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호] 중력의 임무: 사변적 실재론과 과학소설 / 스티븐 샤비로 『사물들의 우주』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2-01-17 14:58
조회
117
 

중력의 임무: 사변적 실재론과 과학소설

『사물들의 우주』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스티븐 샤비로

안호성 옮김 (『사물들의 우주』 옮긴이)


내 책 『사물들의 우주』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책은 원래 2014년에 영어판으로 출판되었는데, 여기서 나는 사변적 실재론으로 알려진 최근의 철학적 운동의 관심사와 영국/미국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7~1949)가 한 세기 전에 제기한 관심사를 결합합니다.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목적은 주류 서구 사상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는 그들보다 먼저 다른 방식으로 벗어나고자 했던 화이트헤드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철학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관념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철학들은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의 범주와 해석을 부여하는 방식을 지적하지만, 우리가 세계의 사물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떨어져서, 즉 우리가 그것들에 부여하려고 하는 범주들을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그것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더는 인간이 자족적이지 않고 자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이해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서로뿐만 아니라 지구를 같이 공유하는 무수한 (비인간) 존재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광대한 상호연결망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 실제로 오직 그런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연결은 다가오는 기후 재앙의 시대에서 점점 더 취약해지고 미약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종종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다른 존재들을 돌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변적 실재론의 임무 ― 사물에 대한 우리의 투사, 사물에 대한 우리의 범주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환상과는 별도로 사물의 현존에 대한 고양된 감각을 얻는 것 ― 는 시급한 것입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물들의 우주』는 화이트헤드와 현대 미국의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의 텍스트를 포함한 철학적 텍스트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책은 또한 내 대부분의 최근 작업과 마찬가지로 과학소설로 알려진 문학 장르를 활용합니다. 내 책의 제목인 “사물들의 우주”는 영국의 과학소설 작가 귀네스 존스의 단편 소설(그리고 후에는 단편 소설 모음집 전체)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세 편의 소설과 여러 단편으로 이루어진 존스의 『알루티안』 시리즈(1991~1997)의 일부인데, 거기서 지구는 기술적으로 진보된 외계인 무리에 의해 식민지화됩니다. 이 외계인 무리는 다소 임의로 “알루티안”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그들이 인간 존재를 대하는 방식은 19세기와 20세기에 서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다른 대륙에서 마주친(그리고 정복한) 비-백인 사람들을 대했던 것과 거의 같습니다. 이것은 사실 과학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유인데, 그것은 적어도 1897년 H. G. 웰스의 『우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귀네스 존스는 젠더, 인종, 식민주의의 존속성, 윤리와 정치, 기술과 사회 변화의 관계에 관해 탐구적인 질문을 품도록 이 비유를 재작업하고 다시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특히 귀네스 존스의 이야기 「사물들의 우주」는 외계인의 생활세계가 인간의 생활세계와 어떻게 다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외계인은 모든 것이 얽혀 있고 반응하는 “살아있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다소 살아 있습니다. 이야기의 인간 주인공은 이 살아있는 세계에 노출되고 깊이 혼란스러워합니다. 그가 작업에 사용하는 도구는 더는 비활성 객체가 아닙니다. 대신, 도구가 살아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맥동하고 변태하며, 그 자체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인공에게 이 경험은 완전히 끔찍합니다. 그것은 정말 안 좋은 LSD 환각 체험의 악몽 같은 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 단편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소설은 우리 인간 존재가 얼마나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를 가진 편협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의 중심이며, 세계의 다른 모든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의심의 여지 없이 가정합니다. 우리는 사물이 우리와는 독립해서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 양태와 고유한 필요, 욕망, 예상을 가지고 존재하는 많은 방식을 무시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적어도 순간적으로 자신의 선입관이 틀렸다는 것과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학문에서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 하늘과 땅에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배우기 쉽거나 위안이 되는 교훈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이야기는 다른 한편으로 외계인 침략자에 관해서 동등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무언가를 말합니다. 