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호] 랏자라또의 『정치 실험』 서평 / 이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8-20 15:14
조회
1176

랏자라또의 『정치 실험』 서평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정치 실험』 (갈무리, 주형일 옮김, 2018)


이름 (무위예술가)


* 이 서평은 2018년 7월 20일 <대자보>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7239

왜 이 책에 관심을 가지냐고 묻는다면, 희망을 품앗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희망의 품앗이란 오늘날까지 희망 없는 희망으로 방치되었거나 불가능한 것에 대한 탐구로서 잠재력을 찾아가고 교환하는 사유나 모색으로서 품앗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예술가들이 당면한 문제가 그렇듯, 이 책에서도 프레카리아트로서 예술가의 경제적 빈곤 못지않게 부각되는 것은 주체성의 빈곤이다. 특히 ‘한국형 자본주의’ 그늘 아래 노동의 사각지대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자의 대가는 비단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다. 2011년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이후,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 중심으로 예술가 복지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공적 장치들도 구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예술에 대한 귀족적 취향의 인식이 이중적으로 작동되고 있어,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들이 난무한다. 역사적으로 다수의 예술가들이야말로 평생 동안 임시직을 전전하며 파업이나 노조조차 실행하기 힘든 구조 속에서, 심지어 가족마저 설득하기 힘든 정서적인 소외를 겪고 있다. 그 점에서 엥떼르미땅 운동을 경험한 프랑스와 문화적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이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유익한 자료가 될 것이며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멀지않은 미래에 한국의 예술가 실업보험 운동에 참여할 이들에게 가능성에 대한 용기와 정동을 전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책에 대한 또 하나의 내 개인적인 관심은 한국에서 10년 넘게 ‘무위(無爲)예술가’로서 살면서 미술사에서 원조라 할 ‘무예술가(anartiste)’인 마르셀 뒤샹을 만나는 것과 그의 대표작인 ‘레디메이드’에 대한 광의의 해석이 필자의 <작품없는 작품>과 교차하는 지점에서 미학적인 관점과 동질성뿐 아니라 두 작가의 시공간에 대한 조건과 배경의 격차를 분석할 기회를 주었으나 이번 서평이 아닌 다른 지면을 통해 서술하고자 한다.

“사회적 권리없이 문화도 없다”

엥떼르미땅 운동의 대표적인 이 슬로건이 함의하는 의미를 추려 크게 3가지로 요약하자면, 68혁명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가능성과 시간의 탈환 그리고 빈곤한 주체성의 회복이다.

68혁명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가능성의 탐색

랏자라또는 “20세기 동안 공산주의가 정치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차이, 정치적인 것과 생활방식 사이의 관계를 무디게 했고 이윽고 스탈린주의는 그 관계를 지웠다”고 분석한다. (p116) 이어 68혁명은 “근대 유럽 세계 안의 혁명은 단순한 정치적 기획이 아니었고 삶의 형태였다는 것과 개인의 품행 안의 변화와 세계의 형성 안의 변화는 함께 간다는 것”을 재발견했다. 주지하다시피 푸꼬의 미시물리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미시정치학은 이를 정치적으로 확고히 했다. 저자가 『정치 실험』에서 엥떼르미땅 운동을 통해 새로운 잠재력을 감지한다면, 그것인 프랑스 공연예술가들의 실업보험 투쟁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과 전복의 잠재력에 대한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엥떼르미땅은 “푸꼬의 자기와 타인에 대한 염려,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체와 세계의 생산”이 서양 역사 안에 깊은 뿌리를 가진 ‘새로운 전투적 태도’를 활성화하는 것까지 아울러 가로지르는 운동이다.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품행통치에 맞선 푸꼬의 “대항품행”을 검토하고 분자단위와 몰단위로 그 모호성과 잠재성을 고찰하는데,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생기를 느끼는 대목은 엥떼르미땅과 예술가들의 인터뷰의 인용들이다. 한 예로 어느 배우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일한다”는 절대자유주의와 “나는 내가 일할 수 있을 때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한다”는 극단적 자유주의에 대해, 저자는 이 간극을 엥떼르미땅이 지워버린다고 평가한다.

