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호] 인간의 의지를 격려하는 신을 믿는 인간의 삶은 무엇을 향해야 할 것인가 / 문지영

톺아보기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8 22:20
조회
807
인간의 의지를 격려하는 신을 믿는 인간의 삶은 무엇을 향해야 할 것인가


문지영 (연출가, 다큐멘터리 <어떤 점거> 연출)


* 편집자 주 : 이 글은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2016년 8월 13일 토요일 저녁 7시에 열린 "제1회 톺아보기 ― 유채림 작가의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오쿠바가 넥타이를 세 번 맸다고 하니, 그가 넥타이를 매는 세 번의 시점과 아마도 넥타이를 맬 수밖에 없었을 배경을 살핀다면 작가의 문제의식에 가까워질 수 있겠다 싶어 넥타이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었다. 오쿠바의 친구 길동이 넥타이를 매고 독실한 종교인으로서 폼을 잡길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하나님 주권에 대해 갖는 절대적 확신을 넥타이로 상징화한 줄 알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미군정기를 거쳐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오쿠바가 살아온 삶을 따라온 후에야 넥타이를 매는 것은 사실 자살을 은유한 것이고, 그래서 오쿠바가 세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음을 책을 다 읽을 때쯤에야 알았다. 박정희 정권 당시 춘천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파출소장 딸의 강간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누명을 쓴 채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이뤄진 자살시도였다. 하지만 오쿠바는 살 것을 선택하고 40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는다.

오쿠바는 굴곡진 한국의 근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민족투사나 운동권 인사는 아니었다. 냉전논리에 기생해 일신의 번영을 꾀한 자도 아니었으며 거꾸로 그 때문에 죽거나 헐벗어야 했던 자도 아니었다. 또 다른 친구 만보처럼 공장 동료들로부터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는 걸 배울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로부터 상대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었고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자였다. ‘길을 낸 데로 인생이 흘러’갔고 ‘발 딛고 있는 데서 꿈을 출발’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신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자였다.

오쿠바는 개인의 영혼구원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신의 뜻대로 세상이 굴러간다고 믿기에 세상의 고통에는 눈감아 버린 자들이었고 도리어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 중 왼편 사형수는 지옥구덩이에 떨어졌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죽은 형과 매형, 첫사랑 영치, 그리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인민군의 시체더미를 목격한 오쿠바는 전지전능한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오쿠바가 목회자가 되길 바라는 어머니의 서언기도를 따를 수 없었고 대신 성경 속의 신을 공부한다. 세계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공동창조자로서 인간을 여기는 신,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을 존중하고 바른길 유도해가는 설득적인 힘을 지닌 신을 믿었다. 그리고 사진가로서,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며 역사의 무게를 떠받치진 않았지만 대신 속세의 무게에 짓눌린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게 인생이냐며 이것은 진정 사는 게 아니라 서글퍼 하던 오쿠바가 삶에 대한 회의를 넘어 삶을 포기하게 된 것은 아들 재만의 죽음 때문이었다. 재만의 죽음으로 성경의 신조차 믿지 않게 되었다. 사진가였던 오쿠바는 카메라를 팔고 꿈도 버렸다.

오쿠바가 다시 삶의 의지를 되찾고 신을 믿게 된 것은 강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자신이 이미 버렸던 삶이 타의에 의해 더욱 끔직한 깊은 구렁텅이로 내몰린 후였다. 하지만 세 번이나 자살시도를 할 정도로 삶을 완전히 버리고자 한 오쿠바가 다시 신을 발견하게 된 것은 자신의 결백을 믿고 살아서 누명을 벗으라는 김재준과 대학 후배였던 응태의 헌신으로부터였다. 완전자로서의 신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위로하는 신이었다.

오쿠바는 한국 근대를 관통하는 부조리한 사회와 구조가 만들어낸 처절하고 끔찍한 삶과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만의 신을 믿는다. 하지만 이 억울한 삶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비껴나가 오히려 자신의 꿈을 좇는 삶을 살았음에도 오쿠바는 신을 버린다. 그런 그가 신을 되찾은 것은 자신이 비껴가 있었던 그 부조리한 사회와 구조에 강제로 갇히게 된 후였다. 그가 찾은 신은 물론 원래부터 그가 믿었던 대로의, 도달해야 할 어떤 이상으로서의 맹목적인 신이 아닌 인간의 의지를 격려하는 신이지만 그런 신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무엇일까. 당장은 그가 삶의 목적으로 삼는 누명을 벗고 난 뒤에는 오쿠바의 삶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삶은 무엇을 향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나 ‘오쿠바’가 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오쿠바’들의 삶에 대한 의지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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