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브뤼노 라투르 지음 | 홍철기 옮김 | 2009.7.15

아우또노미아
작성자
갈무리
작성일
2018-03-10 21:43
조회
963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Nous n’avons jamais ete modernes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세계적인 석학 브뤼노 라투르의 대표작!

24개 국어로 번역되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라투르 사상의 입문서!
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를 넘어선 ‘비근대주의’의 정치생태학을 제시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이제 그것의 반생산적인 성격을 제거한 새로운 유형의 근대인을 추구하자!

과학과 기술, 정치와 정부, 언어와 의미론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의 흥미롭고 심층적인 탐구!

지은이 브뤼노 라투르 | 옮긴이 홍철기 | 정가 25,000원 | 쪽수 408쪽
출판일 2009년 7월 15일 | 판형 사륙판 양장본(127*188) | 도서 상태 초판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 도서분류 Mens, 아우또노미아총서 20
ISBN 978-89-6195-016-9
보도자료 우리는_결코_근대인이었던_적이_없다_보도자료(갈무리).hwp

인터넷서점 바로 가기 : 알라딘 교보문고 예스24, 인터파크


이 책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저자 브뤼노 라투르가 근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 던지는 독특하고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탈근대주의의 근대성 비판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라투르가 말하는 근대인의 본질은 이분법이 아닌 ‘하이브리드’의 증식이다. ‘하이브리드’의 이해를 통해서만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출간의 의미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선 과학의 이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저자 브뤼노 라투르가 근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 던지는 독특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과학논쟁(science wars)'의 한가운데에서 저자는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이익이나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회학적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자연적 사실은 사회나 문화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과학적 '실재론(realism)'의 양 진영으로부터의 맹렬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자 사이의 협상테이블을 마련하려 하고 있다. 저자는 오히려 이러한 협상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가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탈근대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이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다. 보편적 합리성의 한계에 대한 폭로와 근대 계몽주의의 맹목성이 낳은 폭력에 대한 고발은 그 충격과 새로움이 완전히 퇴색되면서 전혀 기대했던 효과를 얻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저자가 보기에 탈근대주의가 처한 '막다른 골목'은 탈근대주의자들의 근대인들에 대한 지나친 불신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근대인들을 지나치게 신뢰한 결과다. 그들이야말로 근대화를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근대성 논쟁의 핵심적인 쟁점이 자리 잡고 있다.

근대인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대인은 자신들의 탄생시점에서부터 이중의 존재였다. 근대인은 공식적인 표면적 층위에서는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지식과 이익을 엄격하게 구분하였고 그것이 자신들을 전근대인들과 구분시켜주는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탈근대인들이나 전통주의자들도 바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근대인들은 실제로는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지식과 이익이 구분될 수 없게 뒤얽힌 비인간적 사물, '하이브리드'를 엄청난 규모로 증식시키고 동원해 왔다는 것이다. 근대성의 태동기 잉글랜드에서 홉스와 보일로 하여금 그것의 정치적 파장과 과학적 효과 모두에 대해 한꺼번에 논쟁하게 만든 공기펌프로부터 현대의 오존층 파괴, AIDS, 유전자 변형식품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과학은 언제나 하이브리드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와 과학은 이제 이렇게 증식된 하이브리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사회와 과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하이브리드에 대한 무제한적인 증식이 가져올 무서운 결과에도 대처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이브리드’의 이해가 바로 근대성 이해의 열쇠이다.

하이브리드란 어쩌면 마치 유태인 설화에 나오는 골렘(golem)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16세기 프라하의 한 랍비는 유태인들을 박해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진흙으로부터 인간의 형상을 한 골렘을 만들어낸다. 골렘은 랍비의 명령에 따라 박해자들에게 복수를 가하고 그들을 살해한다. 생명력이 없는 물질로부터 만들어진 골렘은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고 결국 살인과 복수가 아닌 사랑을 원하게 되었고 그러한 감정을 거부당했을 때 자신의 창조자인 랍비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기술과 사물, 즉 하이브리드에 대한 도구주의적 관점에 사로잡힌 우리 근대인이야말로 이 설화에서의 랍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근대인은 하이브리드를 엄청난 규모로 창조하면서도 그것들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이해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이브리드를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인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서 이제 더 이상 전진도 후퇴도 불가능한 근대성 없이도 지속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계몽주의를 모색하려 한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근대인과 비근대인, 문명적 사고와 야생적 사고의 분할을 넘나드는 이미 오래된 인간의 실천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볼 수 있는 라투르의 사상