랏자라또에게 68혁명의 후유증을 해소할 <엥떼르미땅과 임시직 연합>의 가능성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에서 볼탄스키와 시아펠로가 우려하던 “사회적 비판”과 “예술적 비판”의 양립 불가능성을 뒤흔다고 본다. 68혁명때 예술가로부터 “예술적 비판”을 전수받은 학생들은 이후 미디어, 광고, 금융, 패션, 쇼비즈니스, 인터넷 등 사회문화적으로 위계 상층부를 차지했다. 반면 “사회적 비판”은 하층민과 종속된 자들 같은 노동자들의 몫이 되었다는 결과로 인해, 이 둘은 양립 불가능함을, “68년 5월에 원한을 담고 있다”고 표현할 만큼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에서 논쟁적으로 다룬 바 있다. 이에 대해 랏자라또는 사회학자와 경제학자들에 의해 “예술적 비판”의 혁명적인 주체적 변이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의 모델화로 간주하고 견지되는 데 대해, 실제로 공연예술가들과 기술자들이 참여한 엥떼르미땅 운동에서 그 점은 가장 강렬하고 분명하게 비판되었음을 밝힌다.

실제로 운동 연합체의 연대 구성은 예술가뿐 아니라 임시직과 실업자 그리고 기초생활수급자를 함께 수용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러한 연대가 가능한 것은 엥떼르미당 예술가들의 많은 시간이 사회적 보조금을 수령하는 임시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공연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프랑스 사장단의 자유주의적 계획”에 대한 ‘가장’ 강하고 치열하며 명석한 저항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은 그들이 가장 가난하고 임시적이며 소득이 낮은 예술가 계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뤽 볼탄스키와 에브 시아펠로의 우려는 “예술적 비판은 자유, 자율 그리고 진정성에 대한 귀족적 취향을 통해 자유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인데, 과거 “역사적 사회주의와 역사적 공산주의가 이 대립으로 실패” 했음에도 여전히 그들은 다른 시대에 자유와 평등 사이, 자율과 안전 사이의 대립을 다시 시작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따라서 “사회적 권리 없이 문화도 없다.”는 엥떼르미땅 운동의 대표적인 슬로건을 “연대, 평등, 안전 없이는 자유, 자율, 진정성도 없다”로 해석한다. 또한 볼탄스키와 시아펠로가 잠재적으로 귀족-자유주의적이라고 간주한 것과 더불어 사회적 정의와 양립 불가능하다고 간주한 것이 오히려 투쟁의 장이 된다고 부연 설명하며 아마도 그러한 힘과 장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맞서고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 된다고까지 호평한다.그 결과 엥떼르미땅의 가능성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에서 볼탄스키와 시아펠로의 이론적 구성과 근간을 흔들었고 그들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의 한계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고 피력하는 데 필자는 주목한다. (p73)

