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을 읽고ㅣ김치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03-02 21:00
조회
280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을 읽고


김치현(책방 풀무질 대표)


상상력은 몇 년간 내게 가장 큰 화두였다. 끊임없이 내몰리는 경쟁주의, 모든 것을 상품화, 금융화 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숨통을 조여왔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갑갑한 현실에 새로운 미래, 명쾌한 대안이 필요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상상해야 할지는 답이 없었다. 이제 막 눈을 부비고 현실을 직시하려 할 때 큰 힘이 되어준 첫번째 상상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전복’과 ‘혁명’에 매료되었다. 세상을 뒤엎어버리는 상상을 동력으로 움직였다. 조각난 문장의 파편으로만 접한 마르쿠제의 '억압적인 관용'이 일종의 결연한 의지를 북돋았다. “혁명은 과잉 결정으로 온다”는 알튀세르의 말을 품고 다녔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문장이 주는 힘에 푹 빠져 머리에 열이 올라있었다. 이 잠언은 이내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라는 말로 바뀌었다. (국내 활동가라면 한 번쯤 품어본 문장 아니던가!)

혁명에 대한 상상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지만, 이전만큼의 동력을 잃었다. 세상을 배우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상상도 커져야만 했다. 상상도 무턱대고 하는 게 아니었다. 제대로 상상하려면 깊은 고려가 필요했다. 어느새 길을 잃어버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은 입밖으로 내기 무서워졌다. 그 누구와도 서로의 상상을 나눌 수 없었다. 어차피 답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다들 상상하기를 귀찮아 했다. 눈앞에 산적한 문제도 너무 많아서 더 큰 세계를 그려보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국가의, 들어보지도 못했던 교수의 책을 통해 다시 그려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의 저자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는 포르투갈의 사회학자이다. 제목에서 보이듯, 책 전반에 걸쳐 ‘해방’과 ‘국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재사유한다.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과연 해방이 무엇이고 국가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꼼꼼히 점검한다. 그리고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국가-지역은 정치 발전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제1세계’가 아닌 ‘라틴 아메리카’이다.

라틴 아메리카가 의미 있는 사례 혹은 표본으로 언급되는 상황은, 처음 겪었다. 읽는 내내 낯선 당혹스러움과 몰입되는 흥미 사이를 넘나들었다. ‘보편적 진리의 개념은 없다’[1]는 말에 이토록 힘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양성과 복수성, 급진성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감각도 오랜만이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해방은 지극히 당연히 고려되었어야 하지만, 그래서 아무도 한꺼번에 다루지 못했던 통찰이다. 그야말로 ‘재발명’이 아닐 수 없다.

교차성이니 생태주의니 하는 개념도 이제 많이 대중화되었지만, 그간 정말 진지하게 고려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시원하게 답하기 힘들다. 신자유주의와 기존의 시스템이 꼬일 대로 꼬여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손댈 엄두조차 안나는 대한민국은 ‘선진 사회’를 들여오겠다고 ‘제1세계’만 바라보다가 결국 ‘식민주의’ 정도나 따라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가, 사회가, 국가가 무너지고 있다며 저 꼴은 나지 말아야 한다고 함부로 인용하던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오히려 이미 ‘새로운 상상과 대안’을 펼치고 있다. 세계 상위권에 진입했다고 자랑하던 국내 유수의 대학들이 부실대학으로 무너질 때, 그들은 들어보지도 못했을 라틴 아메리카의 대학들은 진정 새로운 사회를 위한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상상을 말한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말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하고 있는가? 그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가? ‘재발명’은 재점검과 재발견으로부터 온다. 과하게 쌓인 문제 앞에서 하나씩 골라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필수다. 우리가 가진 개념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하지 않으면 결국 보던 대로만 보게 된다. 마치 라틴 아메리카를 뒤처진 세계로만 인식하던, 책을 읽기 전처럼.


[1]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안태환 옮김,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 갈무리, 2022,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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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3년 1월 13일 <뉴스프리존>( http://bit.ly/3J8xfOE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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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절대민주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7)


이 책은 성장의 지속가능성이라는 자본의 문제설정을 생명진화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인류적 문제로 전복하는 것이 필요하며 혁명의 문제도 생명의 지평에서, 즉 생명진화의 가능성의 모색과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주제적 대의민주주의에서 대의 정치가들이 전유하고 향유해온 정치지대는 다중의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재전유되고 사회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절대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민주화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민주화하며, 집회민주주의와 일상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힘으로 기능할 것이다.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제이슨 W. 무어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세계생태론’(World-Ecology)의 주창자 제이슨 W. 무어의 대표작이 출간되었다. 근대성 비판이자 자본주의 비판으로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대단히 논쟁적인 책”이다. 저자가 비근대적인 생태적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관념들을 부각하기 위해 고안한 수사법의 덤불을 헤쳐나간 독자는 21세기 자본세의 현실을 조금 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현행 위기의 본성과 더불어 미래에 관해 생각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필독서.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엔리케 두셀 지음, 염인수 옮김, 갈무리, 2021)


엔리케 두셀은 라틴아메리카의 입장에서 타자와 해방의 문제에 천착해온 국제적인 사상가이다. 이 책에서 두셀은 해방철학으로부터 마르크스 연구를 거쳐 해방윤리와 해방정치로 나아가는 사유의 궤적을 그린다. 자본을 스스로 균열하고 지양되는 총체가 아니라 외재성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비동일자로 규정했다는 점, 자본 바깥의 실존하는 타자들을 전적인 무로 만들어야만 자본이 존재한다는 원리를 밝힘으로써 우리의 윤리적 책임을 자각시킨다는 점이야말로 두셀이 알려주는 미지의 마르크스의 면모가 될 것이다.


사빠띠스따의 진화』(미할리스 멘티니스 지음,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9)


이 책은 '자율 기획' 개념과 '제헌권력' 개념을 연결시켜 급진적 정치와 혁명적 기획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 작업틀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사건' 개념과 '상황 창조' 개념,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자기가치화' 개념을 연결시켜 사빠띠스따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고 그들의 혁명적 주체성을 독특한 관점과 치밀한 분석으로 조망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미래의 정치철학을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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