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호] 「반 그리스도」읽기

서평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1:18
조회
775
「반 그리스도」읽기

김상범


1.

「우상의 황혼」에서 우리는 니체가 ‘길러냄’의 도덕과 ‘길들임’의 도덕을 구별 짓고 전자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구분과 가치평가는「반 그리스도」에서도 유지된다. 니체는 지금까지 기독교적 도덕에 의해 길들여져 온 ‘가축으로서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를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 가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이 인간 종족을 계승해 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더욱 가치 있고, 더욱 삶에 적합하며, 더욱 확실한 미래를 가진 자로서 우리가 어떤 인간형을 길러낼 것이며, 원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송무 옮김, 「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24)

이러한 “더 가치 있는 인간”1)은 상승하는 인간이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상승하는 인간은 니체가 이전의 저작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만족이 아니고 더 강한 힘을, 평온이 아니고 싸움을, 덕이 아니고 유능을”2) 추구하는 인간이다. 즉 힘 상승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힘 상승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추구하고, 이러한 긍정적인 목표에 비추어서 퇴락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공식은 “하나의 긍정, 하나의 부정, 하나의 직선, 하나의 목표”3)인 것이다. 니체는 아예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선이란 무엇인가?-힘의 느낌, 권력의지, 힘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악이란 무엇인가?-허약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힘이 증가한다는 느낌-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24)

니체는 이러한 힘 상승을 통해서 “보다 고등한 유형”4)이 출현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인류의 역사가 힘 상승의 역사, “보다 나은 것, 보다 강한 것, 보다 고귀한 것으로의 발전”5)의 역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인류 전체에 비해 보면 일종의 초인과 같은 존재”6)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연적으로 반복해서 출현해왔으며, “위대한 성공의 그 같은 우연한 발생은 언제나 가능했었고 어쩌면 언제라도 가능”7)할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이러한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바꾸기를, 즉 ‘초인’을 길러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이와 같은 인간형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인간을 ‘길들이고’ 타락시키는 제도와 사상과 이념으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저서를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반 그리스도(anti-christ)」라는 제목은「반 기독교」로 읽혀야 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기독교는 유죄다....내가 보기에 기독교 교회는 극도로 부패한 부패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부패에의 의지를 품어 왔다. 기독교 교회는 어느 것 하나 타락의 손길을 대지 않고 그냥 둔 것이 없다....나는 기독교를 단 하나의 영원한 인간의 오점이라고 부른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p.194~195)

2.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궁극적인 부패에의 의지"를 품게 되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자라난 토양"8)에 대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불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니체는 놀랍게도 기독교가 "유대인적 본능의 대항운동이 아니고 실은 그 본능의 논리적 귀결"9)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본능은 유대민족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유대민족 자체의 본질이 되어버린 그들의 권력의지를 의미한다. 이들의 권력의지는 전형적인 '부정'의 권력의지이다. 즉, 이들은 모든 자연, 모든 현실성, 외부세계 자체를 '부정'하고 적대시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노예'이자 '원한의 도덕'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니체는 유대교도 처음에는 '긍정의 종교'였다고 말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의 야훼는 힘 의식의 표현이었고 그들 자신에 대한 기쁨, 그들 자신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었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p143~144)

그렇다면 유대교는, 그리고 유대민족은 어떻게 그렇게 타락한 것일까? 그것은 외부세력에게 정복되어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사제세력의 선동에 의해 신을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신에게 더욱 종속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들 사제세력은 자기 민족의 불행한 역사를 신에게 지은 죄에 대한 벌로 해석함으로써 신을 존립시켰다. 이때의 신은 이제 자연적이고 긍정적인 권력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선한 신이 된다.

그리고 사제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이 유대 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것을 '신의 뜻'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민족을 지배해나가게 된다. 이와 같은 날조는 "모든 자연적 인과관계를 추방"10)하고, "모든 자연적 관습, 모든 자연적 제도"11)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려 사제라는 기생충이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하도록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같은 사제의 지배에 의해 유대민족은 "삶의 상승운동을 나타내는 지상의 모든 것"12)을 부정하는 타락의 역사를 겪게 된다. 왜냐하면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활기차고 거침없으며 쾌활한 행동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일"13)은 유대교의 사제들에게는 "몹시 곤란한 것"14)이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독교가 이러한 '부정'을 통해서 작동하는 사제적 본능의 궁극적인 귀결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유대민중 속에 각인된 이러한 부정의 본능이 사제계급조차도 부정함으로써 발생한 종교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 민족이 자기네 본능에 맞는, 자기 부정에 이를만큼 논리적인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냈던 것"15)이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유대적인 토양에서 "현실에 대한 유례없는 철천지 적대감의 한 형식"16)으로서의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3.

