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11/13 『한국사와 농민』 '후편: 양인론'(pp.163~275)

작성자
bomi
작성일
2021-11-02 17:23
조회
569
11월 13일 (토요일) 저녁 7시 30분에 『한국사와 농민』 '후편: 양인론'(pp.163~275)을 공부합니다.

책을 읽으며 생각난 질문거리나 토론거리를 가져오시면 좋습니다.
질문, 토론거리를 세미나 시작 전에 게시판에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물론, 세미나 당일에 자유롭게 제기해 주셔도 좋습니다.

11월에 뵙겠습니다.





<지난 세미나(10/22) 후기>

『한국사와 농민』 '전편: 노비론'의 후반부(71-160쪽)



3장은 노비 종류, 4장은 연원, 5장은 대구 호적이 중점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토론거리로 들어가 1번부터 차례로 논의해 보겠다.

지난번에는 경국대전을 중심으로 15, 6세기 노비에 관한 법제를 다루었고, 거기에 노비가 무엇이고 어떻게 구분되는지 매매되는 조건, 형성되는 조건에 대한 규정 등을 다루었었는데, 오늘 같은 경우는 역사적 문제가 많이 나오고, 그래서 노비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또 노비제도가 삼국, 고려, 조선시대 세 개의 시대에 똑같이 불리는 말이 있더라도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노비제도가 해체, 붕괴하는 과정을 다룬다. 1801년 폐지에서 갑오개혁까지. 공노비가 먼저 폐지되고 사노비가 폐지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선 시작은 태조가 포로 노비, 전쟁에서 정복당한 포로. 귀족일 수도 양인일 수도 천인일 수도 있는 다양한 구성의 포로들. 이 포로들을 가능하면 양인으로 전환 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 이 점이 좀 신기한데, 왜 노비가 아닌 양인으로 만들려 했을까가 좀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역사적으로는 그것이 결국 포기되었는데 또 어째서 그랬는가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97쪽 셋째 줄 보면 ‘공신들의 반항이 염려되어’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공신들은 태조, 창건자의 기획들을 무산시킬 정도의 반항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에 관해 논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어떤가?

그러면 우선 포로 노비들을 양인으로 전환하려던 이유와 또 그것이 포기된 이유를 둘로 나뉘어서 말해 봐도 좋겠다.
노비가 양인이 되면 국가 입장에서 취하는 이득은 무엇인가? 귀족과 왕 사이에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다. 왕은 귀족들과 클라스로 보면 한 계급이다. 왕은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층. 그럼 이해관계의 일치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만약 귀족들도 세금을 낸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귀족들이 노비로 소출을 많이 내고 세금을 낸다면 다를 텐데, 전통적으로 귀족들은 조세를 내지 않았다. 군납, 군역도 물론 하지 않았고, 양인 이하만 부역의 의무를 지고, 그런 식이었으므로 거의 모든 사회적 의무가 귀족들은 면제돼 있고 권리만 행사하려는 계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양인이 줄어드는 것과 늘어나는 것 중, 왕 입장에서는 당연히 양인이 늘어나야 세금이 늘어난다. 따라서 왕의 경우는 노비보다 양인이 늘어나는 것이 이득. 물론 궁노비 등 왕에 직접적으로 복속해서 노역을 제공하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그런 존재들은 늘어날수록 왕 입장에서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많아도, 왕이 경작하도록 만든 토지보다 많아도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므로 별로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어쨌든 그래서 왕은 양인의 수를 늘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물론 귀족들도 양인에게서 세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직접 노비에게 받는 조세가 훨씬 많으므로 노비화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왕과 귀족 사이에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 중요.
개국 공신들의 경우는 공신이 되고 나라가 창건되면 노비와 땅을 모두 공짜로 분할을 받았다. 만약에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양인으로 전환 시키면 시행을 하지 못했다.

귀족들이 조세를 납부하는 유형의 토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신전의 경우는 세금을 내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국가의 세수 확보 이야기. 귀족들 때문에 좌절. 일종의 중앙집권이 그다지 확정되지 않은 시점의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그나카르타에 관해 살펴보면 평민들이 공통장을 빼앗겨서 귀족을 압박하고, 귀족이 왕을 압박해서 숲의 헌장처럼, 공통장을 지켜내는 이야기가 있다.

