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11강 - '덕육의 과신과 종교적 열광에 대하여' 발제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3-05-29 10:26
조회
459
도의퇴폐론 비판

후쿠자와가 <문명론 개략>을 저술하던 1875년경부터 1882년까지는 사회에 ‘도의퇴폐론’이 불거지던 시점이었다. 구체제가 붕괴하면서 모럴의 혼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으로 기독교를 채택하지 않으면 문명의 진보가 없다든가, 전통 종교인 신도를 융성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후쿠자와는 도덕 교육 만능이라는 생각이 어떤 결과에 빠지는지, 종교적 광신이 얼마나 무서운 박해를 낳는지 드러내고자 했다. 7강 ‘지덕의 변’에서 맹목적인 도덕 추앙을 반박하고 지적 활동의 의미를 강조한 이유다.

일찍이 제1장 ‘논의의 본위를 정하는 일’에서 후쿠자와는 ‘극단주의’를 비판했었다. 그 논지는 양쪽의 극단만 가정한 채 논의를 좁힐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의가 조금만 어지럽혀지면 일본이 짐승의 길로 가는 것이고, 사덕을 결여한 자는 나쁜 사람이 되는 식이다. 이런 사고 체계에서 도덕주의의 목적은 나쁜 사람을 적게 한다는 한 가지 목적에만 귀착하고 만다. 그러나 후쿠자와가 바라보는 문명론의 요체는 “천하 여러 사람의 정신 발달을 한데 모아 그 전체의 발달을 논하는 것이”(412)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인민의 기풍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에 따라 사회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마루야마는 자기 세대가 겪었던 전란기를 언급하며 극단주의적 사고에서는 상황 인식의 수준이 사상되어버린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상황 인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의 문제이지, 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 교육의 과신

후쿠자와가 판단하기에 도덕주의는 필연적으로 사고의 획일화를 수반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모럴 속에서 농락하려는 것은 지력의 다양한 활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덕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니다. 사덕 자체는 지양해야할 요소지만, 지적 활동을 매개했을 때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총명예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봤다.(388~390 클라크슨과 하워드 사례 참조) 한편 덕은 지에 의거하며, 지는 덕에 의거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마루야마는 이를 두고 지덕의 상호의존 정도로 읽는 것이 합당하다고 강조한다.(416) 지덕의 활동이 덕의 정도에 의존한다고 생각해버리면 지를 중요시한 후쿠자와의 명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문명

야소의 종교(기독교)는 그 자체로 문명화 된 것이고, 신도, 유교, 불교는 우원한 것일까? 메이지 전환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는데, 이에 후쿠자와는 버클의 논의를 받아들여 반박한다. 예컨대 기독교가 원주민들을 개종시켜도 문명이 정체된 곳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소수지만 문명이 진보된 경우도 있다. 차이를 낳은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지’다. 후자의 드문 사례는 선교사들의 신앙심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지성으로 원주민들을 감화하고 지적 자극을 안겨줄 수 있었다. 지성이 수반되지 않는 개종은 외형적으로만 새로운 종교 의식을 받아들인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기독교여서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라, 지혜가 있다면 전통적인 종교든 어디서든 배워야한다는 게 후쿠자와의 생각이었다.


문명과 종교

그런 점에서 일본 인민이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기독교 문명도 덕의도 아닌 ‘지’다. 후쿠자와가 생각하기에 야소와 신도, 유교, 불교는 구체적인 가르침이 다르지만,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는 덕의 측면에서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만약 그 차이가 증기기관차와 짐수레만큼 벌어져 있었다면 애초에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쟁론이 일어나는 것부터 양자의 역량이 비슷하기 때문에 일어났던 셈이다. 지적 활동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문학, 기술, 상업, 공업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유럽이 앞서 있다. 종교는 문명이 진보한 정도에 따라서 그 취지를 달리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예컨대 프랑스인은 자기 자신들보다 못한 종교(가톨릭)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스웨덴이나 스코틀랜드보다 앞서 있었다. 종교 자체보다 각국 인민의 수준이 문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종교적 광신의 정신구조

서양 역사에 만연했던 종교전쟁과 학살 역시 지와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 있다. <서양사정>과 <문명론 개략>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을 언급하며 광신을 경계하는 태도가 드러나 있기도 하다. 기독교에는 관용과 박해가 공존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런 정반대의 태도가 생겨났을까? 후쿠자와는 종교와 결합된 지혜의 발달 여부에 따라 갈라져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에는 유럽에 비견할만한 종교전쟁이 없지만, 동시대에 가까운 미토 한의 당쟁이 종교나 학문을 정치화한 광신의 예라고 봤다. 뒤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끌어오는데, 그가 간악한 계책을 세웠다는 점에서 사덕은 부족했지만, 총명예지의 작용으로 전쟁을 멈추고 인민의 살육을 줄이는 업적을 세웠다고 평가한다.

지덕의 변의 요약

이처럼 지와 덕은 서로 의존하면서 공능을 발휘한다. 후쿠자와가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지만, 사덕에 머물러서는 사람으로서 직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예컨대 매일 먹고 입는 것, 증기 전신의 이로움은 어디서 온 것인지 되묻는다. 그것은 지혜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영향을 미쳤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한편 마루야마는 18, 19세기의 계몽주의적 진보관이 20세기 전체주의의 출현을 맞이하며 어떻게 망가졌는지 언급한다. 나치의 포학한 광신과 유태인 학살, 스탈리니즘은 과연 지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일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쿠자와의 예측을 한참 넘어선 사건이었다. 당장 유럽까지 가지 않더라도 1930년대 일본 군국주의 역시 그 시대를 살았던 마루야마에게 “근대 일본의 진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깊게 던져줬다고 회고한다. 문명의 ‘정신’은 후쿠자와로부터 무섭게 퇴보해 갔던 것이다.

후쿠자와에게 있어 지혜라고 할 경우 그것은 ‘총명예지의 작용’으로 정보-지식-지성-예지의 총합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정보사회에서는 예지와 지성이 지식으로 대체되고, 지식이 점점 정보에 대체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일종의 ‘수재 바보’처럼 정보는 너무 많은데 예지가 적은 사람이 그런 경우다. 지극히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과학 기술을 목적합리적으로 구사하는 사고관이 여기서 나온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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