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호] 지식-기계가 만드는 혼종의 존재론ㅣ문규민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20-09-09 15:03
조회
709
 

지식-기계가 만드는 혼종의 존재론


문규민(철학 연구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에서 "모든 설명과 규정에도 불구하고, 명제의 중요성이 그것의 흥미로움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최근 갈무리에서 출간된 레비 브라이언트의 『존재의 지도』 또한 그러한 흥미로운 명제들로 가득 차 있다. 소위 ‘존재론적 전회’, ‘사변적 전회’, ‘실재론적 전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최근의 철학적 흐름에서 브라이언트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그는 원래 들뢰즈 연구가로 알려졌으나,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그레이엄 하먼보다 먼저 그 명칭을 고안할 정도로 OOO에도 깊이 관여해왔다. 그래서인지 『존재의 지도』가 보여주는 기계-지향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 MOO)은 내용상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라 불리는 흐름과 강하게 공명하지만, OOO 또는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의 문제의식 또한 곳곳에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MOO의 전모를 보여주는 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본 서평에서는 우선 몇 가지 번역에서의 유의점들을 살펴본 뒤, 내용과 관련하여 MOO와 OOO의 유사성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MOO가 방법론적 고유성과 그 함축을 알아볼 것이다.


전반적으로 책의 번역은 유려하고 가독성이 높기에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만약 이 책이 읽기 어렵다면, 그것은 번역이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읽는 이의 배경 이해가 부족하거나 내용 자체가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중요한 개념어의 번역에 있어서 눈에 밟히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다. 역자는 종종 ‘virtual’이나 ‘virtuality’를 “가상” 또는 “가상성”으로 번역하곤 한다. 물론 맥락에 따라 가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온당할 수도 있지만, 저 단어들이 현행성(actuality), 즉 바로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관계, 사건, 작용 등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쓰일 때는 가상이 아니라 ‘잠재적’, ‘잠재성’ 등으로 옮겨야 한다. 예컨대 신유물론의 또다른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마누엘 데란다의 대표작 『Intensive Philosophy and Virtual Science』는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옮겨졌다. 이는 단지 표현의 적절성이나 언어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정확성과 관련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그리고 역자는 ‘overdetermination’을 “과대결정”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 용어는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대부분 ‘과잉결정’ 특히 ‘중층결정’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또한 사소한 듯 하지만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몇몇 개념어 번역의 문제일 뿐 책 전체의 번역 상태는 좋은 편이다. 읽기가 수월할 뿐 아니라 브라이언트의 담백하고 명료한 문체까지 즐길 수 있을 정도다.