알루티안이 완전한 “살아있는 세계”에 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만든 모든 것과 그들이 상호작용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의 DNA를 엔지니어링하여 만들어낸 그들 자신의 배출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계인에게 “분리된 창조, 자신의 것이 아닌 생명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고향 행성에서 “살금살금 기어 다니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날아다니는” 살아있는 존재들조차 사실은 그들 자신이 자신의 물질로 만들어낸 객체입니다. 알루티안은 우리의 인간중심주의가 실제로 참이라면 우리가 어떨지를 체화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는데,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에 종속되고 모든 것이 자신의 반영인 세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척도에 맞지 않는 타자성의 사례를 ― 우리가 반드시 그러하듯 ― 조우할 때마다 교란됩니다. 그러나 알루티안들은 실제로 그들 자신이 고안한 세계, 즉 타자성이 전혀 없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개척자로서 성공한 원인입니다. 그들은 그들로서는 악의 없이, 자신이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인간 존재를 강간하고 살해하고, 아니면 파괴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귀네스 존스의 단편 소설은 우리가 당연하게-여기는 인간 예외주의가 얼마나 해롭고 망상적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결코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용하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 결과는 생태적 재앙입니다. 더욱이 이야기는 이러한 통찰을 논증을 제공하는 것으로 진리치를 얻는 철학적 명제로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인간과 알루티안의 차이를 상정하는 것을 서사의 출발점으로 두고 이 차이의 귀결을 살펴봄으로써 작동합니다. 외계인의 순수한 타자성과 조우하면서 자신의 한계와 점차 마주하게 되는 인간 주인공은 복잡한 감정의 혼합을 경험합니다. 그는 외계인의 요구에 대응하는 자신의 한정된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마찬가지로, 그리고 더 강력하게, 수치심, 외로움, 패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반적으로 그가 외계인이 성취한 것에 필적할 수 없다는 것과 외계인이 거주하는 세계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세계가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경이를 붙잡고자 손을 뻗었지만, 공허한 느낌보다 더 나쁜 것이 돌아올 뿐이었다 … 그것은 자궁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는 것만큼 즐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존스의 이야기는 내가 다른 곳에서 우화의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당연한-것으로-받아들이는 전제에 도전하는 시나리오를 소설적으로 구축하는 것의 한 가지 사례를 제공합니다. 우화는 극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우리를 우리의 한계 너머로 밀어내고,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조건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문학 이론가 모스 페컴의 말을 빌리자면, 우화는 “상황에 대한 모든 범주를 조직하는 데 사용하는 지각 모델과 고유한 상황이 제공하는 실제 데이터 사이의 불일치”를 다루기 위해 작동합니다. 이런 방식에서 과학소설적 우화는 프랑스의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가 거대한 외부라고 부르는 것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귀네스 존스는 초기의 사변적 문학 작품, 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가 1816년에 쓴 시 「몽블랑」에서 자신의 단편 소설의 제목을 따왔습니다. 「몽블랑」에서 셸리는 작품명에 해당하는 알프스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이 조우를 통해 인간의 상상과 그에 대항하여 펼쳐지는 자연의 숭고한 힘 사이의 관계에 관해 사변합니다. 「몽블랑」은 어떻게 “영속하는 사물들의 우주/ 맘속 파고들어” 가는지 묻고, 반대로 어떻게 “분리된” 인간 정신이 다음을 수행하는지 묻습니다. “휘몰아치는 영향들 지금 번역하고 받아들이니,/ 끈질기게 교류하네/ 나를 둘러싼 청명한 사물들의 우주와 함께.” 시는 복잡하고 셸리의 인식론적 사변은 쉽게 요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18세기 철학자 흄과 칸트의 사상에 뿌리를 둔 것 같습니다. 이 두 사상가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표상이 어떻게 우리가 지각, 상상, 혹은 기억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외부 사물 자체와 관련되는지를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나 셸리가 이러한 철학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셸리는 그들의 개념을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인식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셸리의 시적 관심은 인식론적이고 합리적이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존재론적이고 정동적입니다. 우리가 「몽블랑」을 주의 깊게 읽을 때, 우리는 셸리가 흄, 칸트, 그리고 그 외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정신이 관념, 인상, 혹은 표상을 포함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정신을 통해 실제로 흐르는 것은 “사물들의 우주” 그 자체 ― 단순히 파생적인 정신적 표상과 인상의 연쇄가 아니라 ―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서양 철학의 관점에서 이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셸리는 흄과 칸트가 제기한 인식론적 질문에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인식론을 완전히 회피합니다. 그는 정신적 표상에 대한 철학적 기계 전체를 단락시키고, 그리하여 정신의 내적 표상이 외적 실재와 상응하는지의 여부에 관한 질문 자체를 버립니다. 셸리의 낭만주의적 우주론은 인상과 표상보다는 권력과 힘에 의존합니다. 정신과 신체 모두에 대해 셸리는 유사성의 정도에 관한 질문보다는 “교섭”의 과정에 관해 말합니다. 