중요한 내용인 것 같다. 왕과 귀족의 차이. 그렇다면 과연 지금은 어떨까?

지금같은 경우도 지방세와 국세는 구분이 된다. 만약에 전라도 경상도 등등의 도들을 과거에 비유해 하나의 성으로 쳐서 예닐곱의 성이 있다고 이해를 하면 주에게 지방세 납부를 하고 국가에 바치는 것은 또 따로 내고, 국가에 귀속되는 것과 지방에 귀속되는 것이 따로 되듯이, 지금도 그런 게 어느 정도는 남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번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가 보통 노비라고 표현하는 게 노와 비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상적인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남성 노비가 더 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질문해보았다. 100페이지 세 번째 단락. 남자인 노가 여자인 비보다 값이 싼 이유가 두 가지 나온다.
첫째 이유는 노와 비의 차이보다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차이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외거노비는 매매가 쉽지 않았고, ... 외거노비가 인신 부역을 겸하면서도 주로는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을 공납 형태로 주는 것이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남성 여성 구분하면 남성 노비들이 주로 있을 가능성이 있고, 솔거노비는 주로 집에서 거느리는 거니까, 직접적으로 인신적인 지배하에 들어와 있는 노비는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일적 노동의 거래냐, 부분적 노동의 거래냐 차이와 더불어서 성이 어떻게 노동력 시장에서 거래되고 관리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이유는 노예를 재생산할 수 있는 여성이 비싸다는 이야기.
궁금한 건 101페이지 상단. 잡혔을 때 받는 비용이 과거보다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노가 더 비싼 것 같아서 헷갈렸다. 노는 남자니까

역사적 상황의 차이를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노비 세전. 노비가 세습되어서 부모 중 어느 하나라도 노비가 되면 다 노비가 되는 세전법이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 후기로가면 약화되고, 세전에 대한 비판도 많고 ... 노비제도가 흔들리는 것. 노비제도의 붕괴.
임진란 이후에 노비제도 와해가 뚜렷하게. 상품 화폐 관계가 속대전에 서술. 세전 문제가 흐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그러면 한명 한명 계산해야 하니까, 힘이 센 노가 좀 더 비싸고, 비는 더 싸고, 그러니 10세기와는 좀 다른 것.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저자는 역사 발전론을 믿는 사람. 아닌 듯한 복잡한 대목도 있는데, 3번 토론거리의 맥락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103페이지 맨 아래 단락을 보면, 원시공동체가 해체되고 계급 사회가 시작되는데, 맑스가 구분하기를 노예제 사회부터 시작해서 임금 노예제로 나간다. 노동의 행사 주체로 봤을 때는 노예에서 농노로 임금 노예로 나간다고 보고, 사회 형태로 나간다면 봉건 사회로 가고 봉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가는데, 그 이후에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게 맑스의 기본적인 입장이었고, 많은 사회에서 그런 역사 발전이 법칙적으로 관철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물론 후기, 말년의 맑스는 다른 생각들도 직시를 한다. 러시아 사회를 분석하면서 러시아의 혁명가들하고 편지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노예제라거나 농노제라거나 임금 노예제라거나 그런 걸 거치지 않고도 원시적인 공동체 사회의 공동성을 가지고 바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 노예제가 완전히 보편적이지는 않은 것. 러시아의 미르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 그 미르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공산주의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맑스주의에서는 맑스의 이런 노년의 글들이 읽히지 않았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이런 문헌들이 발굴이 되어서 읽히기 시작했다. 스탈린 주의가 무너진 다음. 그러므로 소위 역사 발전 법칙이라거나 역사가 계속적으로 진보해간다거나 그런 견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쟁점이 형성되어 있다. 좀 고전적으로 맑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역사발전론을 신봉하는 경향도 있고, (그런데 이는) 서구 사회 일부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모든) 지역에 그런 발전 법칙이 펼쳐진다는 근거는 없다. 지금 그런 이견들이 형성되어 있는 단계인데, 이 책의 저자는 여러 곳에서 역사의 진화적인 발전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서술을 하고 있다. 103페이지 아래에서 4째 줄 같은 경우에 노비라는 신분층의 완만한 역사적 발전 상황. 이건 노비가 더 두터워 진다는게 아니라 노비가 삼국에서 뚜렷해져서 9세기경이 되면 아주 강화되고 그러다가 고려시대918년. 넘어가서는 가혹하지만 삼국시대보단 약화 되고 조선초에 가면 더 약화 되고 그래서 19세기 후반에 가면 붕괴되는 그런 식의 발전이라는 것은 해체를 향한, 소멸을 향한 진보가 있다고 바라보는 그런 관점. 이런 것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역사라고 하는 게 노예제 사회의 해체를 위하여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는 미래 긍정적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저자는 다른 측면도 가지고 있다. 반드시 계급투쟁이라는 걸 가지고 설명을 한다. 그 역사의 객관적 발전 법칙이라는 것이 노비들의 끊임없는 투쟁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만약 노비의 투쟁이 없다면 역사의 발전 법칙이 있을까? 아니라고 할 것. 3번, 4번을 합쳐서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 보자는 것이었다.