따라서 '객관적으로는' 초기 기독교 운동은 사제계급의 특권과 사제들이 우위에 있는 사회적 위계에 대한 반항이었으며, 따라서 이 운동은 '객관적으로는' 정치적인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어떨까? 예수는 "과연 그러한 대립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17)을까?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운동의 이러한 '객관적' 의미는 예수의 뜻을 오해하고 오독한 결과라고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에게 있어 “모든 싸움, 자기가 싸우고 있다는 모든 느낌의 반대가 바로 이 경우에는 본능이 되어” 있으며 “저항 불능성이 여기서는 도덕이 되어 있고... 평화 가운데의, 너그러움 가운데의, 적의를 갖지 않은 가운데의 복의 도덕이 되어 있다.”18)

그리고 예수는 <신의 나라>는 초월적 피안의 세계로서 약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와 같이 천국은 마음의 상태, 즉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기쁨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과 <신의 나라>의 거리가 사라졌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죄>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음, 즉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이렇게 복 받은 삶,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몸소 그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특히 이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보인 태도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았던 대로, 그가 가르친 대로 죽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것은 재판관, 간수, 고발자, 그리고 모든 종류의 모략과 조소 앞에서의 태도, 십자가 위에서의 태도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 않는다....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 안에서,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p.155~156)

여기에는 어떠한 원한도, 복수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예수를 죽인 자에 대한 원한 속에서 <보복>과 <심판>의 교리를 짜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보복>과 <심판>이야말로 가장 반-예수적인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역 사적 순간이 눈 앞에 나타났다. <하느님의 나라>가 적을 심판하려 온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그와 함께 모든 것이 잘못 생각되고 있엇다. <하느님의 나라>가 마지막 막이요, 하나의 약속이라니! 복음이란 바로 그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이루어진다는 것, 실재한다는 것이었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61)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기독교도는 사실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19)라고 말한다. 이렇게 니체는 예수의 뜻이 근본적으로 오독됨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니체는 예수를 ‘자유정신’이라고 부르지만, 예수를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초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러한 사상과 실천은 내적 세계에의 절대적 가치부여와 이로부터 형성되는, <현실세계>로부터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는 본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현실성에 대한 본능적 증오”20)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성에 대한 본능적 증오”는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과 맞물려 작동하는데, 니체는 이와 같이 고통과 전쟁을 무조건 피하려고 하는 본능을 ‘데카당스’의 본능이라고 부른다. 초인은 힘 상승을 위해서는 고통과 전쟁을 피하지 않으며 고통과 전쟁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고통과 전쟁에도 불과하고 피어나는 쾌락을 긍정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데카당’이지 ‘초인’이 아니다.

예수와 유대교/기독교는 이렇게 ‘현실성’을 ‘부정’한다는 데에서는 동일하지만, 그러한 ‘부정’이 긍정의 토대 위에서 성립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별된다. 예수는 내적 세계, 즉 어떤 ‘고정관념’에도 포획되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 내면세계를 긍정하고 이를 토대로 이 세계와 대립되는 <현실세계>를 부정하지만, 유대교/기독교는 ‘현실성’을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피안의 세계를 날조해낸다. 전자는 삶=생명을 긍정하고 후자는 부정하며, 전자는 원한 없이 살아가지만, 후자는 원한에 얽매여 있다.

4.

니체는 이렇게 기독교가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데에는 사도 바울의 역할이 크다고 보고 있다. 바울은 희생과 부활, 그리고 심판의 교리를 세움으로써 예수의 <기쁜 소식>을 왜곡하여 <나쁜 소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니체는 여기에 바울의 권력의지가 작동했다고 본다. 니체에 의하면 바울은 “독재를 확립하고 사람을 가축으로 만들기 위해”21) “불멸에 대한 믿음”22), “다시 말해 심판의 교리”23)를 확립했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과 ‘최후의 심판’ 교리의 유포는 사람들이 삶의 중심을 사후에 있을 심판과 영혼의 구원에 두게 하여 사실상 기독교 성직자의 입맛에 맞게 사람들을 길들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혼의 불멸성의 교리는 삶 속에서 삶 자체를 상승으로 이끄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삶 속에서 ‘공공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개개인의 영혼의 구원에 비해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삶 속에서 타인과의 ‘차이’를 생산해내는 일조차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의 무의미성과 개개인의 구원의 절대적 중요성은 <만민평등>과 <인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게 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만민평등권>교리의 독소-그것은 무엇보다 기독교에 의해 철저히 파급되어 왔다. 저열한 충동의 가장 내밀한 뒤안길에서 기독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존경심과 거리감에 대해서, 다시 말해 문화의 모든 상승과, 성장의 선행조건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싸움을 벌여오고 있다. 기독교는 대중의 양심을 이용하여 우리들과, 고결하고 유쾌하고 드높은 정신을 가진 모든 것과, 우리의 지상에서의 행복에 대항하는 주무기를 만들어 내었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64)

그리고 이렇게 기독교로부터 시작된 만민평등사상은 정치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과 같은 부르주아/시민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현대성은 ‘기독교적 도덕=떼거지의 도덕=노예의 도덕’의 주인 도덕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만민평등권>의 사상이 "문화의 모든 상승과, 성장의 선행조건"에 대해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타락에의 의지’를 품고 있으므로 정치적 현대성은 타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5.