“『근대인』은 단순히 근대성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라투르는 ‘우리 근대인’이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던 이유가 근대인의 필연적인 딜레마인 ‘언행의 불일치’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인의 실제는 근대인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이론화했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다―그리고 난해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불일치가 근대인 자신의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는 것이다.”(「옮긴이 후기」 중에서, 389쪽)

“근대인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연결망에 대한 놀라움의 표면 아래로 파고 들어가면 우리는 그와 같은 이해의 부재라는 인류학적 근원을 발견한다.”(「1장 위기」 중에서, 34쪽)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과거완료시제의 용법은 여기서 중요한데 그것이 회고적인 감정의 문제이며 우리 역사를 다시 읽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우리는 더 이상 탈-탈-탈근대주의자의 무분별한 비행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훨씬 더 정교하고 더욱 비판적이며, ‘의심의 시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가 결코 근대의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우스꽝스러운 암시는 탈근대 사상가들을 언제나 따라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지어 시작하지도 않은 시대를 뒤따라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장 헌법」 중에서, 128쪽)

“근대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모순을 말하는데, 하나는 ‘자연’과 ‘사회’의 두 헌법적 보장 사이의 모순이요, 다른 하나는 ‘정화’의 실천과 ‘매개’의 실천 사이의 모순이다”(「1장 위기」 중에서, 62쪽)

“우리는 우리의 설명을 객체 또는 주체(사회)로 알려진 두 순수 형태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면 이들은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중심적 실천 형태의 부분적이고 정화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설명도 사실상 ‘자연’과 ‘사회’를 얻게 되지만, 이는 출발점이 아닌 최종 결과로서 그럴 뿐이다. ‘자연’은 돌지만 주체(사회)를 중심으로 도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집합을 중심으로 돈다. ‘주체’도 돌지만 ‘자연’을 중심으로 돌지는 않는다. 사람과 사물들이 창출되는 집합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간왕국이 재현된다. 자연들과 사회들은 그것의 위성들에 불과하다.”(「1장 위기」 중에서, 69쪽)

“근대화는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전근대인이 될 것인가―혹은 전근대인으로 퇴행하게 되는가? 우리는 반근대인으로 물러나야만 하는가? 보다 낳은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근대인이기를 지속해야 하겠지만 어떤 확신도 없이 탈근대의 중간지대twilight zone 안에서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5장 재분배」 중에서, 329-330쪽)


지은이 · 옮긴이 소개

지은이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 )
프랑스 출신의 과학기술학자이며 현재 이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인류학을 전공하였고, 파리광업대학과 런던경제대학, 그리고 하버드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파리정치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대 과학기술에 관한 인류학적이고 철학적인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실험실의 삶』(La vie laboratoire, 1979), 『미생물: 전쟁과 평화』(Les Microbes: Guerre et paix, 1984), 『과학의 실천』(La science en action, 1987),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1991), 『자연의 정치』(Politiques de la nature, 1999), 『판도라의 희망』(Pandora's Hope, 1999), 『사회적인 것의 재조립』(Reassembling the Social, 2005) 등이 있다.

옮긴이
홍철기(Hong Chul-ki, 1976~ )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칼 슈미트와 조르지오 아감벤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박정희 시대의 헌법사상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어판 서문

한 회사가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을 때,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면, 그 회사는 흔히 공개적으로 회수조치(rappel)를 단행한다. 이 조치는 제품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거니와 당연히 시장점유율을 감소시킬 목적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품의 질이나 사용자의 안전에 대한 우려를 소비자들에게 표명하는 주도적인 조치를 취하고 언론의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면 너무나 성급하게 결정을 내린 제품의 생산을 연장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내가 근대성에 대한 회수라는 표현을 쓰고자 할 때 이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다. 그것은 당연히 최초의 원칙들로 회귀한다는 보다 일상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나에게만 고유한 의미에서, 근대성의 작용의 낯섦, 즉 흔히 그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그 낯섦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도 공명하도록 만든다.