저자는 경성제국대. 30년대에 학교 다녔다. 경성대도 30년대 말이면 분명히 일본의 교토학파 중심으로 보편주의냐, 특수주의냐, 그 이야기가 나오는 직전 시점. 그 분위기의 세례? 백남운 같은 선배 세대의 영향? 북한 역사학과 소련 역사학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 있다.

5장에 가면 계급투쟁 이야기 많이 나오고, 5장 이야기가 많이 생각났다. 이거를 그럼 현재로 가지고 와서 이거를 읽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기간을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투쟁을 강조하는 라인보우 같은 저자도 떠올랐다. 재미있었다. 객관적인 진보에 대한 생각은 피터 라인보우나 마커스 레디커 같은 사람에게는 없는 것 같은데, 진보의 결과가 아니고, 공통장에서 대안적인 결과. 그 차이가 어디서 기인할까. 소위 노동의 우선성이라는 것. 객관적인 역사법칙을 상정하는 것인지, 이 저자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큰 혼란이 왔는데, 역사의 객관적인 발전 법칙을 신뢰하게 되면 오히려 계급투쟁을 미뤄두는 걸로 알고 있었고, ... 역사 발전론이랑 계급투쟁을 모두 중시. 저자는 이 둘을 같이 갈 수 있는 걸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좀 혼란이 온다.

그 두 가지가 나에게는 잘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급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이 필연성을 역사 발전의 필연성과도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계급이 있으면 투쟁이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이 반드시 실효적으로 잘 조직된다고 볼 수는 없겠다. 역사 발전 법칙을 믿고 여기서 표현되는 걸로는 노비의 신분적 처참한 비참함이 점점 더 줄어들어 간다는 것을 객관적 사실로 보게 된다면, 우리가 홀로코스트라거나 그런 근대역사에서 나타난 거대한 현상들은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지는 것 같다. 노비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 큰 남살을 당하는 것.
오늘날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 실업자, 노숙자들의 삶이 노예들의 삶보다 반드시 낳다는 법은 없고, 얼마든지 더 못한 경우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혹성이 줄어들고 비참함이 줄어드는 역사적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 투쟁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 형태로 바라보는 게 맞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양반 귀족들이 알아서 자기들의 이득을 위해서건, 어쩔 수 없는 양보 형태로든 간에 필연적인 힘들이 솟구쳐 올라가고, 그에 대한 대응이라는 생각이 든다.

토론거리 8번과 5번을 묶어도 될 것 같다. 맥락 설명을 부탁드린다.

우리가 노예제, 계급 사회의 탄생에서 노예제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 그 원인으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두 가지였는데, 전쟁, 부채. 상세히 상술 된 바는 없고, 오늘 하는 부분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기는 했는데,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핵심적인 노예생산 기제로 삼고 세습된다. 세전된다라고 하는데, 지난 시간에 자세히 나왔었다.
이 책이 재밌게 설명하는 부분이 반란 부분. 묘청의 난이라거나, 사육신이 세조에게 대항해서 단종 복권 운동을 펼치다가 결국은 다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래서 살아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됐다는 문제. 묘청이나 사육신 사례를 들면서 반란이 중요한 역할. 반란은 전쟁의 다른 형태. 내전. 이후의 부채로 인한 것들이 설명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생산 기제가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특수부락을 노비 생산 규제하고 연결시켜 생각하면서 향, 소, 처 부곡. (5번) 장. 요런 것들을 특수부락으로 이야기하고 미세한 차이를 서술해 나가는 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논의해 보면 좋겠다. 8번은 123페이지 전후에 나온다.

