 각종 데이터 노동으로 생명을 강탈당하고 또 그 내연기관이 내뿜는 유독한 부산물에 고통받는다. 이 서평의 도입부에서 디지털 정보의 특징을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특징으로 변주해 만든 찜찜한 문장들도 디지털 정보를 천연자원으로 바라보는 주체들의 시선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예속된 주체의 맹위를 잠재우고 디지털 기술을 생명에 이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을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시급하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에 걸맞는 새로운 주체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그리는 일은 이롭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세계 곳곳에서 각각의 상황에 적합한 수천수만 가지 다양한 모습의 주체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낱낱으로 흩어진 다양하기만 한 것들은 흐름을 다른 쪽으로 돌릴 힘이 없다. 다양한 것들의 공통되기가 필요하다. 제각기 다른 모습 제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포스트휴먼의 새로운 주체들에게는 공통의 지평이 필요하다. 이 공통의 지평은 모두의 생명 활동에서 만들어진, 또 모두의 몸과 연결된 디지털 데이터를 결코 자본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한 땔감으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통의 지평 위에서 저마다 다른 주체들의 내적 차이는 활발히 작동하며 힘센 다중을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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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 김은주, 김재희, 유인혁, 이광석, 이양숙, 이중원, 이현재, 홍남희 지음 | 갈무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