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호] 『객체들의 민주주의』의 세 가지 테제 / 레비 R. 브라이언트 『객체들의 민주주의』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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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1-04-27 21:03
조회
799
 

『객체들의 민주주의』의 세 가지 테제

『객체들의 민주주의』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레비 R. 브라이언트
김효진 옮김 (『객체들의 민주주의』 옮긴이)


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번역하여 출판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한국어판 출간 기념행사를 마련해 준 점에 대해 갈무리 출판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책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쏟은 노고에 겸허한 마음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느낌도 듭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서 이 책이 어떻게 수용될지 보게 될 생각에 흥분됩니다.


우선 저는, 그 제목에도 불구하고, 『객체들의 민주주의』는 정치 이론에 관한 저작이 아니라 존재론에 관한 저작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존재론은, 정치철학과 윤리학처럼 있어야 하는 것과 있지 말아야 하는 것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에 관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객체들의 민주주의』가 처음 출판된 이후 여러 해 동안 저는, 많은 사람이 존재론적 주장, 즉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주장으로부터 규범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특이한 경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위와 땅돼지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바위와 땅돼지가 사람만큼 소중하다거나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그들은, 내가 우리는 모든 객체가 여타의 객체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시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제가 제기하고 있는 주장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이 책은 존재론에 관한 저작,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본성에 관한 저작이지, 가치, 규범성, 정치, 혹은 윤리에 관한 저작이 아닙니다.


『객체들의 민주주의』는, 대륙철학이 퀑탱 메이야수는 ‘상관주의’라고 일컬었고 그레이엄 하먼은 접근의 철학이라고 일컬은 것에 사로잡혀 있던 상황의 맥락에서 저술되었습니다. 상관주의란 우리는 언제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이고 이들 항 중 어느 것도 별개로 고려할 수는 결코 없다고 주장하는 사유의 경향입니다. 상관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어떤 객체를 언급하는 것은 언제나 그 객체를 고려하는 주체를 또한 언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관주의자의 경우에 객체는 언제나 이미 그것을 고려하는 주체에 대한 관계입니다. 상관주의자에 따르면, 어떤 객체를 주체에 대한 모든 관계와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주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관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들은 모두 관념론적 테제, 즉 우리는 존재자들을 주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언급할 수 없고 단지 주체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언급할 수 있을 뿐이라는 테제에 이르는 특징을 공유합니다. 이런 점에서, 상관주의는 필연적으로 관념론과 여러 형태의 사회적 구성주의에 이르게 됨으로써 모든 형태의 실재론과 반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현상학자들 사이에서는 객체에 관한 논의가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이 사물을 구성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관한 논의가 됩니다. 이런 현상학적 시각―그로부터 제가 많이 배웠으며 계속해서 소중하다고 깨닫는 사유 경향―에서 바라보면, 사물이 그 자체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무엇일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물을 그것이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있는 대로 언급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와 라캉 같은 사상가들이 보여준 언어적 전회의 틀 안에서 객체는 표상적 텍스트로 여겨지는데, 그리하여 우리는 객체를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표상적 의미를 판독해야 합니다. 라캉은 “우주는 수사학의 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존재 위로 던진 언어적 범주들이 존재자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방식을 강조할 것입니다. 「문자의 행위주체성」에서 라캉은 남성 화장실과 여성 화장실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남성 화장실, 저것을 여성 화장실로 만드는 것은 이들 화장실 자체와는 아무 관련도 없고 오히려 이런 본질 혹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기표―남성/여성―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언어와 별개로 존재할 이들 화장실 자체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이든 어떤 존재자와 마주치는 사태는 언제나 우리가 존재자들을 파악하는 방식을 조직하는 언어의 격자망을 통해서 걸러지기 때문이라고 라캉은 주장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상관주의입니다.


『객체들의 민주주의』 영어판이 출판된 지 십 년이 지난 후에 제가 그 책을 회고할 때, 그동안 줄곧 저에게 계속해서 호소하는 첫 번째 테제는 주체 없는 객체라는 테제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이, 주체와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을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테제를 확장하기 전에, 여기서 제가 제안하는 바는 우리가 더는 현상학을 실천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혹은 객체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론적 선택지를 축소하는 행위를 좀처럼 옹호하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철학적 선택지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현상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라캉, 기호론, 기호학,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구성주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들 기법을 계속해서 실행합니다.


우리는 개념들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는 주장을 저는 옹호합니다. 우리가 빛의 속력을 넘어설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개념보다 앞서 갈 수 없습니다. 억압이라는 개념이나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실언이 억압된 생각 혹은 욕망의 표현임을 식별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인과관계라는 개념을 고안하지 않은 채로 원인을 탐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개념들에 힘입어 우리 자신이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정도로 그것들로 인해 보지 못하게 되는 일도 초래됩니다. 무언가가 부각되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다른 무언가가 그늘로 밀려나게 됨으로써 사유와 실천에서 배제됩니다.