여기서 브라이언트의 MOO와 하먼의 OOO를 관계를 따져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MOO의 핵심 개념은 기계와 역능(power)인데, 이 개념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책의 2장에서 제공된다. 브라이언트가 말하는 기계는 “입력물의 변화하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출력물을 생산하는 조작들의 체계”다. (p. 69) 조작(operation)이란 그 기계들이 실제로 행하는 바이고, 역능이란 그런 ”조작들의 가상적[잠재적] 체계”다. (p. 73) 쉽게 말해 조작은 어떤 기계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고, 역능이란 그것이 잠재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를 잠재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을 실행하고 있을 필요는 없고, 아예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즉 조작과 역능, 현실성과 잠재성은 따로 놀 수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트는 이렇게 따로 노는 부분들을 기계의 “가상적[잠재적] 고유 존재”(virtual proper being)와 “국소적 표현”(local manifes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가상적 고유 존재는 하먼이 객체(object)의 본질이라고 한 것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인다. 하먼의 근본직관은 객체에는 언제나 물러나는(withdrawal) 측면, 후설이라면 음영지어진 채 주어진다고 했을 그런 측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본질이란 이런 측면들이다. 이렇게 물러나는 것들, 말하자면 주어지지 않는 식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항상 있기 때문에 존재자들은 그것의 주어진 현행적 관계나 행위들의 다발로 환원될 수 없으며, 따라서 현행적 관계와 행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객체’로 성립한다는 것이 OOO의 요점 중 하나이다. 그런데 물러난다거나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현행화되지 않는다는 것, 국소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브라이언트는 시공간의 위상학을 다루는 6장에서, 기계와 그것의 상호작용은 외부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기계들은 그들이 맺는 관계나 상호작용을 이탈할 수 있는 내재적 역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p. 277) 객체에게 관계나 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하건, 기계가 가상적[잠재적] 고유 존재와 국소적 표현들로 분열되어 있다고 하건, 적어도 이 지점에 국한해서 보자면 MOO와 OOO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실제로 ‘고유 존재’와 같은 표현은 맥락에 따라선 ‘본질’과 호환가능한 표현이다.) 이러한 독해에 따르면, 가상적[잠재적] 고유 존재 또는 역능이 기계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꾸로 하먼이 말하는 본질을 객체를 주어진 관계와 기능으로부터의 탈주를 가능케 하는 힘의 원천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의 지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서로 다른 이론과 사상가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브라이언트의 활력과 창의성이다. 앞서 브라이언트가 신유물론과 OOO 사이에서 특이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MOO는 OOO를 품은 기계의 존재론이자 지리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특이성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어느 누가 브라이언트처럼 앤디 클라크의 확장된 마음 테제(extended mind thesis)와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로서의 거짓 웃음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 (p. 142) 어느 누가 루만의 이차 관찰(second order observation)을 “에일리언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전유할 수 있을까? (3장) 이러한 횡단지/혼종지(trans-knowledge/hybrid knowledge)는 비단 브라이언트만의 특징은 아니다. 제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신유물론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론들은 철학사는 물론 자연과학, 사회과학, 심지어는 수학 등 철학 바깥의 다양한 분야들로부터 지적 자원을 끌어 쓰고 있다. 그런 해석이 과연 정확한지, 그리고 그러한 전유가 정말 효과적인지는 별도로 꼼꼼히 따져볼 문제이다. 그러나 브라이언트의 책이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런 시도들이 매우 흥미로운 비교와 분석, 비판을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재의 지도』는 서두에 인용한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흥미롭기 때문에 중요한 명제들’을 산출하는 하나의 지식-기계(knowledge-machine)다. 물론 흥미롭기 때문에 중요한 명제들을 실제로 산출하기 위해서는 저 지식-기계는 다른 기계들, 즉 알맞은 두뇌와 회집체(assemblage)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런 회집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책의 말미에 하먼과의 대담을 마무리하는 브라이언트의 대답에 그 단서가 보인다. 나는 다음과 같은 브라이언트의 말에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동의한다.


“여기서 철학적 작업은 들뢰즈, 하이데거, 바디우 등과 같은 중요 인물들에 대한 주석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인물들에 대한 상당히 오이디푸스적인 이런 물신숭배에서서 벗어나서 의문과 문제에 집중하는 그런 이행을 보고싶습니다. (…) 인물로부터 의문과 문제로의 이행은 인물을 무시하거나 신중한 주석의 실천을 전적으로 포기함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문제와 의문이 더는 고유명사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이들 고유명사가 문제와 의문에 종속되어있음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단일한 인물에 몰두하는 연구는 훨씬 더 적어지는 대신에 어떤 의문을 전개할 때 다양한 사상가의 작업에 의존하는 현상을 보게될 것입니다.“ (p.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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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20년 9월 4일 <문화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s://bit.ly/3mbXW7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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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이 책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저자 브뤼노 라투르가 근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 던지는 독특하고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탈근대주의의 근대성 비판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라투르가 말하는 근대인의 본질은 이분법이 아닌 ‘하이브리드’의 증식이다. ‘하이브리드’의 이해를 통해서만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유물론 : 객체와 사회 이론』(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사회적 세계에는 어떤 객체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정한 피자헛 매장은 그 매장을 구성하는 종업원과 탁자, 냅킨만큼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그 매장이 종업원과 손님의 삶에 미치는 사회적 및 경제적 영향과 피자헛 기업, 미합중국, 행성 지구만큼 실재적이기도 한가? 이 책에서 객체지향 철학의 창시자인 저자 그레이엄 하먼은 사회생활 속 객체의 본성과 지위를 규명하고자 한다. 객체에 대한 관심은 유물론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고 흔히 가정되지만, 하먼은 이 견해를 거부하면서 그 대신에 독창적이고 독특한 '비유물론' 접근법을 전개한다.


가상과 사건 : 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6)


사건은 늘 지나간다. 어떤 사건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지나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현실적으로 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금-존재했던 것과 곧-존재하려고-하는-것을 포괄하는 경험을 지각하는가? <가상과 사건>에서 브라이언 마수미는 윌리엄 제임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질 들뢰즈 등의 저작에 의존하여 ‘가상’이라는 개념을 이 물음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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