어떤 것을 지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 정신 속에서 어느 정도 정확하게 표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정신적 그리고/또는 물리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뜬 태양이 나에게 그 찬란함을 새기고 활력을 불어넣는다면, 혹은 영화가 나를 울게 만든다면, 이것은 표상의 문제도, 구시대 경험론자들이 관념의 연합이라고 부른 것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혹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는 어떤 것에 의해 만져지고 변화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지각의 관점에서 기술되지 않는 조우가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그 조우는 현재 순간의 내 의식적 깨달음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설령 영향을 받은 귀결이 숨겨지거나 지연되더라도, 무언가가 나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지극히-관련성이-높은 현대적 예시를 들자면,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그들은 실제 감염 순간에 그들의 체계로 진입하는 바이러스를 식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물론 바이러스 자체가 너무 작아서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들이 바이러스가 그들의 면역 체계, 폐, 호흡기관, 그리고 전반적인 신체적 웰빙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통해 바이러스를 지각 ― 최소한 소급적으로 ― 한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더 있습니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와 그 바이러스가 감염시키는 사람이 모두 동등하게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바이러스는 어느 시점에 야생 동물 개체군에서 인간 숙주로 넘어왔습니다 ― 그리고 그로부터 세계의 다른 수많은 사람에게 전파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번의 돌연변이를 일으켰습니다. 농업, 심지어는 도시 개발을 위한 토지개간으로 인한 야생 서식지의 지속적인 파괴는 바이러스가 박쥐에서 너구리(Nyctereutes procyonoides)로, 그리고 이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도약을 촉진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전염병은 자연의 복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물을 보는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방식이 아닐까요? 우리의 행위가 환경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 때때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에도 불구하고 ― 정확히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으며 자연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드백, 공명, 상호 함의의 복잡한 자연 순환 내에서만 존재하며, 그리고 그 순환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치 우리가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장내 박테리아가 자연의 일부인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에서 우리 자신은 자연의 일부이고, 우리의 기술적 생산물도 여전히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비록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를 돕기보다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만, 그것 또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일부입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듯이,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자연과 우리가 함께 가라앉거나 함께 나아가는 한배에 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자세하게는, 셸리의 「몽블랑」에 대한 그의 논평 과정에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현실적 요소들은 그것들 자체로 공통 세계의 요소이며, 이 세계는 분명 우리의 여러 인식 행위를 포함하지만, 그런데도 인식 행위를 초월한 여러 사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경험된 사물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의존성이 있다면, 사물들인식을 위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경험된 현실적 사물들이 지식을 포함하지만, 지식을 초월하는 공통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물들의 중심에 있지도 않습니다. 흄과 칸트 이후의 서양철학은 인식론적 질문에 사로잡혀 왔지만, 서양철학에서의 화이트헤드를 비롯한 낭만주의 작가들과 그 후계자들은 존재론적이고 정동적인 질문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관해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속해 있기도 한 그 세계의 사물들에 의해 우리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다른 사물들을 어떻게 느끼는가? 우리는 그러한 사물들에 관해 무엇을 느끼는가? 그러한 사물들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러한 사물들은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을 변화시키는가?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이 동등하게 자연의 일부라면, 이것은 물리학에 대해 무엇을 함의하는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문화를, 세계의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 인간을 상충시킬 수 없다면, 시, 문학, 그리고 인간 창조성의 다른 양상이 가진 관심과 물리학의 관심 사이에는 더 이상 명확한 경계를 그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많은 시인과 철학자는 지난 2세기 동안 소위 ‘경성’과학의 헤게모니와 그것이 전통적인 인문학적 관심을 잠식하는 것을 두려워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셸리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는 과학이 무지개의 “재료”와 그것의 “질감”을 수량화하고 목록화하여 무지개를 “공통적인 것들에 대한 따분한 목록”으로 전락시키면서 “무지개를 낱낱이 분해”하는 과학의 힘에 탄식합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시작으로 많은 20세기 사상가는 비슷하게 물리학이 순수하게 계산적이고 도구화된 사업이라는 이유로 물리학을 비난합니다. 