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69-110쪽

작성자
etranger
작성일
2018-11-30 12:25
조회
872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 69p-110p

발제 - etranger

들어가며

객관적인 과거의 기억을 불러온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저마다 관점이 상이하게 다르듯, 기억 또한 이후 삶의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맥락이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온전한 기억 재현의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기억을 맥락화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행위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의 벤야민은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나름의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다. 유년 시절에 아로새겨져 있던 대도시에서의 기억과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 작업을 통해 과거의 ‘부산물’들은 버려져야할 것이 아닌, “미래의 역사적 경험”을 드러내는 징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지적 활동을 멈춘 지식인의 상투적 회고, 몽상과는 다르다. 과거를 의미화하는 벤야민의 현재적 위치가 파시즘으로 치닫는 사회의 불안 속에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벤야민의 걸음을 따라 함께 발을 내딛어 보자.

다가올 미래의 표정

어린 벤야민이 닿은 곳은 동물원이다. 부르주아 집안의 엄숙함과 차가움을 감지했던 소년답게 동물의 본성과 기질에 따른 거처의 특성을 살펴본다. 스핑크스나 피라미드가 그려진 배경 앞에 양쪽으로 죽 늘어선 타조, 마법의 사제처럼 탑 안에 눌러앉은 하마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좋아하지 않은 곳도, 무서워하지 않은 곳도 없었지만, 소년은 거처의 위치만으로도 특별한 점을 지닌 동물에게 눈길을 돌린다. 가장 변두리에 있었기에 눈에 띄었던 동물은 수달이다. 수달이 머물고 있는 수조의 난간에는 단단한 막대기가 쳐져 있다. “그것은 수달의 우리였다. 정말 그것은 일종의 우리였다.” 막대기로 둘러쳐진 우리 안에서도 수달은 언제나 바빴다. 그러나 소년은 조금도 지치지 않고 애틋하게 수달을 바라보면서 기다렸다.

“비는 솨솨 소리에 실어 나의 미래를 전해주었다. 마치 요람에 누운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우리들은 그런 자장가를 들으며 자라는 것임을 잘 알게 되었다. 흐릿한 창문 뒤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내 마음은 수달에게 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차린 것은 다음번에 수달 우리 앞에 서 있을 때였다. 그러면 나는 다시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수달을 가둔 막대기 우리 앞에 얼굴을 포개고 있던 소년은 수달에게서 ‘우리’라는 감정을 느낀다. 어린 벤야민이 공원 변두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동물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건, 그래서 애타게 기다리고 함께 비를 맞았던 건 우리에 갇힌 수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벤야민은 수달의 수조로 공급되는 물이 도시의 하수구로부터 흘러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달이 이러한 폐수나 물속에서 태어나 사육된 것인지, 아니면 그 흐르는 물과 개울물을 그냥 마시고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마 나는 단정짓지 못했다.” 이 물음이 벤야민 자신의 존재기반에 대한 물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딱딱한 부르주아 집안과 규율 가득한 학교에서 태어나 사육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벗어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었는지’라고. 이 단편의 제목은 「수달」이다. 제목이 ‘벤야민’으로 읽히기도 하고, ‘우리’로 읽히기도 한다. 비단 수달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벤야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근대화의 산물로 식민지 국가의 희귀한 동물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이다. 갇힌 것은 동물만이 아니다. 식민지 인종 또한 ‘동물’로서 전시되었고, 수용소, 병원, 공장, 사무공간이라는 ‘감옥’ 또한 그렇다. 그렇게 어린 벤야민의 기억 속 “동물원의 구석진 그곳은 다가올 미래의 표정들을 담고 있었다.”

부르주아의 공간에서

어린 벤야민의 산책은 베를린 거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크게 베를린 거리라는 외부와 부르주아 집안, 학교처럼 엄격한 규율로 대표되는 내부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숨을 곳들」에서 벤야민은 자신의 집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고 숨이 멈추는 듯했다. 이곳에서 나는 사물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갇혔다.” ‘시계 종소리’, ‘무거운 문’, ‘신상’으로 표현되는 억압 속에서 소년은 지치고 않고 부르주아적 ‘악령’들과 싸운다. 그 과정을 통해 집안은 ‘가면들의 병기창’이 된다. “‘가면’이 예술에 대한 비유라면, 가면들의 병기창이란 곧 ‘예술들의 병기창’이 될 것이다.”(문광훈) 벤야민은 억압의 공간을 예술의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음침한 집을 구해내는 기술자가 된다.

