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첫시간 참고 자료

작성자
Namhee Kim
작성일
2018-05-18 18:49
조회
291
저주의 몫

18년간의 구상 기간을 거쳐 출간된 <저주의 몫>. 이 책은 바타이유의 이론서 중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탁월한 저서로 손꼽힌다. 바타이유가 이 책에서 천착하는 것은 <넘치는 에너지의 비생산적 소모>다. 모든 문명사의 변화 원인을 잉여의 소비 방식에서 찾고 있는 바타이유는 비생산적 소모, 즉 <저주의 몫>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가 어떤 형태의 끔찍한 소비와 맞닥뜨리게 되는지를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 전방위적 성찰을 통해 깊이 있게 탐사한다.


모스의 <증여론>을 읽은 바타유가 보기에, 인간과 세계가 존속하기 위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생산과 축적이 아니라, 소비와 상실이다. 22p.

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은 포틀래치를 증여할 뿐 되돌려 받지 않는 것일 것이다." 모스가 말하는 이상은 현실적으로 전혀 아무런 보상이 없는 파괴에 의해서 실현된다. 한편 포틀래치의 결실은 어떤 의미에선 새로운 포틀래치에 바쳐지도록 되어 있으므로, 부에 대한 고대의 원칙은 이처럼 차후 단계에 있을 탐욕으로 인한 부의 어떠한 감소도 없이 명백해진다. 부유한 사람이 권력을 얻으며 부는 획득으로 보인다. 그러나 손실의 능력이 다름아닌 권력이라면 부는 전적으로 상실의 방향을 향해야 한다. 영광, 명예가 권력과 한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전적인 상실에 의해서다. 놀이로서 포틀래치는 보존의 원칙과는 반대된다. 포틀래치는 토템 경제 내부에 존재하던 부의 안정적인 세습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38-39p.)

인류의 난제인 과잉 에너지의 소비와 관련해 바타유가 가장 공들여 탐구한 분야는 에로티즘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성과 죽음은 세계의 씨줄과 날줄이다. 도대체 성과 죽음 없는 삶, 성과 죽음 없는 예술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성과 죽음을 잇는 고리이기에 우리에게 유혹과 동시에 공포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과잉 에너지의 소비 방식인 에로티즘은 그 자체가 다시 과잉에 휩싸여 풀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을 드러낸다. (40p.)

바타유는 문학을 통해 삶의 어두운 진실, 밤의 진실, 즉 이면의 세계를 세계에 제시하고자 했다. 그런데 삶의 어두운 진실은 오직 금기의 위반을 통해서만 드러나며, 금기의 위반은 인간 사회에서 윤리적 악으로 간주된다. <문학과 악>에서 그가 연구한 사드, 보를레르, 장 주네 등은 모두 위반의 세계를 탐험한 위대한 아웃사이더 작가들이다. (42p.)

바타유는 연구의 초점을 과잉 에너지, 즉 '잉여'에 맞춘다. 문제는 아프리카 빈민에서 보듯 '개별 경제'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빈곤이 발생하지만, '일반 경제'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과잉'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53p.)

모두가 위반하는 금기가 금기일 수 없듯, 아무도 위반하지 않는 금기 또한 금기일 수 없다. 따라서 금기는 반드시 위반을 필요로 한다. 금기, 단순히 말해 윤리에 기반하고 있는 인간 사회에서 축제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축제는 위반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면서 금기의 존재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각인시키는 시간이다. 이를테면 리오의 축제에서 '알몸'이라는 위반을 긴장과 더불어 만끽함으로써, 시민들은 '알몸'이 금기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한다.(197p.)

라캉이 말하는 욕망을 공식화하면 이렇다. '요구-욕구-욕망'. 욕망은 결핍에서 온다. 그런데 인간은 영원히 이 결핍을 채울 수 없다. 하나의 결핍을 채우면, 또 다른 결핍이 온다.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 허구이듯, 욕망을 비울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다. 영원히 결핍을 느끼는 존재인 한, 들뢰즈의 말대로 인간은 욕망하는 기계일 수밖에 없다. (212p.)