울타리 반대편에서 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적어도 일부 과학보급자들은 지난 2세기 동안의 과학적 발견이 철학과 예술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었다고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 논쟁의 양측은 물리학이 환원주의적이고 디플레이션적이며, (막스 베버가 주장한 것처럼) 세계를 탈주술화했다는 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 물론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셸리는 이 이진법의 어느 쪽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는 베버의 탈주술화 테제를 선구적으로 거부합니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했듯이 셸리는 “〔과학을〕 사랑했고 그것이 시사하는 사고를 시로 표현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심지어 다른 시간선에서 셸리야말로 “화학자들의 뉴턴”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과대하게 시사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놀라우리만큼 과학소설적인 제안입니다). 셸리에게 과학은 해방적이면서 동시에 계시적입니다. 그가 「몽블랑」에서 썼듯이 자연에 대한 연구는 “거짓되고 비통한 거대한 법전을 폐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경이를 흐리게 하기보다는 훨씬 더 많이 드러냅니다. 과학적 발명과 발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셸리는 20세기와 21세기의 과학소설을 특징짓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을 예측합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이 너무 자주 “단순한 물질의 헐벗은 무가치함에 대한 가정”을 채택하여 “환경의 본질적인 가치를 무시”한다고 우려합니다. 그러나 과학은 물질의 생생함과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숨 쉬는 환경의 본질적인 가치를 더 깊이 인식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최고에 있어서 과학적 객관성은 사물들의 우주를 인간의 목적과 의도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비인간적 존재들이 자신을 증언할 수 있게 합니다. 정확히 과학이 사물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을 때,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자연은 자신의 미적 가치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벨기에의 과학철학자 이사벨 스텡거는 작업하는 과학자들이 실제로 하는 작업과 특정 철학자, 심지어는 과학자 자신이 때때로 자신들이 하는 작업의 의미와 중요성을 기술하는 방식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과학적 연구의 실제 결과는 종종 그 연구의 기초가 될 것이라 추정되는 근거와 불화를 일으킵니다. 감수성이 생명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의 증거를 고려해 보십시오. 식물학자 프란티세크 발루스카와 심리학자 아서 레버가 말했듯이


감수성은 생명의 고유한 특징이다 … 적응적인 모든 기능하는 유기체는 처음부터 감각적이고 의식적이어야 하며, 존재론적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생물학자들은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생명을 목표와 의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들은 유기체의 비-무작위적이고 목적적인 요소가 자신의 목적을 가진 외부의 초월적 창조자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반다윈주의적이고 창조론적인 “설계론적 논증”을 정당하게 피하고자 합니다. 다윈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창조자 없이 유용한 적응이 어떻게 내재적으로 일어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 그 자체는 목적이 없고 목적적으로 창조되지 않았어도, 특정 유기체(혹은 유기체 집단) 자체가 목표, 목적, 의도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체가 감각 정보를 수용하고 처리하며, 이 정보를 사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지에 관해 스스로 결단하는 점점 더 많은 방식을 계속해서 발견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결단은 정형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기보다는 유연하고 가변적입니다. 박테리아와 고세균(핵 없는 단세포)을 거쳐 인간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있기 위해 힘쓰는 것 ―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고 부르는 것 ― 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번영을 향상하고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이러한 모든 다른 살아있는 체계의 필요와 욕망을 우리 자신의 체계와 조화시키는 방법입니다. 명백하게 그것들 사이에 “예정조화”(라이프니츠)란 없습니다. 균형, 상호 조정, 그리고 환경 피드백 메커니즘은 먼저 사건이 있고 난 후에만 확립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석 기록에서 발견되는 5가지 대멸종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과정들 자체는 매우 잘못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활동들이 또 다른 대멸종 사건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여섯 번째 대멸종 사건을 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과학소설 작가 칼 슈뢰더는 그의 최근 소설 『세계 훔치기』(2019)에서 이 질문을 다룹니다. 슈뢰더는 자연적 존재들 ― 물론 나무와 다른 유기체를 포함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는 숲과 강과 같은 살아있는 요소와 살아있지 않은 요소로 구성된 회집체 ― 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번역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를 마음에 그립니다. 이것은 다양한 계산 기술의 적용을 통해 달성됩니다. 환경 감각기가 숲이나 그 외 자연 지역에 널리 배포됩니다. 그런 다음 AI(인공 지능)는 이러한 감각기에 수신된 데이터를 취합하고 환경의 상호관계 과정들을 도표화합니다. 예를 들어 AI는 “나무들을 연결하는 곰팡이 네트워크에 의해 물이 이동하는” 방식과 곰팡이 네트워크가 “영양소를 교환하고” 동식물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식을 도표화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경험하고 번역하는 AI는 봉납물(deodand)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납물은 영미법에서 유래한 고대 용어로, 자신의 책임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비인간 객체를 가리킵니다. 비록 이러한 기술 체계는 인간 기술의 산물이지만, 인간이 부여한 목표를 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봉납물들은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 그들 각기는 그것이 생태계나 지구물리학적 과정처럼 특정한 비인간 이해관계자라고 생각한다. 