인류학에 대한 나의 공헌은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된다. 그 구절은 정확히 말해서 30년 전 아비장(Abidjan)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같은 날 썼던 것인데, 나는 그때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제 기유맹(Roger Guillemin)의 실험실에 가서 “과학적 실천에 민속지학(ethnographiques)의 방법들을 적용하기” 위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기로 결심했다. 나는 왜 이 짧은 문구가 인류학적(anthropologique) 기획에 대한 나의 관점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지나온 길을 매우 쉽게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즉 사회인류학, 혹은 문화인류학은 문화들을 다루는 반면 물리학, 혹은 생물학적 인류학은 자연을 다뤘다는 것. 따라서 오래 전 이 시기에 통약불가능한 두 방식으로 세계를 연구할 수 있었음―그러나 교육에서나 인류학을 제시하는 통상적인 방식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히 유효한 상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는 가려져 있고, 장식이 되어 있으며, 덮여 있는 따뜻한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벌거벗겨져 있고, 냉정하고 심지어 얼어붙어 있기까지 한 방식이다. 말하자면 하나는 은유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직설적인 방식이다. 야생의 사유와 계몽된 사유는 때때로 서로 아름다운 화해에 도달하거나 무지개 빛깔을 발하는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들 사이에 지속적인 접점을 갖지는 않는데, 전자가 후자를 형형색색의 망토로 덮어버리지만 그것은 사물의 차가운 본성에는 낯선 형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과학적 사유의 역사를 연구할 수는 있다―그리고 프랑스 인식론도 당연히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 프로그램은 계몽된 사유를 더욱더 확실히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성의 자유로운 실행에 결부된 비합리성, 상징적 의미, 은유, 이데올로기의 이 잔여물들로부터 계몽된 사유를 ‘해방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왜 과학이 상대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이데올로기와 구분되는지를 인식론 덕분에 언제나 더 잘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나는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우리가 중심적인 문화들을 분석한다고 할 때는 지나치게 거만하고, 그렇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회를 연구하는 기획을 수행할 때에는, 그 사회의 주변부를 갉아먹는데 만족하고 중심에 있는 핵심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것이다. 그 핵심이란 바로 이성, 자연, 그리고 예컨대 내가 세 자매, 혹은 공동의 세 신성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기술적) 효율성, (경제적) 수익성, 그리고 (과학적) 객관성이다. 따라서 나는 조금 더 조정된 균형, 즉 마치 브레누스의 검을 내리치듯이 미리 저울을 기울이지 말아야 하는 그러한 균형점을 염두에 두고 접근방식들의 ‘대칭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즉 한쪽에서는 더 자제하고 다른 쪽에서는 더 과감해야 한다. 실제로 이것은 민속지학의 동일한 방법을 ‘백인’과 ‘흑인’에 적용하고, 계몽된 사유와 ‘야생’의 사유에 적용하는 셈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사유’라는 개념 자체를 지독히도 믿지 않는 셈이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예기치 못한 수많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그런 모험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차례

1장 위기

1.1 하이브리드들의 증식 17
1.2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다시 묶기 22
1.3 비판적 입장의 위기 29
1.4 1989년: 기적의 해 35
1.5 근대인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0

2장 헌법

2.1 근대성의 헌법 49
2.2 보일과 그의 사물들 55
2.3 홉스와 그의 주체들 62
2.4 실험실의 매개 67
2.5 비-인간의 증언 72
2.6 실험실과 리바이어던의 이중 구조물 77
2.7 과학적 표상과 정치적 대표 82
2.8 근대인에 대한 헌법의 보장 87
2.9 네 번째 보장: 소거된 신 94
2.10 근대적 비판의 힘 100
2.11 패배를 모르는 근대인 105
2.12근대성의헌법은무엇을밝히고무엇을애매하게하는가? 110
2.13 비판의 종식 119
2.14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126