상층은 향으로 보내고 소와 부곡은 게토처럼 된다.

112페이지 같은 경우는 삼국시대에서 부곡,향이라고 하는 특수한 지역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하는 서술이고 이게 116페이지에 가면 고구려에 하호라는 것이 있는데, 이 하호와 부곡장하고의 유사성을 설명하는 대목이고, 그 다음에 118페이지에 가면은 고려시대하고 조선시대에 부곡, 향, 장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똑같이 부, 곡, 향, 처, 소. 이런 것들이 역사 시기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미시적 독해가 필요하긴 하다. 크게 보면은 전쟁을 했을 때에 그 결과물이 국가에 귀속되는가 귀족들에게 귀속되는가 그 기준으로 접근해 들어가서 가르는 것이 필요하다. 귀족들에게 주어진 전쟁의 결과물. 포로든, 토지이든 간에 토지도 주고 마을 사람들을 살게 함으로써 그 결과가 귀족들에게 ... 역사마다 다르지만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신라때 부곡도 .... 개인적인 것으로 귀속되는 것이었고, 후새대에도 나타났다. 크게 볼 수 있는데 시대마다의 구분은 좀 다르고.

일본은 근대 이후 신분제 폐지되고 나서도 부라쿠민의 후예로 간주 되는 이들이 노골적으로 소수자 차별의 대상이 되어왔고, 지금까지도 흔적이 되어 있고 연구주제다. 그에 비해 한국은 향소부곡이 일본의 부라쿠에 해당하는 사례였을 텐데. 한국은 여러 난, 항쟁, 봉기 이런 것이 일본 잔존형태와 다른 어떤 것으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 역모. 그냥 납치도 있었다. 투탁. 신분을 위조하는 건데 신분 위조가 두 종류가 있다 하층 신분이 상층 신분을 위조하는 경우도 있고, 상층 신분이 하층을 위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 그랬냐면, 이 사람들이 너무 몰락해서 자기들의 신분에 주어진 의무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아예 가족 전부를 거느리고 아직도 권세가 있는 집에 몸을 의탁해서 노비가 되는 것. 신분으로는 양인일 수도 양반일 수도 있는데 노비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었던 듯하다.

가끔 (심한 생활고 때문에) 일부러 죄지어서 감옥에 가시는 분들도 있는데. 현대판 투탁.

가부장적 노예제라는 말이 등장한다. 가부장적이 아닌 걸로는 가내 노예제라는 말이 있다. 대농장 노예제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 차이들이 궁금했다.