어쩌면 바로 여기서 우리는 상관주의의 결점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상관주의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부각하면서 우리에게, 후설이 서술하는 대로, 체험 속에서 사물이 의식에 유의미하게 주어지는 방식을 탐구하거나, 혹은 보드리야르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배우는 대로, 객체들이 판독되어야 할 일종의 문화적 맥락을 형성하는 방식을 탐구하도록 요청합니다. 이것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늘로 밀려나게 되는 것,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사물 자체의 사물성이거나, 혹은 사물, 객체가 어떤 사물이라는 자격으로 우리를 비롯하여 다른 사물들에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사물은 한낱 의미와 가치를 기입하기 위한 표면으로서 기능하는 캔버스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상관주의적 존재자임이 틀림없는 달러화 지폐 혹은 원화 지폐를 생각합시다.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존재자로서의 달러화 지폐 혹은 원화 지폐의 물질성은 대체로 무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들 존재자는 지폐 형태든 전자화폐 형태든 간에 아무렇지 않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달러화와 원화는 기호적 존재자인데, 그 물질성으로 구성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의미작용으로 구성됩니다.


상관주의는 모든 존재자를 기호적 존재자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고, 그리하여 사물들의 사물성, 사물로서 작용하는 사물들의 역능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확실히, 지젝과 푸코 같은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로,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적이고 담론적인 역능의 매우 다양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젠더와 민족뿐만 아니라 국경, 법률 등을 분류하는 방식 같은 담론적인 기호적 존재자들은 우리의 삶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물-권력’, 즉 사물들이 우리의 삶에서 행사하고 서로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류세, 기후변화, 장애, 설계, 그리고 그 밖의 매우 많은 것을 생각하는 데 긴요한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 즉 에이블리즘Ableism은 한낱 어떤 이데올로기 혹은 편견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서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건물의 건축적 배치 바로 그곳에 존재합니다. 조류가 번성함으로써 대양을 오염시키는 것은 담론이나 기호가 아니라, 오히려 농업에서 유입되어 조류를 과도하게 성장시키는 비료입니다. 주체 없는 객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사물들이 우리의 의도와 의미작용의 운반체와 지지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물로서 세계에 이바지하는 바를 생각하고 탐구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동안 줄곧 제가 견지한 두 번째 핵심 주장은, 객체는 자신의 잠재적 고유 존재와 자신의 국소적 표현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테제입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상기합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객체를 가리키는 낱말은 ‘실체’입니다. 나무, 태양, 너구리, 땅돼지, 인간, 갈매기, 바위 등과 같은 실체들은 자체적으로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현존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대체로 개별적 존재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체는 객체 혹은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범주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란 술어의 주어 혹은 지지체라고 주장합니다. 모양이 둥글다, 달리고 있다, 색깔이 붉다 등과 같은 술어들이 내재할 실체가 있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실체인 공이 붉고 둥글다고 말합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둥금과 붉음 같은 성질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오히려 언제나 내재할 실체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객체, 사물, 또는 실체를 특성들 또는 성질들의 생기 없는 다발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류의 객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표현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우리는 일단의 특성을 제시합니다. 그 바위는 은빛의 반점들이 박혀 있는 회색입니다. 그것의 무게는 이렇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이 내킨다면 꼼꼼히 서술할 수 있는 기하학적 형상을 갖춘 거친 짜임새를 나타냅니다. 그 바위는 그런 것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변화하지 않습니다.


