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맑스의 '빨강'(Red) / 조정환

쟁점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3-01 19:12
조회
772
맑스의 '빨강'(Red)


1. 구 소련이 붉은 색 바탕의 국기를 혁명의 상징으로 사용한 이후로 사회주의 국가들(중국, 베트남, 북한 등등)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건 붉은 색을 국기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20세기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들에서 붉은 색은 크게 바탕과 별로 구분되곤 했다. 붉은 별은 붉은 바탕 위에서 바탕과 구별되며 드러난 형상으로서 당의 지도력을 상징한다. 우리는 별이 ‘지도’의 이름으로 바탕을 압도해 가면서 빨강이 해방이 아니라 억압과 부자유의 상징으로 변해가는 정치적 퇴행현상를, 그래서 “빨강=악마”라는 자본/보수정치가들의 반혁명 프레임이 설득력을 얻어온 역사의 아이러니를 경험했다. 빨강의 색채정치학이 절실한 것은 이 때문이다.

2. 20세기에 목도되는 붉은 색의 정치적 확산이 공산당이 주도하는 소련 국기의 영향이라면, ‘국기’ 이전의 것으로서 붉은 색 깃발의 러시아적 기원이 있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맑스주의’ 당을 표방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붉은 바탕 깃발이다. 1898년에 건설된 이 당은 러시아 최초로 맑스주의 그룹을 표방한 <노동해방>그룹, <노동계급해방투쟁 동맹>을 계승하는 것이었고 그것의 붉은 깃발은 불과 17년 전 프랑스 파리코뮌이 내걸었던 붉은 깃발을 추념하고 계승하는 것이었다.

3. 맑스는 1871년 5월에 파리코뮌 당시 빌 호텔에 내걸려 나부끼던 파리코뮌의 붉은 깃발을 ‘노동 공화국의 상징’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한다. 그해 5월 30일 1871년 프랑스 내전에 대한 국제노동자협의 총평의회에서의 제3차 연설에서였다. 붉은 깃발은 무엇을 상징했는가? 그것은 혁명에 대한 자주적 관리를 상징했다. 그것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지배자들의 오랜 ‘통치’ 특권을 빼앗아 사회에 대한 통치를 대도시 교육위원회 간사 봉급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급료로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낡은 지배체제를 전복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자기지배야말로 맑스가 파리코뮌의 붉은 깃발에서 읽어낸, 아니 그 깃발에 맑스가 새겨넣은 정치적 의미이다. 하나의 ‘주의’로서 맑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1차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투사들이 붉은 바탕의 깃발을 통해 이 세계에 선언하고자 한 것도, 맑스가 붉은 깃발에서 읽어내고 명료하게 밝혀낸 ‘평범한 노동자들의 자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4. 붉은 깃발을 ‘노동 공화국의 상징’으로 명명한 1871년보다 6년 앞서 맑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을 붉은 색이라고 서술했다. 1865년 영국에서 두 딸 제니와 로라의 요구로 작성한 문답인 <고백>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하는데, 여기에는 맑스가 파리코뮌의 붉은 깃발을 노동 공화국의 상징이자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깃발로 인식한 정치적 정동적 근거가 서술되어 있다. 맑스가 ‘가장 좋아하는 덕성’은 ‘단순성’이다. 맑스의 행복의 이념은 ‘투쟁하는 것’이다. 맑스가 생각하는 ‘남자영웅’은 노예해방의 투사 스파르타쿠스와 천문학 혁명가 케플러이다. 맑스가 생각하는 ‘여성영웅’은 자신을 속여온 사회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파우스트>의 그레첸이다. 맑스가 좋아하는 꽃은 명예와 열정의 꽃 다프네이다. 그 반대의 것은 무엇일까? 맑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굴함이다. 맑스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종이다. (맑스가 가장 좋아하는 극작가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작가 아에스킬로스와 세익스피어인 반면) 가장 싫어하는 시인은 시시한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는 영국 시인 마틴 투퍼이다. 맑스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를 자신의 모토로 기록하면서 인간의 것은 무엇이든 모두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맑스에게서 붉음은 무엇보다 단순함을 향한 보편적 의심, 저항, 투쟁과, 그리고 만인에 대한 사랑의 열정과 한 몸을 이룬다. 코뮌이 맑스가 이론적으로 추구해온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형태’였듯이 코뮌의 붉은 깃발은 맑스가 마음 속에 품어온 ‘붉음’이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상징으로서 나부끼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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