분수령, 숲, 고래 무리 모두가 자신을 대신하는 봉납물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는 대기조차도 … 봉납물이 원하는 것은 … 존속하는 것. 그들은 균형을 원한다. 그들은 그들 안에 거주하는 모든 작은 사물들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봉납물을 구상하면서 슈뢰더는 오늘날 세계의 실제 발전에서 외삽합니다. 뉴질랜드와 에콰도르를 포함한 여러 국가는 실제로 이미 강, 숲, 그리고 그 외 자연 체계에 법적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제니퍼 가브리스가 길게 문서화한 것처럼, 환경 감지 장치를 통해 우리는 우리와 불가피하게 환경을 공유하는 많은 비인간 행위자의 움직임과 필요를 전례 없이 많이 고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슈뢰더의 소설은 이러한 이미-존재하는 실천의 더 많은 잠재력과 그것이 우리의 인간중심주의적 편견을 벌충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합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애초에 봉납물을 창조하는 방법이 아니라 인간 행위자가 강제로 봉납물을 고려하게 하고 탐욕스러운 자본주의가 다른 여러 기술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봉납물을 선점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설의 전반적인 서사에 생기를 불어넣는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슈뢰더의 소설은 일종의 사고 실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점과 매우 다르지만, 모두가 공통 세계에 끼어 있는 만큼 인간의 관점과 나란히 존재하는 관점을 표현하고 탐구하기 위해 작동합니다. 이러한 부류의 탐구가 과학소설의 진정한 임무입니다. 사실, 과학소설이라는 용어의 현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최초의 과학소설은 종종 메리 셸리(퍼시 셸리의 아내)가 쓴 『프랑켄슈타인』(1818)으로 간주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소설이 쓰였을 당시에 유행했던 고딕 문채를 더 근대 사회적, 기술적 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프랑켄슈타인』을 타자성과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여러 과학소설 작품 중 첫 번째로 만드는 요인입니다. 자신의 창조자에게 잔혹하게 버림받은 외로운 괴물을 묘사하는 이 소설은 자연과 문화의 경계, 인간의 동정심이 가진 범위와 한계, 감각적이고 심지어는 교양도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사변적 실재론이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딜레마로 돌아가게 하며, 『사물들의 우주』에서 나는 이 딜레마와 씨름합니다. 거대한 외부를 탐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이런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조우하는 모든 것에 우리의 상습적인 전제들을 투사하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이탈이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의 근본적 가정들 ― 즉 우리의 편견들 ― 을 여전히 끌고 가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거리를 제공하지만, 그러한 객관성은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 객관성이 사물을 인간의 부여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올바르게 구상한다는 것과 과학적 존재론이 유효할 수 없다는 것 양쪽을 이상한 방식으로 모두 주장하는 퀑탱 메이야수의 논란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는 토머스 네이글이 과학적인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보는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채택하거나, 모든 곳에서 보는 변증법적 관점에서 겉보기에 모순되는 관점들을 초월한다고 주장할 때 거대한 외부와 조우하는 데 동등하게 실패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존재들이 우리의 관점과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의 것만큼 특수하고 제한적인 자신의 관점을 가지는 방식을 어떻게든 포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변적 실재론과 과학소설은 모두 우리에게 의식의 혁명을 위해 행동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상상적인 대담함(가장 비직관적이고 비인간적인 관점을 표현하고 그것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과 인식론적 겸허함(우리가 우발적으로 상상하는 것에 과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도록)을 결합해야 합니다. 요점은 우리의 지식 축적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도 없는 세계에 대한 견해와 더 깊이 접촉하는 것입니다. 또는 더 나은 방법으로서, 우리는 다른 존재들로부터 유래하는 이러한 다른 관점이 우리가 깨달을 틈도 없이 어떻게 이미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은 물리학자들이 암흑 물질과 관련하여 기술하는 것과 조금 비슷합니다. 암흑 물질은 설령 우리가 그것의 중력에 의해 영향을 받더라도 우리가 찾거나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추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소설은 일반적으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이감”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다코 서빈이 만든 용어를 사용하자면) “인지적 소외”(cognitive estrangement)의 경험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비록 나는 이 용어를 서빈이 의도한 것과는 다소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사변적 실재론이 요구하고 과학소설이 가장 잘 수행하는 변위(displacement)를 기술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과학소설에 관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부 20세기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작업이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목적이 “초기의 과잉된 자신의 주관성을 의식한 후 수행하는 자기-교정”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는 자신의 연구가 가지는 가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것,” 그 결과 “아는 자가 자기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씁니다.


