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 만보의 두 이미지 문제 / 조정환

톺아보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2:16
조회
764
만보의 두 이미지 문제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예술인간의 탄생』 지은이)


* 편집자 주 : 이 글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2016년 8월 13일 토요일 저녁 7시에 열린 "제1회 톺아보기 ― 유채림 작가의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새움, 2016)는 21세기 수탈적 축적의 전형적 형태인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 지난한 싸움을 벌였고 지금도 그 싸움에 연대하고 있는 유채림 작가가 정원탁의 눈과 몸으로 보고 겪은 역사를 추체험하도록 쓴 자유간접화법의 이야기다. 그 경험의 시간이 식민지, 45년 해방공간, 48년 분단, 50년 전쟁, 60년 혁명과 쿠데타, 그리고 장기개발독재로 이어져온 수난과 해방, 그리고 고통의 역사 전반을 관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특정한 사유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오쿠바를 중심에 놓고 보면 그것은 식민지 시기에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렸던 한 중산층 가족의 위기와 단계적 몰락에 대한 서사이면서 그 과정에 수반된 고통, 혼돈, 좌절, 분노의 정동들에 대한 서사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세 인물 길동, 원탁, 만보는 서로 친구이면서도 은연중에 우, 중도, 좌로 갈라져 갈등해온 근대의 정치적 계급형상들로 기능한다. 정원탁은 길동과 벗하면서도 끊임없이 경쟁하며 그 경쟁에서 패배한다. 길동에 대한 태도가 경쟁적이고 비판적이라면 만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연민과 채무의 감정을 갖는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게 만보였는데도, 왜 만보만 떠올리면 연민이 이는 건지 정녕 모를 일이었다”의 정서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탁이 만보에 대해 공감적이거나 연대적이지는 않다. 나는 여기서 『오쿠바』가 만보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다시 말해 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서 우리의 독서체험을 끌고 가는 정원탁의 감각에 만보가 어떤 이미지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싶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어떤 경계지점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만보의 이야기가 『오쿠바』의 초점이자 경계일 수 있는 이유는 정원탁이 종교(목회)와 예술(사진) 사이에서 혹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동요하지만 목회보다는 사진에, 목사가 될 것을 강요하는 어머니보다 사진을 가르쳐준 아버지에 끌린다는 점 때문이다. 예술은 정원탁의 삶에서 유일하게 해방적인 것으로, 기쁜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마음에 품은 여자친구 영치조차도 주로 사진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날 정도이다. 정원탁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진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려져 주변화되는 것의 실재성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것이다. 백범 장례식에서 정원탁은, 비록 운구행렬 안으로 들어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상두꾼들을 찍는 치열성과 용감성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거대한 정치적 제의적 행사장에서 생존을 위해 떡을 팔고 엿을 파는 사람들을 찍는 것, 장례 자체에서도 주변화되어 있는 사람들(타자)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144) 그러므로 세 주요 인물 중에서 주변화되는 만보가 작중에서 어떻게 이미지화되는지를 살피는 것은 정원탁의 삶의 비전인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시험되는 초점이 될 수 있다.

3. 일본인들과 조선인 상류층을 상대하는 치과의사의 아들로서 성장한 원탁과는 달리 만보는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보따리옷장사를 하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다. 만보네의 일곱 식구는 원탁네의 안방보다 작은 단칸방에서 생활한다(99). 만보는 중학3년 뒤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운전사가 될 것을 꿈꾸면서 공장에 취업하여 삼륜트럭 조수가 된다. <오쿠바>에서 만보의 이미지는 두 가지의 가닥으로 미묘하게 갈라진다. 하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따귀를 맞으면서 지내는 공장생활의 고통 속에서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해야 하며 그래야만 얻어맞지 않을 뿐 아니라 새벽 늦은 밤까지 일할 필요도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나가는 만보이다. 한나절만 일해도 온 가족이 배불리 먹고사는 세상에 대한 믿음은 전쟁을 흥분으로 환영하면서 인민군의 입성과 더불어 공장을 해방구로 받아들이는 행동으로 나타난다.(253) 인민군 환영대회에 참가하고 친구들에게 인민의용군 가입을 권유하고 스스로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하는 만보가 이 가닥의 만보다. 이것은 연대, 투쟁, 해방, 자유, “새 세상”의 만보다. 다른 하나는 생존과 희생의 만보인데 새 세상이 올 때 오더라도 가족을 지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만보다. 이 만보는 유년의 교회(신암교회)에 차려진 자치대에 나가 의용군에 자원입대한다. 그는 조금만 참으면 북조선에서 보내올 양식으로 온 가족이 배불리 먹고살 수 있게 된다는 인민군의 말을 믿고 남부전선으로 배속되어 오른팔을 잃고 돌아와 “후회”(237)하면서 두려움에 떠는 만보다. 그는 간호부 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된 기선을 위원장을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첫 번째 만보와 둘째 만보의 이 간극은 첫 번째의 만보를 거짓 선동에 부화뇌동하고 환상에 사로잡혔다가 깨어나는 것으로 그림으로써 해소된다. 만보의 이러한 현혹, 동요, 환멸, 후회의 이 ‘어리석음’의 이미지는, ‘이북에 삼 년 치 양식이 비축되어 있고 지금 배편으로 양식을 보내니 지금 쌀을 내놓으면 일주일 뒤부터 배곯아 죽은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자치대원들의 선동을 새빨간 거짓말로 받아들이고 산중생활과 마루 밑 생활을 인고하면서 의용군 징집을 피했던 원탁의 ‘명민함’의 이미지와 대비된다.