한국에서 진보성향의 예술현장에서 예술이 노동이냐, 아니냐의 논쟁이 점화된 시점을 고려한다면, 실업급여를 논하는 예술가들의 요구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때 공약임에도 정책으로서 실현은 시기상조라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현대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장벽에 대한 전복적 잠재력은 예술가들의 프레카리아트 계급과의 연대에 방점을 찍는다. 한국의 프레카리아트 예술가들이 평등과 안전? 그리고 연대를 함께 외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문화적 시공(時空)차가 있는 프랑스의 경우, 실업보험의 자금 출처가 노동자의 급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수익자의 수입에서 나온 상호부조적인 순환이라는 점에서 프랑스공연 예술가들에게 지급하는 실업보험은 신자유주의가 조장하는 자유경쟁으로 달궈진 무한주의에 찬물을 끼얹으며 시장논리의 개혁주의자에 저항하는 힘을 가진다. 오늘날 예술 주체란 현실적으로 엘리트 예술가와 21세기 아마추어리즘를 포함한 ‘아무나’ 예술가, 이렇게 두 가지 경로로 나뉘어 고려해야 가능한 보상/급여문제가 후기 자본주의와 맞물려있다. 이 시대 예술가의 고용과 실업문제의 복잡다단함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자본이나 공공기관에 고용된 예술가가 임금이나 보상으로 인해 주체성이 빈곤해지는 부작용은 그 다음 문제다. 문제를 순차적으로 풀기 위해 문제 속으로 들어 갈 필요가 있다. 국가와 사회가 문화를 사수하려면 예술가의 사회적 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예술가는 21세기 후기 자본주의에 걸맞게 사회적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예술은 재능이 뛰어난 천재나 엘리트만이 펼치는 특수한 영역이어서가 시간이라는 자본을 확보한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이며 직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탈환

『정치 실험』에 등장한 철학자들의 사유가 담긴 언어들 사이로 간헐적이나마 엥떼르미땅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만나는 것은 생기있다. 그들의 시간개념 역시 (포스트 포드주의 이후 노동의 재생산에 대한 해석과 비중이 상이해졌음에도) 죽은 시간이라 분류되던 실업시간과 산 시간이라 불리는 노동시간의 간극을 아우른다.

“실업보험은 우리에게 보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줍니다.” 인터뷰 대상자의 이와 같은 발언은 복지국가와 문화와 예술의 세계를 동시에 가로지르는 주된 규제가 시간의 규제임을 새삼 환기시킨다.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자본주의 격언을 “돈이 시간이다”라고 되돌려주는 엥떼르미땅의 격언화는 “내 자본은 시간이지 돈이 아니다”라는 마르셀 뒤샹의 좌우명과도 연계된다. 자본의 논리가 ‘산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명명함으로서, 피고용인들에게 실업에 대한 위축되고 부정적인 관념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적인 시간 개념이야말로 인지자본주의와 지식사회 그리고 문화적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임을 랏자라또는 상기시킨다. 그리고 엥떼르미땅을 통해 고찰한 “이 모든 죽은 시간들, 중지의 시간들, 빈 시간들, 목적성이 없는 시간들”에 현대 자본주의가 가한 사냥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주체성을 위한 곳임을 발견한다. 바로 이곳은 뒤샹의 무예술이라는 초예술적 공간이 잉태한 “아무나” 의 새로운 평등 개념을 거쳐 독자인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영매의 외침이던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요셉 보이스의 울림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빈곤한 주체성의 회복

실제적으로 예술가들에게 난감한 공간은 예술과 삶 사이에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그 간격의 의미를 주체성의 장으로 고양시킨다. “예술이야말로 삶 속으로 완전히 이행되지 않기에 삶과 예술 사이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간격이 존재한다. 바로 그 간격에서 주체성의 생산은 가능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사는 것’이며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임을 강조한다.” (P249)

여기서 랏자라또가 왜 『정치 실험』에서 무예술가(anartiste)인 마르셀 뒤샹과 프란츠 카프카의 직관적 방향성을 재조명했는지, 독자들은 인지하게 된다. 특히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의 활동과 입장에 대해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 핵심은 뒤샹에게 “예술은 주체성의 새로운 통치기술을 구성한다는 것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뒤샹은 그려지기 시작한 안전 사회들에서 제도로서의 예술, 즉 그가 규정하는 단어의 사회적 의미에서의 예술은 해방의 약속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정의한 바 있다.”