3장 혁명

3.1 근대인: 성공의 희생자들 135
3.2 준대상이란 무엇인가? 140
3.3 메울 수 없는 간극 위로 펼쳐진 철학이론 150
3.4 모든 종말들의 종말 156
3.5 기호적 전환 165
3.6 누가 존재를 망각했는가? 170
3.7 과거의 시작 175
3.8 혁명의 기적 182
3.9 지나가는 과거의 종말 186
3.10 선별작업과 다중적인 시간들 192
3.11 코페르니쿠스적 반혁명 198
3.12 중간매체에서 매개자로 204
3.13 고발과 인과 관계 210
3.14 가변적 존재론들 217
3.15 4가지 근대적 수단의 연결 223

4장 상대주의

4.1 비대칭성을 종식시킬 방법 233
4.2 대칭성 원리의 일반화 240
4.3 두 번의 대분할과 그 수출입 체계 246
4.4 ‘열대’로부터의 인류학의 귀향 253
4.5 문화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61
4.6 규모에 따른 차이 268
4.7 아르키메데스의 쿠데타 273
4.8 절대적 상대주의와 상대적 상대주의 278
4.9 세계의 탈주술화와 관련된 사소한 실수들 284
4.10 더 넓은 연결망이라 해도 여전히 모든 점에서 국지적이다. 290
4.11 리바이어던은 연결망의 다발이다. 297
4.12 주변부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선호 302
4.13 과거의 범죄에 더하여 새로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방법 308
4.14 무수한 초월성들 314

5장 재분배

5.1 불가능한 근대화 323
5.2 최종 검토 329
5.3 재분배된 인간주의 336
5.4 비근대적 헌법 343
5.5. 사물들의 의회 351

참고문헌

부록

용어해설 371
그림 차례 377
국제 번역판본 일람 378
라투르의 저작목록 381
옮긴이 후기 384
찾아보기 398
전체 299
번호 썸네일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299
<신간> 『기준 없이』 | 스티븐 샤비로 지음 | 이문교 옮김 | 2024.2.24
갈무리 | 2024.02.29 | 추천 0 | 조회 150
갈무리 2024.02.29 0 150
298
<신간> 『예술과 공통장』 | 권범철 지음 | 2024.02.06
갈무리 | 2024.02.05 | 추천 0 | 조회 262
갈무리 2024.02.05 0 262
297
<신간>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 문병호·남승석 지음 | 2024.1.24
갈무리 | 2024.01.29 | 추천 0 | 조회 282
갈무리 2024.01.29 0 282
296
『초월과 자기-초월』 | 메롤드 웨스트폴 지음 | 김동규 옮김 | 2023.12.29
갈무리 | 2023.12.30 | 추천 0 | 조회 392
갈무리 2023.12.30 0 392
295
『대담 : 1972~1990』 | 질 들뢰즈 지음 | 신지영 옮김 | 2023.11.30
갈무리 | 2023.12.04 | 추천 0 | 조회 409
갈무리 2023.12.04 0 409
294
『자기생성과 인지』 | 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지음 | 정현주 옮김 | 2023.11.3
갈무리 | 2023.11.06 | 추천 0 | 조회 429
갈무리 2023.11.06 0 429
293
『#가속하라』 | 로빈 맥케이·아르멘 아바네시안 엮음 | 김효진 옮김 | 2023.09.22
갈무리 | 2023.09.26 | 추천 0 | 조회 754
갈무리 2023.09.26 0 754
292
『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 | 남승석 지음 | 2023.08.30
갈무리 | 2023.08.29 | 추천 0 | 조회 998
갈무리 2023.08.29 0 998
291
『건축과 객체』 | 그레이엄 하먼 지음 | 김효진 옮김 | 2023.07.20
갈무리 | 2023.07.23 | 추천 0 | 조회 726
갈무리 2023.07.23 0 726
290
『문두스』 | 김종영 지음 | 2023.06.23
갈무리 | 2023.06.27 | 추천 0 | 조회 684
갈무리 2023.06.27 0 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