4. 그렇다면 원탁이 느끼는 만보에 대한 저 연민의 감정은 무엇일까? 원탁은 멀리 수유리 마들평야 벽돌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만보의 동생 만석을 찾아 만보 아버지의 자포자기와 죽음, 봉례의 식모살이, 봉자의 색시촌 생활에 대해 들었고 쌀 한 말을 지워 보낸다. 그리고 긴 망각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만석을 기억해 내, 처가에서 운영하는 대동상회에 취업시킨다. 하지만 원탁은 의용군에 입대하게 된 경위에 대한 만보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나 길동이한테 먼저 물었어야지”라고 말하는 위치에 서 있다. 계급적 존재로서의 만보와 가족적 존재로서의 만보라는 만보의 두 이미지에서 후자의 만보가 전자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전자의 유토피아를 환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정치적 관계(공장동료, 인민)와 친밀성관계(친구)가 길항하는 상황에서 원탁은 친밀성관계의 우위성을 내세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원탁은 만보를 지적으로 계몽하고 이끌 위치에 놓여지며 만보의 혼란과는 달리 명석한 판단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이 연민의 감정구조이다. 타인의 어리석음, 타인의 불행, 타인의 아픔에서 생기는 슬픔의 감정이 연민이기 때문이다. 만보는 불행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며 만보는 어리석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서 생기는 슬픔의 정서가 연민이기 때문이다. 연민은 이 격차와 간극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정서다.

5. 하지만 연민은 처지가 완전히 다른 타인에 대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그 대상이 자신과 어떤 공통성을 갖고 있다고 느낄 때에만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연민을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정의한다. 원탁은 현실적으로 만보와 자신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만 동시에 만보와 자신의 잠재적 공통성을, 만보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의 공통성을 느끼는 점에서 길동과 다르다. 길동은 의용군에 강제징집된 것이 만보의 고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빨갱이’로 적대시하며 도낏자루로 만보를 내리치고 우익단체에 만보를 고발하여 결국 그를 끌려가게 만든다. 하지만 원탁은 길동의 그러한 보복 행동을 저지한다. 그는 구덩이에 던져진 인민군의 주검들 앞에서 그 주검들의 표정과 눈을 읽는다. 주검과 마주하여 그 눈들을 읽는 눈은 이 세상에서 밀려난 그 주검들과 살아 있는 자신의 연결성, 공통성을 찾으려는 노력이며 백범 장례식 때 엿을 팔던 장사들을 담아내려 한 그 카메라의 시선이다. 이미 원탁도 전쟁의 폭력을 경험한 바지만 그에게도 만보가 겪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가혹한 폭력이 찾아온 것은 삼등객실사가 기울고 아들 재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신적 경제적 파산이 찾아온 뒤였다. 열흘 내에 강간살인 사건을 해결하라는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 증인 증거물 사건정황 등 모든 것의 조작과 고문을 통한 자백을 통해 지시기한 내 범인확정, 기소, 재판, 그리고 무기형 판결로 이어진 정치적 사법적 폭력은 『오쿠바』 이야기가 전개되는 뼈대이다. 비록 돈을 빌려 만화가게를 낼 만큼 빈궁해졌지만 여태까지 상대적으로 유복한 삶을 누려온 원탁이 바로 이 사건의 희생자이다. 여기서 원탁의 운명과 만보의 운명은 겹치며 공통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순간에도 원탁이 만보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을까? 연민을 가져다주는 아픔은 타자의 것이어야 하는데 아픔이 자신의 것으로 전화하는 순간에 연민 감정의 체험조건은 사라진다. 연민을 가능케 한 안전장치는 사라졌고 연민의 주체 자신이 직접적 해악의 희생자가 되었다. 연민은 슬픔이었다. 그것은 해법을 찾는 정서라기보다 문제를 감추는 정서다. 연민하는 원탁은 왜 만보가 인민군을 환영하고 자치대에 참여하며 인민의용군에 가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지적 설득은 만보를 해방시키는 지성이 아니라 만보를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과 혼란 속에 빠뜨리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만보의 동료가 될 수 없었다. 곤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민과는 다른 정동이 필요한 순간이며 이 다른 정동의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들, 관계들의 재조명이 필요한 순간이다. 미래조차도 이 정동의 입장에서 조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6. 40년 후 무죄판결을 받은 오쿠바는 그 판결을 신의 은총으로 보는가 라는 여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용기를 잃지 않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답한다. 자신이 이러한 용기를 얻게 된 것이 은총이라면 은총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김재준 목사의 은총이었다는 것이다. 유채림 작가는 어디에선가 고난의 두리반 투쟁에 연대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에서 신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긴 시간 가난과 억압 속에서 살아온 만보로 하여금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용기를 갖게 한 것은 ‘공장동료들’이었고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투쟁에 나선 순간이 오류동에서였다. 그가 자치대와 의용군에 가입하고 전선에 나서게 된 것은 고난받는 인간들이 서로 연대하여 배고픔과 폭압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공장동료들로부터의 저 깨우침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까? 만보에게서 이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의 시간을 계속해서 환상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원탁의 용기, 투쟁, 승리도 환상으로 이미지화될 순간을 맞게 될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까? 『오쿠바』의 사유의 이미지가 봉착한 물음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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