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호]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서평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10:03
조회
1435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문학과 지성사, 1996) 읽기

김상범


1.

베르그송은 우리에게 마치 이원론자인 듯이 다가온다. 베르그송의 텍스트를 피상적으로 읽기에, 베르그송은 ‘정도상의 차이’ 혹은 ‘공간적인 것’을 배격하고 ‘본성상의 차이’ 혹은 ‘시간적인 것’에 집착하는 광기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의 이원론의 다양한 변주들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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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여러 가지 이원론은 유명하다: 공간-지속, 양-질, 등질성-다질성, 불연속-연속, 두 가지 다양성, 물질-기억, 지각-회상, 팽창-수축, 지성-본능, 두 원천등등”(p.22)

그러나 ‘공간적인 것’ 혹은 ‘물질’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다. 베르그송의 이원론은 두 항 중에서 하나를 배격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대는 차이이지만, 차이는 정도상의 차이와 본성상의 차이라는 두 표정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들 사이에 단순한 정도상의 차이를 파악할 때, 과학 그 자체가 세계를 이 측면에서 보게끔 우리를 초대할 때, 우리는 여전히 절대 안에 있다.”(pp43~44)

다만 베르그송은 ‘공간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거나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고 하는 광기를 ‘허구’라고 부르며 배격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시간의 공간으로의 흡수는 거리의 불변성을 표현하기 위해 필수적이었고, 그래서 그 흡수는...실제적인 구별을 더 이상 유지시켜주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상대성’이론은...베르그송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p.121)

그리고 베르그송 텍스트에서의 이원론은 전통형이상학의 이원론과는 많이 다르다. 전통형이상학에서의 이원론은 차안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의 대립을 바탕으로, 경험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를 초월하여 초월적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이원론은 이러한 초월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이원론이고, 정확히 말해서 스피노자적 용어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이원론, 베르그송-들뢰즈의 용어에 의하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이원론이라고 볼 수 있다. 베르그송의 이원론 속에서 ‘시간적인 것’을 ‘공간적인 것’보다 우위에 놓는 가치의 위계는 이러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중에서 잠재적인 것의 우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이원론은 사실상의 일원론이라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속은 단지 물질의 가장 수축된 정도일 뿐이며, 물질은 지속의 가장 팽창된 정도이다....모든 정도들은 동일한 ‘본성’[자연] 속에 공존하는데, 그 ‘본성’[자연]은 한편으로는 본성상의 차이들 속에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도상의 차이들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일원론의 계기이다.”(p.129)

이러한 베르그송의 일원론은 결국 우주적 일원론으로 발전되는데, 들뢰즈는 이에 대해 “하나이고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 유일한 ‘시간’. 간단히 말해, ‘시간’의 일원론......”(p.108)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순수지속, 순수잠재성으로서의, 보편적이고 ‘유일한’ 시간은 끊임없이 나뉘어지면서 질이 변화하는 즉 ‘변질’되는 ‘다양성’으로서의 시간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잠재적 다양성은 단일한 시간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 다양성으로서의 지속 또한 그 유일하고 동일한 ‘시간’이라는 것이다.”(p.115)

잠재성으로서의 지속은 이와 같이 ‘다양성’ 즉 ‘차이’를 생산해내는데, 이러한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시간은 그 자체로 실재이다. 우리는 ‘잠재성’과 ‘가능성’을 구분해야 하는데,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을 닮지 않았고, ‘잠재적인 것’역시 ‘현실적인 것’을 닮지 않았지만, ‘가능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 자신을 닮도록 강요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현실적인 것’을 닮은 것이 바로 ‘가능적인 것’이다. 또한 ‘잠재적인 것’은 실재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가능적인 것’은 실재일 수 없다. 또한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와 ‘가능적인 것’의 ‘실현’의 차이에 대해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제 실현의 과정은 유사성과 제한이라는 두 개의 본질적인 규칙에 순종한다. 왜냐하면 실재는 그것이 실현시키는 가능성의 이미지에 존재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그리고 모든 가능성들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듯이, 실현은 하나의 제한을 내포하고 있다....현실화의 규칙은 더 이상 유사나 제한이 아니라 차이나 갈라짐 그리고 창조이다....현실화되기 위해서 잠재성은 제거나 제한에 의해 진행될 수 없으며 적극적인 행위들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 계열들을 창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pp135~136)