저는 잠재적 고유 존재와 국소적 표현을 구분함으로써 객체에 관한 훨씬 더 역동적이고 불가사의한 구상을 제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객체의 잠재적 고유 존재는 그것의 역능 또는 역량을 가리킵니다. 모든 객체는 우리가 결코 완전히 가늠하거나 인식할 수는 없는 감춰진 역능이나 역량을 품고 있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어떤 객체의 국소적 표현은 그 객체가 다른 객체들과 주고받는 상호작용들의 결과로서 이들 역능이 세계 속에서 현실화되는 방식입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 철이 풍부한 암석과 우리 자신의 신체를 살펴봅시다. 당신이 화성에서 태어난 어떤 기묘한 에일리언 종의 구성원이라고 가정합시다. 이 종은 식물과 얼마간 유사한데, 아무튼 화성의 희미한 햇빛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한편으로 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산소도 생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화성의 희박한 대기의 화학적 조성으로 인해 그런 에일리언에게는 철이 풍부한 암석이 녹슬어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철이 풍부한 암석은 자신의 내부에 녹슬 수 있는 역능을 품고 있고, 녹슬 수 있는 역능은 자신의 잠재적 고유 존재에 속하지만, 녹이 국소적으로 현시되지 않는 이유는 단지 화성의 대기가 산화 반응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산소와 물을 함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객체의 역능이 어떤 국소적 표현으로 펼쳐지는지 여부는 그 객체가 속하는 맥락 또는 관계들의 장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신체 사례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걷는다는 사실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한 발을 나머지 다른 한 발 앞에 둠으로써 땅 위를 걷습니다. 이것은 다만 제가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는 방식의 일례일 뿐입니다. 지구는 단지 제가 딛고 걷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화성으로 여행하는 우주인이라고 가정합시다. 화성의 질량은 지구 질량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화성의 중력은 상당히 다릅니다. 당신이 그 붉은 행성에 도착하여 처음 몇 걸음을 떼자마자 당신은 곧 쓰러집니다. 달에서 걸으려고 시도하는 최초의 지구인들을 촬영한 영상 자료를 시청하기만 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걷자마자 곧 쓰러진 후에 등껍질이 뒤집어진 거북처럼 땅 위에서 버둥댑니다. 달 혹은 화성에서 걷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이들 천체에서 이동하려면 당신은 게처럼 걷기와 깡충깡충 뛰기를 조합한 것과 같은 종류의 걸음걸이를 실행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제가 끌어내는 교훈은, 걷기가 우리 신체의 역능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 위에서 이동하는 천체와 관련지어 생겨나는, 걸을 수 있는 잠재적 역능의 국소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와 더불어 걷습니다. 지구는 단지 발을 딛고 걸을 표면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저의 근육이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중력장을 제공함으로써 걸을 수 있는 저의 역능에 이바지합니다. 달 혹은 화성 같은 천체에서는 그런 특정한 중력이 부재하기에 저의 근육은 더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국소적으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우리 자신에 접어 넣거나 주름잡아 넣음으로써 걸을 수 있게 되는데, 그리하여 걷기는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지구도 같이 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돛단배와 같습니다. 돛단배는 홀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과 더불어 항해할 따름입니다. 어떤 존재자가 할 수 있는 것, 즉 그것의 잠재적 고유 존재는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다양한 국소적 표현으로 활성화됩니다.


잠재적 고유 존재와 국소적 표현 사이의 구분을 동원할 때 제가 바라는 바는 우리가 객체를 그것의 성질들, 특징들, 또는 특성들로 환원함으로써 그것들을 본질화하는 일을 그만둘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객체의 특징 또는 특성을 그 객체가 더 넓은 주변 세계와 상호작용할 때 현시되는 국소적 표현에서 자신의 잠재적 고유 존재를 현실화하는 다양한 방식으로부터 생겨나는 사건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희망컨대, 우리는 사물이 자신이 처해 있는 더 넓은 객체 장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하고 현시되는 방식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객체가 자신이 처해 있는 맥락에 의존하여 무슨 일을 할지 결코 전적으로 알지는 못하고, 그러므로 조심스럽고 겸손한 자세를 갖추고서 사물들을 세계 속에 펼쳐 놓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제가 견지한 세 번째 테제는 평평한 존재론이라는 테제입니다. 평평한 존재론은, 세계에서 모든 객체가 다른 존재자들에 동등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예를 들면, 태양은 벼룩보다 훨씬 더 많은 존재자에 영향을 미칩니다―반면에 모든 객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동등하다고 선언합니다. 또다시, 저는 이런 선언이 규범적인 주장도 아니고 정치적 주장도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든 객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할 때, 저는 모든 객체가 가치와 존엄성에 있어서 동등하게 소중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그것들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이 모두 사물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술될 때, 저는 여러분 모두가 다음과 같이 자문하리라 추측합니다. “도대체 누가 달리 생각했었을 것인가?” 그리고 사실상 누구든 달리 생각하는 것은 기이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존재자들의 순위를 정하여 정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앞서 논의한 주제로 되돌아가면, 상관주의자는 우리가 마치 존재의 주권자인 것처럼 인간을 다른 모든 것의 상위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양철학에는 문화를 자연 위에 그리고 자연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긴 역사가 있습니다.


평평한 존재론으로 제가 바라는 바는, 우리 자신이 언제나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얽혀 있음을 깨닫도록, 우리를 여타 사물의 주권자로 여기면서 자연 위에 그리고 자연 바깥에 두는 사유의 벡터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문화로 불리는 한 영역이 있고 자연으로 불리는 다른 한 영역이 있어서 그 두 영역이 벽으로 분리된 것처럼 서로 경계가 엄격히 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 또는 우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의 주권자가 아니라, 언제나 이미 사물들 사이에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인류세에 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존재에 관한 우리의 구상을 이런 식으로 평평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숙고한 끝의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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