공간의 억압은 사물 뿐 아니라 타자를 통해서도 다가온다. 「블루메스호프 12번지」에서 벤야민은 외할머니 집에서 아늑함과 친밀감을 느낀다. 그러나 “낮에는 그렇게도 쾌적해 보이는 공간이 밤에는 악몽의 무대가 되었다.” 궁핍함은 그 집의 공간 어디에서도 들어설 여지가 없었고, 그곳에는 죽음을 위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을 안겨준 것은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였다.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지 못하는 부조리함. 할머니의 물건들은 상속이 진행되자마자 곧바로 장사꾼들에게 넘겨진다. 이제 흔적들은 말끔히 지워져버렸다. 생명이 ‘관리’되는 시대에 죽음은 일상과 분리된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고, “죽음이라는 것은 소비자(=환자)의 최종적인 저항행위에 의한 의료팀의 노력이 좌절한 것으로 비쳐지게 되었다.”(이반 일리치 - ‘정복되지 않는 죽음’) 그토록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죽음의 공간이 분리된 현실과 의료화에 대한 깊은 의존으로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교모임」에서 어린 벤야민의 내면은 아버지의 가부장성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에 대한 친밀감 사이에서 팽팽하다. 사교모임이 열리는 날이면 소년의 불안은 배가되었다. 아버지가 입고 있는 연미복은 갑옷처럼 보이고, 모임 전 의자를 둘러보는 눈에서는 무장한 사람의 시선을 느낀다. “점심식사 때 자주 나를 비통하게 만들었던 불공평한 싸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사교모임을 위해 어머니가 ‘노란색 보석 장식’을 꺼낼 땐, 그것이 어머니와 자신을 위험에서부터 보호해줄 부적이라 믿는다. 소년은 어머니의 목소리와 향기 속에서 평안을 얻는다. 나아가 미메시스(Mimesis)의 경험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무메렐렌」을 살펴보자. 여기서 벤야민은 45p에 있는 어린 카프카의 사진에 “나는 사진에서 모자를 쓰지 않고 서 있다. 왼손으로는 챙이 엄청나게 큰 모자를 몸에 익은 우아한 포즈로 들고 있다.” 라고 자신을 대입한다. 그 뒤로 “저만치 떨어진 현관의 휘장 옆에 어머니가 꽉 끼는 코르셋을 입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라는 진술이 이어진다. 이 단편에서 표현된 많은 미메시스 중에서도 카프카와 유사해지려는 벤야민의 의식에 주목이 갔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지만 카프카 또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상인 아버지에게 많은 두려움과 억압을 느꼈다. 그는 평생 아버지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으며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 또한 부쳐지지 않은 편지들의 모음이었다. 억압을 언어화할 수 없었던, 그래서 사물과 대화하고 어머니에게 기댈 수밖에 없던 벤야민에게 카프카의 이러한 자전이야말로 미메시스로 이끈 것이 아니었을까?

억압을 피하기 위한 도피는 학교에서도 드러난다. 과제로 부여된 독본들의 세상은 한 행 한 행이 ‘감옥 방’과 ‘병영’처럼 획일화되고 죽은 활자들의 세계였다. 하지만 쉬는 시간에 혼자 읽는 책들은 파우스트에게 주어진 풍부한 힘들과 같았다.(「학급문고」) 창문가에서 내리는 눈송이에는 마음 쏟을 수 없었으나, 내면에 내리는 이야기들의 눈송이는 어린 벤야민을 바빌론, 바그다드, 알래스카와 같은 머나먼 장소들로 데려가 주었다. (「오락서적」) “책의 미로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지하통로들을 알아내는 것보다 더 멋있는 일은 없었다. 여러 차례 끊어지지만 언제나 다시 ‘속편’으로 등장하는 긴 스토리야말로 전체를 관통하는 지하통로에 해당했다.” (「독일 청소년의 새 친구」) 책 속에서의 정신적 길 헤맴은 「티어가르텐」에서 언급했던 숲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기 위한 ‘훈련’, 시내골목들을 통해 시간 변화를 알아채는 ‘기술’을 떠오르게 한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어린 벤야민의 산책은 베를린 거리와 부르주아 집안이라는 구분 외에도, 물리적 길 헤맴과 정신적 길 헤맴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두 가지는 벤야민이라는 존재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변증법적 요소다. 학교의 규율과 억압은 그를 부단히 텍스트 속으로 내몰았으며, 내면에서 상상력을 키우던 소년은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베를린 거리를 산책한다. 공원의 구석진 가장자리에서 아리아드네의 침소를 보고, 수달에게서 우리라는 마음을 느끼며 친구가 된다. 상상력은 소년에게서 거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고, 변화한 거리는 다시 내면의 탐구로 소년을 이끈다. 학교와 집이라는 부르주아 공간의 억압과 제약은 새로운 가능성의 입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며