대 집단적 노예 경리와 가부장적 노예경리 구분. 전쟁으로 인한 노예 생성시에 전쟁을 한 주체가 부락민, 부족일 수 있겠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삼국시대라거나 고려시대라거나 이런 것들은 국가의 형태가 뚜렷이 있는 시기. 삼국시대 이전, 마한 진한, 동예, 옵저. 낙랑... 이런 군현으로 쭉 있던 시대는 국가 형태가 상대적으로 미발전 된 사회라 할 수 있겠고, 이는 고조선의 해체 이후에 나타난 것이고, 고조선이라고 하는 통일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시원적 국가가 와해 되면서 여러 개의 군현으로 나뉜 건데, 고조선이라고 하는 게 아주 중앙집권적 국가 형태로 보기는 어렵고, 그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고조선만 하더라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여러 단계로 나뉘는데, 그때 정치체적 의제가 공동체적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뒤로 소급해 갈수록 많이 들고. 혈통에 의해서 김씨부락, 박씨 부락등 성씨에 의한 정치체가 있다고 했을 때, 이들이 전쟁하게 되면, 가가 호호로 나뉘지 않고, 집단 결의를 할 수 있는 것. 집단으로 부려먹는 계급 사회가 짜여질 수 있는 것. 그런데 가부장적이라 할 때는 가족적 구조 위에서 노예 경리가 이뤄질 때에 가부장적. 그렇게 .. 구분.
노예 문제하고 노비 문제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저자가 노비라고 할 때는 농노라고 하는 것. 노예가 아닌 농노로 보고 있는 것. 그런데 노비중에 노예도 있는데, 시대를 역행해 갈수록 가부장적 노예들이 삼국시대로 가면 좀 많고 그 전으로 가면 없고, 노비의 비중이 줄어 들어가고 있다는 그런 입론을 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토론거리 6번.
김석형 저자의 학술적 기여 중에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봉건시대. 봉건시대를 서구 기준으로 보면 중세인데 우리의 삼국시대가 잘 포함이 안 되는 시점에서 봉건시대가 시작.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 로마 같은 경우 봉건시대가 아니라 노예시대. 서로마 전기로마는 노예제에 가까운 시대. 중세라고 한다면은 삼국시대가 끝나고 난 다음. 고려시대부터 중세가 본격화 된다는 이미지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김석형씨는 우리 사회를 분석하면서 농노제(노예제가 아닌 봉건제)를 삼국시대까지 끌어내린 게 이 사람의 독특한 주장 중의 하나이다.
또 하나의 학술적 기여가 삼국시대에서 임라일본부라고 하는 게 일본인들이 가야지역에 삼백년경부터 육백년경까지 3,400년 동안을 지금의 창원 진주, 이 지역 일대에 살고 있었고 심지어 그 지배영역을 전라도 지역까지 뻗쳤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것을 일제 때 강력히 주장해서, 식민지화가 자신의 고토를 회복하는 행위였던 것처럼 설명하는 이론이 있었는데, 저자가 이것을 분쇄하는 이론적 작업을 남겼었다. 이것이 임라 일본부라고하는 것이 사실은 가야지역이 아닌 일본 지역에 있었고, 일본의 규슈 지역에서부터 시작해 히로시마 있는 쪽, 그쪽 일대에 소위 분국. 신라, 백제, 고구려의 분국이 있었다고 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삼국시대 전후에 관한 것을 뒤집는 이론. 기원후 100년부터 600년까지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상황. 백제를 중심으로 일본쪽에 백제분국이 있었다는 것. 신라도 신라의 분국이 있었다는 것. 일본 내에 자기 지역을 가지고 있었고. 임라일본부 서기에 쓰인 것은 그 분국론으로 보면 대부분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110쪽 맨 마지막 줄 보면, 이 분국론을 당연한 듯이 쓰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낙랑군은 평양일대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 지금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면서 한 나라의 변경이 엄청 뻣어서 압록강까지 왔다는 주장을 펼치는 중인데, 이런 이야기는 1950년도 이후에 본격화 한 것. 그런데 그때까지 한 제국. 만리장성 끄트머리 저 요동반도로 치더라도 서쪽까지 그까지 한제국으로 와 있었는데, 만약에 고조선의 고터인 낙랑이 ... 어디있었다는 걸까. 요동반도에 요하, 요서까지 있었다는 것. 평양부터 수백킬로 몇 천킬로, 서쪽까지 낙랑군을 설정하고 있는 이론을 한 줄로 제시하고 있는 것. 그런데 한국에서 대부분 낙랑군이 평양주변에 있었다는 것은 일제때에 만들어진 논리, 낙랑군이 요서 지방에 있다가 밀려났다는 설을 펼치긴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낙랑군과 낙랑국을 분리해서, 평양 주변에 있었던 거는 최씨가 ... 둘을 완전히 구분하고 국과 군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이론도 있고, 이 부분이 굉장히 복잡하다.
고조선 연구가 중에 유명한 사람, 단국대 교수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이 사람의 고조선 연구하고 다음에 북한에서는 이지린이라는 사람도 유명한데 다음에 함께 보면 좋겠다. 고대사 공부로 한번 검토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에 대한 심리적 준비 겸해서 오늘 할 부분은 삼국시대 이후 이야기지만, 요 고조선 이야기도 중요한 문제로 생각이 든다는 견해를 적어 보았다.

노예제 이야기하다가 고조선이 건드려졌다. 노예제 이야기를 하려면 고조선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초반에 공통장 이야기가 맴도는데, 같이 읽는 작업이 공통장이 어떤 방식으로 영토화되거나 재편되거나 ... 던져주신 이야기는 이후 계속 시야에 놓고 고민을 해 보자. 이런 생각이 든다.