뿐만 아니라 니체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것"24)이며, 지구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인류 위에 최고의 가치로 내건 <가장 드높은> 상태란 간질병의 형식들"25)이며, "교회는 지금까지 미치광이들, 혹은 엄청난 사기꾼들만을 신의 위대한 명예를 위해 성자로 모셔왔다"26)고 말한다.

니체는 이처럼 교회가 인류의 정신적 건강 뿐만 아니라 건강 자체와 대결해왔다고 말한다. 니체는 기독교인들이 무어인들을 몰아낸 이후에 최초에 한 행위로서 (코르도바에만 270개가 있던) 공중목욕탕을 폐쇄한 사건에서도 위생을, 더 나아가 건강 자체를 등한시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교회가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곳에서, 그리고 병들고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서만 번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신은 오랫동안 "구석지의 신, 온갖 컴컴한 구석, 컴컴한 장소의 신, 세상의 온갖 불건강한 지역의 신"27)이었다. 니체는 이처럼 기독교가 병든 자와 친화적일 뿐만 아니라 병든 자의 원한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기독교는 바탕에 병든 자의 앙심을, 건강한 자와 건강에 적대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바탕이 건강하고, 긍지가 있으며, 의지가 높은 모든 것, 특히 아름다운 것은 귀에 거슬리고 눈꼴이 시린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77)

니체는 사람들이 고결한 것으로 떠받드는 '신앙' 자체도 병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신앙'이 "참된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28)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신앙'을 이루는 '확신' 자체가 병듦의 표현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병적제약을 가진 관점으로 말미암아 광신자가 되고만다....그들은 강하고 해방된 영혼의 반대유형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병든 영혼의, 이러한 개념적 간질병자들의 과장된 태도가 많은 대중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81)

반면에 니체는 사람들이 병적으로 생각하는 '회의'야 말로 정신적인 힘과 역량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무엇이든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강제당하지 않는 관점을 가질 수 잇는 역량은 힘에 속한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80)

그리고 니체에 의하면 확신과 거짓말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있어 거짓말은 "보이는 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것"29)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말한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고 말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기독교가 행한 거짓말의 목적 자체가 인류를 병들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니체는 주장하고 있다.

" 문제는 궁극적으로 무슨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성스러운 목적들이 없다는 것이 내가 기독교적 수단에 반대하는 이유이다. 거기엔 나쁜 목적들뿐이다. 삶에 해독을 끼치고 삶을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 육신을 경멸하는 것, 인간을 죄 개념으로 더럽히고 자기 모독케 하려는 것 등뿐이다."(「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83)

이러한 기독교의 목적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찬란한 로마제국을 파괴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니체에 의하면 로마는 "힘든 상황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이룩된 것 중에서 가장 웅대한 조직형태"30)이자 "모든 예술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경탄할 만한"31) 작품으로서 "청동보다 오래가는 것"32)으로 "영원의 상아래서"33) 건설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수천 년의 세월을 통해 지속되고 그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울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건축물로서의 로마는 "타락 중에서도 가장 타락한 형식"34)으로서의 기독교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기독교는 로마와 같은 찬란하고 건강하며 "삶에 미래를 약속"35)해주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이에 대해 찬다라적인 증오심을 품게 된다.

니체는 이렇게 로마적인 것, 즉 강력하고 아름다운 것을 타파하려는, 그리고 더욱 궁극적으로는 '삶 자체를 타파하려는 음모"36)로 서 기독교의 찬다라적 증오심이 인간을 타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 같은 삶의 번영을 영구화시키는 사회조직을 해체시켰다고 말한다. 따라서 니체는 정치적으로 말해서 로마적인 것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체가 르네상스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니체는 이렇게 '인간' 개개인의 관점에서나 '사회'의 관점에서나 기독교는 유죄라고 판결을 내린다.


1) 프리드리히 니체, 송무 옮김, 「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24
2) 같은 곳
3) 같은 곳
4) 프리드리히 니체, 송무 옮김, 「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25
5) 같은 곳
6) 같은 곳
7) 같은 곳
8)「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2
9) 같은 곳
10)「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4
11)「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6
12)「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3
13)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 도덕의 계보학 』 (연암서가, 2013),pp.37~38
14) 같은 곳
15)「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7
16) 같은 곳
17)「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8
18)「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9
19)「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59
20)「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49
21)「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63
22) 같은 곳
23) 같은 곳
24)「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75
25)「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76
26) 같은 곳
27)「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36
28)「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77
29)「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82
30)「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88
31) 같은 곳
32) 같은 곳
33) 같은 곳
34) 같은 곳
35) 같은 곳
36)「반 그리스도」,『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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