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 게임학에서 철학으로의 도약ㅣ이경혁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03-02 20:55
조회
342
 

게임학에서 철학으로의 도약


이경혁(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대표)


한 편의, 많은 인력이 오랫동안 시간과 자원을 들여 만든 AAA급 비디오게임 타이틀이 있다. 나는 TV와 콘솔기기에 전원을 넣고, 타이틀을 실행시킨 뒤 스크린에 펼쳐지는 광활한 세계 속을 헤매며 적과 맞서고 재료를 수집하며 다음 모험을 향해 나아간다.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은 기존 매체로 다 채워지지 않았던 새로운 총체적 경험들을 제공하며 게이머들의 관심을 모은다.

하지만 이런 서술은 언급한 기계들 사이 – 콘솔게임기, 소프트웨어, 텔레비전 – 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사례로 집에 사는 쥐 한 마리가 플레이스테이션의 전원 버튼을 눌러도 기계들은 똑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이루며, 화면에 (쥐로서는) 알 수 없는 영상과 피드백을 송출할 것이다. 관계와 상호작용은 여전히 유지되지만, 다만 인간이 추구했던 의도와 목적만이 사라질 뿐이다.

게임기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늘 당연하게 생략되는 부분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라는 앞부분이다. ‘에일리언 현상학’에서 ‘에일리언’은 나 혹은 우리와 무관한, 근대 이래 주체라는 기준점을 중심으로 관찰되고 해석되어 왔던 수많은 존재들이 인간이라는 주체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 지어지는 존재들을 총칭한다. 매체라는 기능 수행을 빼고서라도 콘솔게임기는 일련의 신호를 특정 프로토콜에 맞춰 디스플레이 기기에 내보내고, 메모리에 기록된 소프트웨어의 절차에 따라 주고받는 값들을 연산하여 되먹인다. 이 모든 과정을 기저까지 파고들어가면 우리는 0과 1로 값을 표현하는 작은 존재들과, 각각의 존재 사이를 엮는 논리 회로의 구성까지도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보고스트를 포함한 이른바 객체지향 존재론 전반의 흐름은 칸트 이래 이어졌던, 물자체는 알 수 없다는 명제 너머를 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인간과 무관한 모든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의미 지어지는 존재를 뒤로 미뤄두었던 흐름과 달리 보고스트는 여기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비유주의를 제시하는데, 이는 인과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과학으로는 미처 다 포괄할 수 없는 관계들 – 이를테면 음식의 맛은 화학적 분해와 결합에 의해 전달되지만 이런 방식으로 ‘달콤함’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 까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보고스트는 우리의 인식과 서술이 결국 인간의 감각에 기반하기에 인간이라는 중심을 벗어나기 어려움을 고백하며(139), 지각이라는 범주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각을 배제하는 사변적 비유를 통하는 방법만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각각의 객체는 객체 고유의 지각과 방식으로 주변과 상호작용하고 인식하며, 그 과정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혹은 인지가 불필요한 많은 것들이 소거될 것이다. 한 객체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따라서 어떤 의미에선 다른 객체에겐 불가능한 – 마치 칸트의 물자체처럼 – 일이 되고, 이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사변적 비유라는 의미다.

과학의 방식과 다르다는 점은 이를 테면 최근 각광받는 딥러닝 기반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미드저니나 CHATGPT 같은 알고리즘들은 과학적 방식으로 충분히 그 기능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난이도가 높다 하더라도) 설명할 수 있지만, 그를 통해 AI라는 객체 혹은 그를 구성하는 각각의 오브젝트가 어떤 경험을 축적하는지(경험을 축적한다는 말조차도 대단히 사변적 비유에 머무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를 살펴보게 만드는 단초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중심이라는 오래된 전제를 벗어날 때 확실히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질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중심을 벗어난 이해가 정말 이해인지, 혹은 그러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와 같은 많은 의문은 아직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 또한 부정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수많은 비유들을 통한 접근은 객체지향 존재론에 관한 여러 다른 책들 중에서는 (정말 그들 중에서라는 한정하에) 꽤나 직관적이고 쉬운 편에 속한다.