+)파멸의 원칙

인간의 행위가 생산과 보존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철저히 환원될 수는 없지만, 소비는 명확히 둘로 구분된다. 첫째, 소비는 일정한 사회의 개인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소비이다. 둘째, 또하나의 소비는 원시사회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활동들로서 궁극적인 생산 목적 또는 생식 목적과는 상관없는 사치, 장례, 전쟁, 종교 예식, 기념물, 도박, 공연, 예술 등에 바쳐지는 소비이다. 두 번째 부분의 소비들은 생산의 중간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비와는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한데, 나는 그런 소비를 ‘소모’라 부르겠다. 다양한 형태들을 따로 구분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형태들은 하나의 총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소모활동은 대규모의 소모를 통해 진정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무조건적인 소모, 파멸의 원칙은 차감 계정의 경제 원칙(수입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경제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단어의 좁은 의미에서만 합리적이다)과 대립적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에서 빌려온 몇 가지 예들의 도움을 받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1)보석이란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짜도 얼마든지 많다. 우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위해 재산을 바친다. 이때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매혹적
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재산의 희생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정신분석에서 보석이 갖는 상징적인 가치와 비교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꿈속에서 배설물의 의미를 갖는 다이아몬드는 단지 대립에 의한 연상작용의 결과가 아니다. 즉 무의식 속에서 보면 배설물과 같은 보석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저주받은 물질이며 희생하도록 운명지어진 몫이다.(보석은 실제로 이성간의 사랑을 위한 사치스러운 선물로 쓰인다.) 보석의 그러한 기능적 특성은 엄청난 물질적 희생을 요구하며, 모조품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별 쓸모가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2) 종교 예식들은 인간과 동물들의 피, 말하자면 ‘희생sacrifice'을 요구한다. 어원적 의미에서 보면 희생은 성스러운 사물들의 생산을 의미한다.
우선, 성스러운 사물들은 파멸의 작용을 통해 구현된다. 특히 기독교의 성공은 신의 아들이 당한 십자가의 고통과 그 주제가 갖는 가치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는 인간의 파멸과 끝없는 타락을 표상한다.

3)스포츠 경기를 보자.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는 물론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파멸을 수반한다. 거액의 돈이 장소, 동물, 도구, 사람들의 유지를 위해서 소모된다. 경악스러울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가, 예컨대 생산을 기획할 때보다도 더 큰 에너지가 소모된다. 죽음의 위험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인 차원의 매혹의 대상이다. 그런가 하면 경기는 때때로 보너스를 과시적으로 배분하는 기회로 사용되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군중이 그것을 참관한다. 그들의 열정은 종종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도박의 형태로 내걸린다. 물론 이와 같은 돈놀이는 몇 안 되는 전문 도박꾼들을 활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돈놀이는 경기에 의해 촉발된 열정들을 분출시키는 실제적 책임자로 간주될 수 있으며,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많은 내기꾼들의 파멸을 초래한다. 그러한 파멸들은 흔히 정신착란을 초래하여 도박꾼들이 감오이나 죽음 외에 다른 출구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처음에는 사소한 소용돌이이던 것이 차츰 커다란 회오리가 되듯이, 비생산적인 소모의 여러 양태들은 상황에 따라 더 큰 경쟁으로 이어진다. 사치스러운 사회 게층(이는 경마 클럽Jockey Club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의 메커니즘, 그리고 호화로운 최신 유행 상품의 과시적인 생산은 경마로까지 이어진다. 또 주목할 사실은 오늘날 경마로 표현되는 복합적 소비 방식이 총체적 공공활동을 경마에 결부시킨 비잔틴인들의 부조리와 비교해보면 대단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4) 소모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 창작은 두 개의 커다란 범주로 나뉜다. 그중 첫 번째는 건축과 춤과 음악으로서, 이것은 ‘실제적’ 또는 외적 소모의 범주이다. 그러나 의식이나 공연에 이용되는 구체적 장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각과 회화는 건축을 두 번째 범주의 원칙, 즉 ‘상징적’ 소모의 원칙 안으로 받아들인다. 음아고가춤 역시외적인 의미를 쉽게 획득할 수 있다.
문학과 희곡은 소모의 두 번째 범주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문학과 희곡은 일차적 형태로 보면 비극적 파멸(실추나 죽음)의 상징적 형상화를 통해서 고뇌와 공포를 자극한다. 그러나 부차적인 형태로 보면 문학과 희곡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도 유혹적 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 웃음을 자극할 수 있다. 가장 덜 타락한 형태로 그리고 가장 덜 지성화된 형태로 활용되는 시는 소모의 동의어로 간주될 수 있다. 사실 시는 파멸에 의한 창조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의미는 ‘희생’의 의미와 이웃한다. 솔직히 말해서 시라는 이름은 그것이 통속적으로 지칭하는 것의 극히 드문 어떤 부산물에만 적합하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시는 환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아그이 혼란이 초래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처음 시도하는 간략한 설명을 통해 시의 보조적 형상들과 근본적 앙금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경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앙금으로서의 시적 요소를 사용할 줄 아는 특별한 인간들에게 시적 소모는 그 결과를 통해 보면 상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는 표현 기능을 떠맡는 사람의 삶을 담보로 잡는다. 시적 소모는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기만적인 형태의 행위, 비참함, 절망과 현기증 또는 분노 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일관성 없는 환영을 추구하게 한다. 종종 시인은 오직 자신의 파멸을 위해서만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며, 오물이 삶에서 배척받듯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는 운명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저속하고 피상적인 욕구들에 만족하는 평범한 삶을 사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출처] [조르주 바타이유] 저주의 몫|작성자 시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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