과학소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변위를 생산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조건과 완전히 다른 물리적 조건에서의 삶을 상상하는 할 클레멘트(Hal Clement)의 소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소설 『중력의 임무』(1954)는 메탄 대기가 대부분이고 중력이 지구의 몇 배인 거대한 행성의 지능적 생명체를 상상합니다.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수 버크의 『세미오시스 이부작』(2018~2019)은 가장 지능적인 생명체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라는 것이 밝혀진 외계 행성에서의 인간 식민지 개척자를 묘사합니다. 이 소설의 인간 등장인물들은 식물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행성에 온 인간을 자신의 “장애 식물 보조 동물”로서 여긴다는 것을 여러 세대에 걸쳐 이해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과학소설 작가 캔 멕클라우드의 『기업 전쟁 삼부작』(2016~2017)에서 우리는 사변적 실재론이 요구하는 변위의 과정 전체에 대한 우화 같은 것을 봅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가속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사회가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체제로 넘어가고 인류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자본주의를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발전시키려는 활동가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가속주의는 21세기 초의 사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풍조이며, 이전에 나는 이것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풍조에 대한 멕클라우드의 과학소설적 외삽은 21세기 후반에 이 풍조가 보다 조직적인 정치 운동이 되는 것으로 상상합니다. 삼부작의 배경 이야기에 따르면 21세기 후반에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 가속주의자들은 파시스트 반군을 물리치기 위해 신자유주의 국가 및 기업과 힘을 합칩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이 일단 패배하자,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은 가속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도 근절합니다. 자본주의의 분열적 경향을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정도로 밀어붙인다는 생각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활동가들은 모두 살해되고 그들의 정신 패턴은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됩니다.


소설은 수천 년 후를 다룹니다. 디지털로 보존된 죽은 가속주의 전사들의 정신이 되살아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시뮬레이션이 포함된 컴퓨터는 이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항성계에 있습니다. 거대한 신자유주의적 기업은 이 항성계의 행성들과 위성들을 채광과 다른 형태의 자원 추출,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거주를 위해 조정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작업은 지능적 로봇들이 했습니다. 그러나 로봇들은 주기적으로 자의식을 갖게 되며, 그 시점에서 그들은 더 이상 노예로 일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치권을 요구합니다. 오래된 지구의 전사들은 주기적으로 기계 신체에 다운로드되어 반란군 로봇과 싸우기 위해 파견됩니다. 그러나 가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기업 주인과 협력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대신 가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기계 신체에 남아 자유로운 로봇들과 항성계의 어떤 행성에 거주하는 토착 생명체와 동맹을 맺습니다.


『기업 전쟁』은 영어로 거의 300,000단어에 달하는 조밀하고 복잡한 서사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소설의 작은 가닥 하나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한 가닥을 통해 이 책을 사변적 실재론적 우화로서 봅니다. 소설에서 가속주의자들은 21세기에 완전한 인간의 자기통제를 요구하고, 생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인간이 만든 사회적 관습과 전통의 모든 제약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프로메테우스적 슬로건은 “자연에 대항하는 연대성”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 완전히 기술적인 존재가 되어 실제로 생물학과 생리학의 한계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대항하는” 투쟁과 완전히 자기-결정적인 인류를 위한 투쟁은 재앙적인 막다른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조우한 비인간 행위자들, 즉 자의식을 가진 로봇 및 외계 생명체와 동맹을 맺어야만 자신들이 번창할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다른 감수성들은 모든 것에 서로 동의하지는 않으며, 실제로 종종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모두 대항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진정으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시리즈의 마지막 소설의 결말은 모든 것을 열어 둡니다. 양립도 유토피아도 없습니다. 가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이전과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 다름이 사변적 실재론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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