역사와 역사학이 구분될 텐데, 역사학에서 말하는 역사라는 게 객관적 사실이 아니고, 역사가가 개입해서 두뇌 속에 재현된 그 어떤 것이 서술되므로 주관이라는 문제가 빠질 수 없다. 남한에서 역사가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것과 북한에서 역사가들이 서술하는 것. 중국, 일본의 역사 서술이 굉장히 다르고 부딪히는 지점이 많이 나오고. 동북공정을 실시하고, 남한에서도 역사지도 같은 거를 시도를 하고, 일본은 과거부터 역사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조선 역사에 대한 자신들의 설명, 프레임을 잡아놓았다. 김석형은 일제 때 역사 공부를 했는데 맑스 공부를 해서 저항적 역사. 그런데 남한의 대부분, 김석형과 함께 공부한 신O호나 이런 사람도 대부분 친일본적 역사 서술을 하고 서울대에 자리를 잡고, 고대 이O도 서울대 이런 사람들이 후진들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친일적인 서술 식민사관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을 뿌리내려 논 상황이므로 1980년대에 민중사관이 나오며 도전이 이뤄졌지만, 아직도 많은 것들이 그렇게 남아있다. 누가 역사를 서술하고 바라보느냐가 굉장히 중요.
국가별 차이도 있지만, 국가 내에서 사람에 따라도 차이, 남한, 북한, 우파, 좌파, 다중. 역사가라는 주체 개념이 계속 유동하는 상황에 있어서 지금까지 역사가들이 서술한 역사의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우리(논쟁적 우리) 입장에서의 역사 서술이라는 것이 과제라는 것. 누가 쓴 것을 머리에 넣고 익힌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상황이다.

최근에 신유물론과 함께 관계의 문제를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데, 최근에 제 느낌은. 모든 요소들을 등가적으로 놓고 보는 느낌이 강하다. 특정 시선이라고 하는 것, 폭력성을 중심에 넣고 관계성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그 요소들을 등가적으로 놓고, 마치 신선한 이야기처럼 이야기하는 것. 의미를 주체를 다시 거론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토론거리 9,10,11

우선 10번 같은 경우는 찾아보니까,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임진년 전쟁 때에 일본군에 맞섰던 사람들의 상당 부분이 부곡민 출신. 천민들의 저항이 강했다. 그런데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도 최하층 인민들의 저항이 있었는데, 삼별초를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삼별초는 삼별초인데 그 삼별초의 주요 구성인자가 부곡민이었다는 서술이 나온다. 그러니까 항몽 투쟁에서도 최하층 인민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9번과 관련지어서 보면, 소유지 인민은, 노비라고 했는데 피정복민 중에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땅의 사람을 일을 시키는 경우에는 주로 노비가 많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지배지라고 해서 소유지와는 달리 본 이 부분이 재밌었다. 소유와 지배의 관계가 구별적으로 성찰될 수 있으니까. 지배지는 꼭 소유를 안 하고 있더라도 그것의 결과를 내 것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지배. 그 지배지의 사람을 부려서 거주도 하고 일도 하고 할 때에 향, 소, 처 부곡 같은 특수 부락을 만들어서 이 사람들이 거기서 자유롭게 일하게 하면서 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챙겨가게 하고. 양인이나 귀족의 땅. 왕과의 관계에서 보면, 노비라거나 향소부곡의 노비보다는 형편이 낳은 사람들 좀 더 낳은지위의 노비들. 양인의 경우도 여기 섞여 있으므로 향소부곡 모두 노비라 말할 수 없고, 특수 부락, 양인, 귀족, 이들이 모두 왕의 입장에서는 피정복자. 왕은 이 모두를 정복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귀족들의 땅도 많은 경우에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경우가 많았었고, 한데 그 귀족들도 세금을 안 내고 그런 표현을 썼지만, 왕의 일정한 지배하에 놓여있었으므로 지배력이 차등적인 것이다. 지배력의 차이로써 파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지배와 소유를 구별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흥미롭다. 과거의 지배는 인신을 소유한 지배인 데 반해 오늘날의 지배는 소유하지 않는 지배. ‘지배’와 ‘소유’로 지배의 두 형태를 구별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배개념은 섭정이라는 말을 쓸 때, 섭정은 아래로부터의 지배, 섭정이 되는 건데,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장악하면 권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권력을 소유하지 않으면서 권력이 다중자신에게 사용될 수 있게 만든다면, 지배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지배개념을 역전시켜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요즘은 지배보다 접근, 접속 이런 말이 소유보다는 중요한 영향력 행사의 방법이다. 제러미 리프킨. 리프킨 같은 경우 접속의 시대.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영향력 행사, 인터넷 시대에는 이런 것이 열려있다는 생각도 든다.