“무예술”과 “무예술가”라는 뒤샹의 신조어의 발명이 지시하는 것은 기존의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이중 확장으로 “사회학적”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각기 다른 활동 안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 존재하는 계수”라고 평준화함으로서 “예술을 전문가나 전문 직업인들에 의한 특화된 활동”이라는 협의의 의미에서 해방시킨다. 그런데 뒤샹식 확장은 “예술의 공적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도 적용됨으로서, 문화적 예외의 옹호자들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상품과 예술적 생산물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음을 드러내며 예술이 온전히 시장에 통합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예술을 ”행하는 것”, “행동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곧 예술적 실천을 미술의 “제한적” 뜻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있다. 한편 뒤샹의 무예술가로서 이중적 전략은 예술을 특이성에서 보편성으로 평등화하면서 동시에 “무예술가”로 불리는 조건들은 허용한다. 이는 예술인간을 상기할분 아니라 이른바 (들뢰즈와 가타리식 용어로) 예술과 비예술의 대립을 탈주하려는 시도로 이해되며, 예술을 맑스식이든 랑시에르식이든 전문직업인으로 자리매김하는 어떤 위치, 역할, 정체성에 대한 호명과 분류는 불편해하고 거부함으로서 “인공호흡기”라는 실존적 자리를 선호했음을 상기시키며 『정치 실험』에서 랏자라또는 무예술가로서 마르셀 뒤샹을 호명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무위예술가로서 필자에게 교차하는 난류(暖流)와 한류(寒流)중 차가운 혈류로서 뒤샹스러운 성분이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미술세계에서 안착하지 못할 만큼 삐딱하게 흐르는 조형적 악습이자 구조적 습성으로서 ‘망막에 비쳐진 현상을 의심하기’와 ‘뇌와 소울(soul)메이트가 되어 망막에 비쳐진 멍석 투시하기’ 그리고 ‘뇌와 영혼과 망막의 태만한 삼위일체로서 예술주체’ 등은 뒤샹에게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받았거나 모호한 동질감을 느끼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랏자라또가 『정치 실험』에서 무예술가로서 뒤샹을 호출한 것은 진부하리만큼 신선하다. 레디메이드는 선택이 그러하듯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배타적 이접들의 변증법적 논리를 실패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리고의” 포함적 이접들의 논리를 작동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된다는 저자의 설명은 왜 지금 『정치 실험』에서 하필 뒤샹인가를 철학적으로 되짚어보게 한다. 레디메이드의 광의의 해석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믿음과 미적 감동과 속성인 사랑에 빠지는 가타리가 예술가의 고유한 임무라 할 “바보의 유연성”에 있다. 전향자, 사랑에 빠진 자, 투사 등에서 나타나듯 레디메이드는 새로운 주체화 과정의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20세기 전시장에 무심한 듯 투척한 레디메이드라는 작품의 치명적인 끌림은 예술가의 능동성이든 노동자의 수동성이든 뒤샹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가능성을 허(許)했다는 데 있다. 이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거부”로서 필자 역시 “결정주의와 자유의지를 대립시키지 않는” 선택으로서 이 서평을 완수하지 않을 수 있다.