지금 여기서 벤야민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것은 곧 ‘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기도 하다. 어린 시절 벤야민은 부르주아 공간에서 이루어진 ‘폭력의 예감’ 속에서 거리 산책, 사물과의 대화로 도피했다. 성년기의 벤야민 역시 파시즘의 위협 속에서 망명자로 불안한 삶을 살았지만, 어린 시절과 달라진 게 있다면, 폭력의 구조를 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결코 지금의 폭력과 억압이 예외적인 것도 단선적인 것도 아님을 밝혀낸다. 요컨대 미래는 과거에서 이미 그 결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폭력에 흔들리는 것은 벤야민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과거와 같은 '~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구조적 강제는 남아 있으나, 성과사회의 끊임없는 ‘자기 착취’ 앞에서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된다. 또한 어느 때보다 첨예해진 젠더 문제는 사회의 평등과 교육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열세 살 여공의 삶』을 펴낸 신순애 씨의 삶이 떠올랐다. 60~70년대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신순애 씨는 늦은 나이에 들어간 대학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고 레포트 써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여공들은 단지 불쌍해서 도와줘야하는 존재로만 기록돼 있었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활발함에 대해서도 한 학자는 “여성들에겐 돌아갈 집이 있고 결혼이라는 탈출구가 있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신순애 씨는 “여공들은 대부분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진 가장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녀가 자신의 생애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목소리가 소거된 채 시대의 희생자로 동정받는 여공들의 삶을 망각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지식인이 받아 적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아닌, 당사자로서 언어를 부여하고 현재화하기 위해. 그렇다면 벤야민과 신순애 씨가 그랬듯, 우리가 살아온 도시에서의 삶, 집과 학교, 회사에서도 시대적 의미를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의 구두와 코르셋, 교복, omr 답안지,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표어와 같은 사물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어설퍼도 이제 나의 목소리로 노래를 해야만 할 것 같다.
전체 0

전체 483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SF읽기] SF의 전환; 도약 - 7월 26일 시작! (2,4주 수요일, 저녁7시)
bomi | 2023.07.16 | 추천 0 | 조회 2835
bomi 2023.07.16 0 2835
공지사항
세미나 홍보 요청 양식
다중지성의정원 | 2022.01.11 | 추천 0 | 조회 2446
다중지성의정원 2022.01.11 0 2446
공지사항
[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ludante | 2019.02.10 | 추천 0 | 조회 5518
ludante 2019.02.10 0 5518
공지사항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ludante | 2019.01.27 | 추천 0 | 조회 5186
ludante 2019.01.27 0 5186
공지사항
비밀글 <삶과 예술> 세미나 참가자 명단 - 2019년 1월
다중지성의정원 | 2018.02.25 | 추천 0 | 조회 55
다중지성의정원 2018.02.25 0 55
475
4/3/ 세미나 공지, 필립 K.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chocleda | 2024.03.22 | 추천 0 | 조회 55
chocleda 2024.03.22 0 55
474
3/13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읽을 거리
bomi | 2024.03.13 | 추천 0 | 조회 26
bomi 2024.03.13 0 26
473
3/13 세미나 공지_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bomi | 2024.03.11 | 추천 0 | 조회 51
bomi 2024.03.11 0 51
472
2/28(수) 구드룬 파우제방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토론거리
chu | 2024.02.28 | 추천 0 | 조회 99
chu 2024.02.28 0 99
471
[SF읽기] 2/28(수) 구드룬 파우제방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세미나 공지
chu | 2024.02.25 | 추천 0 | 조회 99
chu 2024.02.25 0 99
470
1/14(수)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kindred)>(1979)
희정 | 2024.02.13 | 추천 0 | 조회 91
희정 2024.02.13 0 91
469
1/31 [체체파리의 비법] 읽을 거리와 토론 주제 발제
chocleda | 2024.01.31 | 추천 2 | 조회 151
chocleda 2024.01.31 2 151
468
1월 31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체체파리의 비법> 세미나 공지
chocleda | 2024.01.17 | 추천 0 | 조회 142
chocleda 2024.01.17 0 142
467
10일 세미나를 17일로 순연합니다!
bomi | 2024.01.10 | 추천 0 | 조회 181
bomi 2024.01.10 0 181
466
1/10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자료와 토론거리
bomi | 2024.01.09 | 추천 0 | 조회 200
bomi 2024.01.09 0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