점유는 소유하진 않는데, 접속을 차단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점유권은 못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권리다. 월세 같은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양극 분해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농민층을 주로 다룰 때에 농민층이 양극분해된다라고 하는데 그 양극분해의 매커니즘이 주로 맑스도 이런 식의 이야기를 했고, 김석형 저자는 레닌의 양극분해를 인용을 했다. 주로 맑스보다는 레닌이나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인인용하는 걸 보니 당시에 북한에서 그런 책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았을까 한다.
양극분해의 과정은 지주 소작관계를 전제해서 양극분해론을 다룬다. 소작농이 쪼그만 땅덩이만 소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땅덩이를 빌려서. 차지농으로 된다. 소작과는 다른. 소작할 수 있는 사람의 최대 경작지가 10마지기 정도면 차지농은 100마지기 1000마지기를 빌려서 ... 농업 프롤레타리아, 자기 몸을 팔아야만 되는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거기서 일을시켜서 소출을 하면 엄청난 소작료를 내고도 잉여 소출이 크게 남게 되는 것이다. 차지농의 탄생으로 말미암아서 브루주아지로 전화해 가는 형태로 보는 것이다. 부농과 빈농으로의 양극화가 이뤄지고 중농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양극분해로 읽었다.
이 양극분해를 조선후기 노비층의 변화 해체까지 저자가 적용을 해서 노비제도 폐지에 매커니즘 중에 하나로 설명을 하는 것 같다.

농민이라고 하면, 노비. 농민인데, 그 농민이 양극분해 된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조건으로 보면 상품 화폐관계의 발전과 긴밀하다. 차지농의 발전도 상품 화폐관계가 발전하면서 거대 농토를 팔 수 있는 루트가 있게 될 때 부농 농업 부르주아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상품 화폐관계의 발전은 기본 전제인데, 일부 상층은 양인이나 귀족으로 변할 수 있게 만들었고 ,,, 대구의 호적이 상당히 잘 쓰여져 있고, 분석한 몇 편의 논문이 있는데 김석형은 직접적 자료를 볼 수 없으므로, 분석상의 문제점을 살짝 비판적으로 살피고 성과는 성과대로 챙기고, 예컨대 147페이지에 표2에 보면 양반이 1시기에서 4시기까지 787명에서 4,734명으로 증가한다. 6배 이상 증가. ... 그에 반해 노비수는 줄어들고, 상민이라고 부르는 것도 줄어들고, 중간층이 없었던 것. 중간층이 사라지고 노비층이 줄어들고 양반층이 되거나 양반으로 등기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요런 식의 상당수가 양반이 되어버리고 노비가 감소한다는 것은 경향적으로 노비재가 해체되어 가는 경향. 그래서 노비의 양극 분해. 한쪽에서는 양반이 되고 한쪽에서는 축소되고 그런 이야기.

레닌의 양극 분해론의 서술 대상이 되는 농민 이야기가 대략 시기가 언제쯤인지?

유럽같은 경우는 15,6세기부터 본격화 된다고 보아도 되고, 러시아는 미르 공동체가 엄청 강하게 잔존해서 그 양극분해가 잘 안 이루어지는 상황. 그게 라노트리키(?)라는 공동체를 만드는 조건. 그런데 레닌은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두꺼운 텍스트에서 라노트리키(?)의 분석은 틀렸다. 농민층의 미르가 잔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서구와 동등한 식의 양극분해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의견.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할 수 있는 혁명정당을 창출해야 한다는. 맑스의 미르 공동체와는 좀 다르다. 18세기 후반에 레닌은 러시아 농촌에서 어떻게 공동체의 와해 위에서 농업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되는가를 .... 조선같은 경우는 교수와 책 제목이 잘 생각이 안 나는데, 한국에서 농업 자본주의의 발달? 제목은 정확치 않지만 그 분석이 내재적 발전론의 원전과도 같은. 영정조 시대에 양극분해 되고 있다고 분석. 조선의 차지농이 형성이 되고, 농촌내에 부농이 출현하고 있었는데, 이게 일본 식민지배로 꺾여 버리는. 그래서 내재적 발전론이 식민지에의해서 어떻게 찬탈 되는지를 말한다.(사학자 김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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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2 17:25
    후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러시아 공동체 이름을 정확히 아시는 분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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