그리고 이러한 계열들의 나뉨, 즉 계열들의 갈라짐은 근본적으로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이 ‘분화’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 ‘전체’ 자체의 ‘분화’이고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창조’가 반드시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는 ‘창조적 진화’를 해왔고 지금도 그러한 진화의 과정 속에 있다. 이것은 잠재성 자체가 ‘지속’이고 이러한 ‘지속’은 ‘나뉘면서 변질되는’ 즉 현실화되면서 ‘차이’를 생산해내는 폭발력을 갖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속이 분화되는 것은 그 자체 안에서, 내적인 폭발력에 의해서이다: 지속은 가지를 뻗거나 여러 갈래로 갈라진 시리즈들 안에서만 긍정되고, 연장되고, 진전할 뿐이다.”(p.132)

그리고 이러한 ‘분화’로서의 ‘현실화’는 미분화된 전체성 혹은 총체성으로서의 ‘전체’로부터 뻗어나오는 것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분화가 왜 ”현실화“인가? 그것은 분화가 잠재적·원생적 단일성[통일성] 및 전체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단일성 및 총체성은 분화의 계열들을 따라서 분리되기는 하지만 그 존속하는 단일성 및 총체성을 각 계열에서 다시금 증언해준다.”(p.132)

그리고 이러한 ‘전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들뢰즈는 기계론과 목적론이 전체가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것이 ‘순수생성’이자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이고 이러한 ‘시간의 공간화’가 우리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흔들거림 속에서 ‘전체’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뻐해야 한다....공간과 시간의 혼동, 시간의 공간으로의 흡수는 우리로 하여금 전체가...주어졌다고 믿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기계론과 목적론 모두에 공통되는 오류이다....모든 방식으로, 시간은 이제 우리에게 영원성을 감추는, 아니면 우리에게 ‘신’이나 초인적 지성이 단번에 보는 것을 차례로 드러내주는, 스크린으로서만 거기에 존재한다.(pp.146~147)

그러나 베르그송의 ‘지속’의 철학에서는 ‘전체’는 언제나 생성되고 있는 중이고 ‘시간’은 곧 ‘자유’이자 ‘창조’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처럼 ‘자유’와 ‘창조’ 그리고 ‘차이’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철학이다. 즉 베르그송은 존재가 가지는 내적인 폭발력에 의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분화' 즉 차이생성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철학자이다. 반면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가 '폭발'(explosion)이 아닌 '내파'(implosion)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파'는 차이나 구별을 무화시켜서 사회를 미분화된 상태로 만드는 작용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보드리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폭발적인 격렬함의 전통적인 도식을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분석할 줄 모르는, 어떤 전혀 다른 격렬함이 오늘날 나타난다....수 천년 동안의 에너지 방사와 폭발국면으로부터 내파국면으로 넘어가면, 일종의 극대방사 이후에..., 사회적인 것이 회귀의 국면에 이르면다른 것으로 된다....그 속에서 의미의 세계가 사라져 버린다.”(장 보드리야르, 하태완 역,, 『시뮬라시옹』(민음사, 2001),pp.134~135)

이러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구별과 차이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미분화된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차이의 상실(미분화) 속에서 사회적인 것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모든 사회성의 최종 생산물로서, 그리고 단숨에 이 사회성이라는 것에 종말을 가해버리는 대중덩어리,...이 대중덩어리는...사회적인 것이 함열하는 장소이다.”(『시뮬라시옹』(민음사, 2001), p.128)

이렇게 베르그송과 보드리야르는 서로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이 둘은 어떠한 방향을 가진 거대서사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거대 서사가 진화론적이라면 보드리야르의 거대서사는 반-진화론적이다. 우리는 이 둘을 극복하여 ‘탈-진화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는 분화의 일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미분화의 일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매 순간 어떤 측면에서는 분화로 다른 측면에서는 미분화로 나아가고 있다. 현대사회는 ‘범주’의 차원에서는 미분화되어 모든 대립적인 극들이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지만(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이러한 이분법의 내파 속에서 그 동안 이러한 이분법에 의해 드러나지 않았던 개체들이 개체성을 가질 수 있는, 즉 사회가 개체들로 분화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성들로의 분화는, 사회의 총체적 전체는 언제나 미분화된 전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사실상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회가 ‘다중’으로서 형성됨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로서의 ‘다중’은 언제나 ‘창조’와 ‘발명’에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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