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번역하기ㅣ권혜린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3-04-07 13:34
조회
393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번역하기


권혜린 (한경국립대 강사·문학 연구자)


이 책을 분류하자면 문학이나 비평의 갈래에 속하겠지만, 과감하게 번역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다. 한국 문학과 한국 사회를 감정을 통해 본다는 점에서 감정 번역이라고 해도 좋겠다. 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번역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화 번역이나 윌리엄 레디의 번역 개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때의 번역 개념이 확장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한눈에 파악되지 않고 포착할 수 없는 감정들을 ‘상상’으로서 번역해 내는 작업이 5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책인 『광장과 젠더』에 담겨 있다. 저자가 ‘사유실험’(7)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잠재적인 감정까지 고려하는 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물론 ‘사이-패턴-연결-상상’이라는 비선형적인 목차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책에 실린 내용을 거칠게 나누어 보자면 방법론으로서의 감정에 대한 글, 문학 작품을 분석한 글, 사회 현상을 분석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학에 대한 글이 다수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글을 단순히 작가론이나 작품론이라는 개별적 글로만 향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문학사의 틀 안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식민지 시기 김기진의 문학에서부터 한국전쟁 시기 박완서의 문학, 최근 시기의 장강명과 황정은의 문학까지 다룬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궤적을 그려 볼 만하지만 그 기준은 통시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김기진에게서는 “‘개인’의 감정이 다른 개인에게 옮아갈 수 있는”(71~72) ‘감염’의 감정교육을 통해 개별 인간의 집합체인 공동체가 나타난다. 박완서의 작품에 나타나는 한국전쟁은 죄의식과 수치심을 상실하게 했으며 시대감정으로서 사회적 속물화를 보여 주었다. ‘우리’에 대한 인식이 ‘나’와 ‘가족’으로 축소되고 생존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 인식은 개인의 성공적인 생존기가 아닌 ‘헬조선’을 탈출하고자 하는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와 같은 작품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상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손쉽게 개인이나 공동체의 실패로 귀결하지 않는다는 데서 이 책의 치열하고도 지속적인 고민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고민과 연결되는 단어로서 책의 제목에도 나와 있는 광장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광장은 최인훈의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밀실(개인)과 광장(공동체)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두 개가 연결되는 것이다. 나아가 삶과 글의 광장을 동시에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살면서 쓰고, 쓰면서 살지 고민하는 것이다. “문학과 삶 사이의 시차나 거리가 더는 가능하지 않”(355)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에 따르면 단수적인 광장이 아니라 복수의 광장‘들’(7)로 나타나야 한다. 감정을 상상하고 번역하는 작업이 문학-삶에 틈입될 때 글쓰기 자체도 새로운 광장이 된다. 감정이 고정되거나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름과 관련되는 유동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과거의 재편이자 은폐된 미래의 앞당겨진 현실화”(11)이며 “행위 직전의 에너지이자 방향성을 갖는 힘”(11)에 해당하므로 열린 광장이자 광장‘들’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에서 반복되는 만큼 중요하게 제시되는 광장의 감정은 집합 감정으로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죄의식과 수치심이 소멸되는 속물화와 연결된다. 타인이나 세계가 자신을 침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방어 기제로서, 최대한 무심해지면서 자신의 껍데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에만 몰두하는 개인들이 사회의 공공선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시대적 사건은 IMF이다. “식민지 경험, 한국전쟁,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강제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211)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나 강남역 살인 사건 등, “개인의 이기적 영토 바깥을 꿈꾸는 공공적 상상력”(286)이 요청되는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니 공공성을 다시금 사유하고 질문해야 할 시점에서, 이는 앞서 말한 시대감정이자 집합감정으로서 수치심의 회복을 요청하는 것과도 연결될 것이다.


냉소의 바깥은 어떻게 상상되는가. 나는 부끄러움의 회복을 요청해본다. 모든 감정의 발현과 이동이 그러하지만, 특히 부끄러움의 감정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생겨난다. (…) 부끄러움의 권역과 최저선이 언제나 집합감정의 층위 조정의 결과로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해소되지 않는 인정욕망과 갈 곳을 잃은 죄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한 집합적 동의 없이는 부끄러움은 발현될 수 없다. (…) 부끄러움의 회복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감수성 회복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분의 예기치 못한 향배를 이끄는 전환적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35)

‘회복’이라는 단어는 얼핏 원래의 상태를 이상적인 기준으로 두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며 흐름이나 유동성과는 배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때의 감정이나 감수성의 회복을 이상적인 목표나 도달점에 섣불리 두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저자 역시 수치심이 사회적인 순응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감정 자체에 가치 평가를 하거나 위계를 두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흐름과 움직임 속에서 새로움을 상상하는 과정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적인 성공과 생존만을 추구하며 수치를 잃은 ‘자동인형’에서 벗어나 도달할 수 없는/도달하지 않는 광장‘들’에서의 글쓰기를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들끓고 있는 감정들을 계속해서 쓰는 것이다.

광장은 이미 펼쳐져 있다. (집합)감정은 곳곳에 흐르고 있다. 이때의 광장이 저자의 말에 따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색”(397)으로서 포스트 민주화로의 이행과 연결된다면, 무엇을 써야 할까? 다시 광장‘들’로 돌아오는 질문이 이어진다. 이때의 광장‘들’은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446)로서의 질문, 계급과 젠더의 구분과 차별을 무화하는 관계성에 관한 질문이었으면 한다. 실패를 예비하더라도 움직임을 계속해서 쓰고, 감정을 계속해서 번역하는 치열한 작업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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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과 젠더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3년 3월 19일 <대학지성 In&Out>( http://bit.ly/3MoTamE )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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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 마찰, 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움직이는 별자리들 : 잠재성, 운동, 사건, 삶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시론』(김미정 지음, 갈무리, 2019)


정동, 페미니즘, 공통장의 문제의식을 통해 한국문학사의 여러 장면들을 읽어가며 근대적 개인의 신화를 질문에 붙이고, 포스트 개인(post individual)의 사유를 전개한다. 이 책에서 정동적 모먼트로 언급되는 2014년 세월호, 2016~17년 촛불, 2016년 강남역 이후는 모두, 주어진 조건들을 사람들 스스로 전유하고 다른 것으로 만들어가는 장면들이다. 이 책이 문학을 통해 사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안의 잠재성, 사건의 계기들이다.


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까판의 문법』(조정환 지음, 갈무리, 2020)


이 책 『까판의 문법』(그리고 이와 동시에 출간하는 『증언혐오』)은 2019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지 5년이 되는 날에 시작된 증언선 윤지오호의 침몰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1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연구의 결실이다. 이 두 책은 하나의 사건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까판의 문법』은 전 사회적 까판의 논리와 운동 메커니즘을 권력형 성폭력 가해권력이 사용하는 권력 테크놀로지로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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