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호](연재) 종합적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니체와 윤리학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20:30
조회
680
니체와 윤리학

김상범


1.

니체에게 있어서 윤리학은 가능한가?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자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선악의 너머에 서라-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환상은 짓밟아 버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나에 의하여 최초로 정식화된 하나의 통찰에서 비롯한다. 즉 도덕적 사실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그 통찰 말이다. 도덕이란 특정한 현상에 대한 해석,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하나의 그릇된 해석에 불과하다."(<우상의 황혼>'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1)

니체는 실제로 절대적 도덕이란 없고,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도덕이 사실은 하나의 해석체계이자 권력의지의 표현에 불과함을 여러 저서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철학자들은 이러한 절대적 도덕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이러한 절대적 도덕을 위한 합리적인 기초를 제공하려고 노력했지만, 니체는 자신이 비로소 이러한 절대적이라고 가정되는 도덕 자체를 문제 삼았다고 말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도덕학>에는 한 가지가 결여되거 있었니 그것은 바로 도덕 그 자체의 문제였다."(<선악을 넘어서> §186)

또한 니체는 자신이 '가치의 가치'를 측정함으로써 이러한 절대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도덕의 '조건'들을 탐구하고 절대적 도덕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고 <도덕의 계보학>에서 밝히고 있다.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서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을까? 그리고 그러한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그것이 지금까지 인간의 번성을 저지했을까, 아니면 촉진했을까? 그것이 삶의 위가와 빈곤, 퇴화의 징조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 속에서 삶의 충만, 힘, 의지가, 삶의 용기와 확신과 미래가 드러나는 것인가? 그 문제에 관해 나는 여러 가지 해답을 찾아보았고, 나에게서 그 해답을 찾고자 과감히 시도해보았다." (<도덕의 계보학> 머리말 §3)

이처럼 도덕학자로서의 니체는 도덕보다 그것에서 표현되는 힘과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도덕주의자이다. 그러나 니체는 도덕이 이러한 도덕 속에 표현된 힘과 의지를 쉽게 읽을 수 있는 징후 언어로서는 유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징후학으로서는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적어도 식자들에게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했던 여러 문화나 내면세계에 대한 가장 귀중한 실상을 드러내 준다. 도덕은 징후언어에 불과하며, 징후학에 불과하다. 도덕에서 무언가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우상의 황혼>,'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1)

니체의 이러한 '징후학적 탐구'의 결과, 니체는 역사 속에서 두 개의 도덕이 서로 상반되는 힘과 의지에 의해 작동하고 있음을 <도덕의 계보학>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이다. 여기서 '주인'은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를, '노예'는 반응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주인의 도덕>에서는 자신의 힘 상승의 느낌이냐 아니면 힘 하강의 느낌이냐에 따라서 '좋음'과 '나쁨'이 결정되고, <노예의 도덕>에서는 '무리짐승'의 본능에 영합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선'과 '악'이 결정된다. 여기서 <주인의 도덕>은 상대적인 반면에 <노예의 도덕>은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니체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통해서 자신이 지향하는 도덕이 <주인의 도덕>이며, 이러한 <주인의 도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밑에서 '선'과 '악'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좋음'과 '나쁨'으로 읽혀야 한다.)

"선이란 무엇인가?-힘의 느낌,.., 힘 자체를 인간 안에서 강화시키는 모든 것.

악이란 무엇닌가?-허약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힘이 증가한다는 느낌-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만족이 아니고 더강한 힘을, 평온이 아니고 싸움을, 덕이 아니고 유능(르네상스 식의 덕, virtu, 가혹한 도덕에서 벗어난 덕)"을 추구할 것."(<안티크리스트>§2)

"<덕>이니, <의무>니, <선 자체>니 하는 것들, 그 비개인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은-환영에 불과하며, 쇠퇴와, 삶의 완전한 소진과, 쾨니히스베르그적인 중국주의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보존과 성장의 가장 심오한 법칙들은 그 반대의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 나름의 덕을, 자기 나름의 정언적 명령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안티크리스트> §11)

그러나 여기서 니체의 윤리학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니체의 윤리학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그것은 새로운 주체의 생산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초인'의 탄생을 원한다. 니체의 윤리학은 '선'과 '악'을 넘어선 윤리학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윤리학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 심연 위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이 하나의 다리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의 과정이며 몰락이라는 데 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1)

그렇다면 ‘초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생성되는가? 앞서 우리는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영원회귀’에 대해 다루었는데, '영원회귀'의 두 번째 의미, 즉 '선택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영원회귀‘에 대해 알아야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먼저 이러한 '영원회귀는 다음과 같은 정식으로 나타내어질 수 있다.