‘에일리언 현상학’은 엄밀한 논지를 펼치기보다는 무거운 에세이의 형식을 빌어 다채로운 비유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데, 다루는 분야가 넓다 보니 도리어 비유가 이해를 막아서는 부분도 적지 않은 책이다. 책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래서 도리어 누군가와 마치 선문답처럼, 언어를 활용하되 언어의 피안에 있는 무언가에 가 닿을 수 있다면 그 배는 버릴 수 있는 무언가처럼 오가는 사변적 비유를 통해서가 좀더 용이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한 이해라고 할 수 있는가?가 닿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무엇이 가 닿음인지를 보여줄 수 없는, 스스로도 비유로 점철된 책은 혼자 읽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읽어나가는 방식을 더 요구한다.


*


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2년 12월 30일 <뉴스프리존>( http://bit.ly/3L77n7d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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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예술과 객체』(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


미학을 제일철학으로 주장하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아름다움에의 귀환을 선언하는 책! 하먼은 실재적 객체와 감각적 성질 사이의 균열로 규정되는 ‘아름다움’의 규준 아래에서 ‘아름다운 것’으로서 ‘예술적 객체=객체+감상자’의 혼성 객체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이 테제를 기반으로 그는 비근대주의적이고 비관계주의적인 객체지향 미학으로서 ‘기이한 형식주의’를 도발적으로 제시한다.


사물들의 우주』(스티븐 샤비로 지음,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1)


이 책은 비상관주의적 사고에 대한 사변적 실재론의 일반적인 주장, 즉 인간 정신이 관계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사물 및 객체에 대한 주장을 탐구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현재에 지배적인 사변적 실재론 사상을 예상했고 그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한 세기 동안의 형식화와 정화를 향한 집요한 근대주의적 시도를 거쳐, 어쩌면 애초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대에 화이트헤드는 마치 우리의 뇌리에 스며들듯이 돌아온 것이다.


존재의 지도 :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당당히 옹호하는 한편으로, 이들 친숙한 관점을 변화시키고 문화 자체가 어떻게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이언트는 범생태적 존재론을 지지하는데, 요컨대 사회는 담론과 서사, 이데올로기 같은 기표적 행위주체들과 더불어 강과 산맥 같은 비인간의 물질적 행위주체들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생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브라이언트는 새로운 기계지향 존재론의 토대를 구축한다.


객체들의 민주주의』(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칸트 이래로 철학은, 마음과 세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객체에 대한 인간의 접근과 관련된 인식론적 물음들에 사로잡혔다. 브라이언트는 우리에게 이런 전통과 단절하고 다시 한번 제일 철학으로서의 존재론에 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브라이언트는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뿐만 아니라 로이 바스카, 질 들뢰즈, 니클라스 루만, 아리스토텔레스, 자크 라캉,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발달 체계 이론가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자칭 ‘존재자론’(onticology)이라는 실재론적 존재론을 전개한다.


비유물론 : 객체와 사회 이론』(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사회적 세계에는 어떤 객체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정한 피자헛 매장은 그 매장을 구성하는 종업원과 탁자, 냅킨만큼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그 매장이 종업원과 손님의 삶에 미치는 사회적 및 경제적 영향과 피자헛 기업, 미합중국, 행성 지구만큼 실재적이기도 한가? 이 책에서 객체지향 철학의 창시자인 저자 그레이엄 하먼은 사회생활 속 객체의 본성과 지위를 규명하고자 한다. 객체에 대한 관심은 유물론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흔히 가정되지만, 하먼은 이 견해를 거부하면서 그 대신에 독창적이고 독특한 ‘비유물론’ 접근법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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