난제에 대한 해법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뿐 아니라 예술가도 기업의 하이퍼 모던과 네오 아카이크 사이에 잡혀있다. 무예술가가 예술가와 아나키스트의 합성어임에서 알 수 있듯이, 뒤샹의 무예술가(anartist)입장에서 동시대 예술가는 더 이상 아름다운 작품을 제작하거나 기교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는 반예술(anti-artiste)이 아니라 예술과 비예술(non-art) 사이의 변증법적 대립에 맞설 무예술(anart)을 선택했다. 어원상 예술은 만든다faire가 아니라 행동한다agir를 의미하는데 행동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활동을 의미한다고 한다....“각자는 예술가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제대로 평가받지는 못하는 예술가일 것이다.”라는 문장은 너무 솔직하다. 한편 아나키스트 예술가들은 아나키스트가 된다는 것이 그렇듯, 현대 자본주의에서 다양하고 기묘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지배하고 예속화하는 권력에 대한 교란을 발명하고 실행한다. 반면에 예술가들은 공공기관과 기업들의 “메세나들” 같은 제도가 마련해준 표현의 장에서의 활동을 “아나키스트의 미시정치적 기능과 역할을 무력”하게 만든다. 비엔날레라는 스펙타클한 예술행사 역시, 임금노동자와 예술가들이 자본의 권력 안에서 빚어지는 울퉁불퉁한 거래로 인한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저자는 이 장치를 검토하는 것이 우리의 현 상황이 정치계와 노조 세계에서보다는 더 잘 문제화되는 것으로 진단한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국내의 몇 비엔날레의 경우 그의 진단이 적용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구지 서구/비서구라는 역사적인 구조로 나눈다면 예술의 담론은 슬로우 푸드와 패스트 푸드화의 차이를 드러낸다. 지금은 두 유형이 비벼지는 과정이고 그 시차가 줄었을 뿐이다. 정치계와 노조세계에서 보다 더 잘 문제화되는 것은 비엔날레가 아니라 K-팝이라는 한류는 아닐지, 2년마다 열리는 정기 미술전람회가 거듭나기에 신랄한 논쟁과 새로운 레디메이드가 투척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예술가와 기술자들의 투쟁에서 던진 중요한 세 가지 질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그것은 “예술가/지식인의 새로운 형상에 대한 질문과 시간/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회 안의 소유권에 대한 질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개혁을 내건 자본의 압박에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엥떼르미땅 운동이 한국의 예술가에게 시사하는 바는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생생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도출해낸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확장적인 저항을 상상하고 드로잉해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가장 치열하고, 가장 강력한 저항”이라고 사용한 ‘가장’이라는 부사를 확인하는 일이다. 랏자라또의 고찰과 관점이 신비주의적 생기론에만 머물지, 실현될지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예술가들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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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저자는 『인지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위한 인지의 전용이 아니라 삶의 혁신과 행복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라는 말로 우리 시대의 대안적 경로와 실천적 과제에 대한 생각을 제시했다. 『인지자본주의』가 논리적 방법으로 권력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예술인간이라는 주체성의 형성을 중심으로 인지혁명의 계보학적 가능성을 더듬어 나가면서, 역량의 지도, 활력의 지도, 주체성의 지도를 그린다.

『예술로서의 삶』(재커리 심슨 지음, 김동규·윤동민 옮김, 갈무리, 2016)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말하고, 즐기고, 고통을 받으며 숨을 쉬고 있는 한 자기의 삶에 대한 관심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로서의 삶』은 바로 이러한 철학의 물음에 충실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재커리 심슨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물음에 예술로서의 삶이라는 철학자들의 통찰을 나름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니체,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마리옹, 카뮈, 푸코에 이르기까지 19~20세기를 수놓은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저자는 ‘예술’을 매개로 정돈한다.

『예술과 다중』(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심세광 옮김, 갈무리, 2010)

<제국>과 <다중>의 저자이자, 코뮤니즘의 정치철학자 안또니오 네그리의 예술론을 담은 책. 이 책을 구성 하고 있는 9편의 서신들은 추상, 포스트모던, 숭고, 집단적인 노동, 아름다움, 구축, 사건, 신체, 삶정치 등 현대예술에 대해 피해갈 수 없는, 아홉 개의 테마들을 다룬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예술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반을 착취하고 있으며, 다중이 새로운 주체성으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예술은 무엇이며, 또 아름다움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 질문한다.

『플럭서스 예술혁명』(조정환·전선자·김진호 지음, 갈무리, 2011)

다중지성 총서 첫 번째 책. 플럭서스 예술운동에 대한 한국 최초의 본격연구서이다. 플럭서스는 전통적이고 경직된 재현적 예술체제를 타파하고 예술을 삶과 통합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실험하고 실천하였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해체하고, 예술적인 것에 대한 제도적 ․ 전통적 통념을 넘어, 예술과 삶 그리고 존재와 생명의 통일을 실천했던 플럭서스 총체예술을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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