"네가 의욕하는 것, 그것을 네가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원하라."(<니체와 철학>,p.132)

이러한 영원회귀의 선택을 통해서 "작은 보상들, 작은 기쁨들, 사람들이 한 번, 단 한 번만 스스로에게 동의하는 모든 것"(<니체와 철학>,p.133)은 제거된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러한 영원회귀의 첫 번째 선택에서 반응적인 힘이 제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같은 선택은 차라투스트라의 야심보다는 열등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가장 발전하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 몇몇 반응적 상태, 반응적 힘들의 몇몇 상태를 제거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자기식으로...,허무주의적 의지 속에서 강력한 동력을 발견하는 반응적 힘들은 최초의 선택에 저항한다."(<니체와 철학>,p.133)

그런데 들뢰즈에 의하면 이러한 반응적인 힘들은 영원회귀의 두 번째 선택에서 제거된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일까?

<니체와 정치학> 보론의 '허무주의에 대하여'로 돌아가보면, 부정적 의지로서의 무의 의지와 반응적인 힘들 사이에서의 동맹은 '부정적 허무주의'에서 나타나지만, '반응적 허무주의'에 이르러 깨지게 되는데, 여기서 '무의 의지'가 '반응적인 힘'들을 공격하고 파괴하게 됨으로써 반응적인 힘들이 끊임없이 제거되는 과정이 반복되고 "무의 의지를 영원회귀와 비교해보면" 이러한 과정은 영원회귀라고 볼 수 있으며, 영원회귀의 두 번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반응적인 힘들은 제거된다.

이처럼 영원회귀를 통해서 무의 의지에 의해 반응적인 힘들조차도 부정되게 됨으로써 허무주의는 극단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허무주의를 완전한 허무주의로 만드는 것은 바로 영원회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을 반응적 힘들 자체의 부정으로 만들기 때문이다."(<니체와 철학>,p.135)

그리고 이런 부정을 통해 반응적인 것들과 반응적인 인간들은 파괴된다. 그리고 이런 파괴는 더 이상 반응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 파괴요 적극적 활동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 속에서 부정적 의지는 긍정으로, 적극적 생성의 긍정으로 전환된다.

"사실상 부정은 스스로 반응적 힘들 자체의 부정이 될 때 적극적이 될 뿐만 아니라, 전환되는 것 같다. 그것은 긍정을 표현하고, 적극적 생성을 긍정하는 힘으로 표현한다."(<니체와 철학>,p.136)

"...영원회귀 안에서 두 번째 선택은 영원회귀가 적극적 생성을 낳는다는 데 있다....반응적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보잘것없고, 하잘것없는, 반응적 인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회귀에 의해서, 그것 속에서 권력의지의 성질로서 부정은 긍정으로 전환되고, 부정 자체의 긍정이 되고, 긍정하는 힘, 긍정의 힘이 된다."

이렇게 영원회귀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반응적인 사회적 힘1)들을 제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배하게 되고, 명령하게 되는 자들을 니체는 '초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초인은 긍정하는 자이며, 부정은 이러한 긍정을 위한 수단일 뿐인 자이다. 그리고 이들은 긍정적인 권력의지 속에서 적극적인 힘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니체가 경멸하는 '무리동물'은 이러한 영원회귀 속에서 반응적인 힘을 제거하지 못하고 자기-파괴를 하지 못함으로써, 초인으로서 거듭나지 못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부정적 의지를 긍정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원한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3.

이처럼 니체의 윤리학은 '선'과 '악'을 넘어선 윤리학이며, 동시에 인간을 넘어선 윤리학이기도 하다. 허무주의의 급진화로서 영원회귀는 끊임없이 반응적 힘을 파괴함으로써 부정의 권력의지가 긍정이 되게 하고, 힘들의 적극적 생성이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비도덕주의적, 비인간적 윤리학은 인간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원회귀에 의한 선택은 사회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문화'에 의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산물로서 주권적 개인을 실현시키는 것은 바로 초인이다. 니체는 이러한 주권적 개인, 혹은 초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엄청난 과정의 끝에서 본다면, 즉 나무가 마침내 열매를 익게 하고, 인간 공동체와 그 풍습의 윤리가 무엇인가를 하려는 수단에 불과했음을 마침내 드러나는 지점에서 본다면 그 나무에 가장 잘 익은 과일로서의 주권적 개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제 2논문 §2)

1) 여기서 '사회적 힘'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모순 없이 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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