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의 마주침] 8/15 천개의고원 발제문

작성자
philo
작성일
2018-08-15 15:06
조회
66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 내용과 표현에서 음악까지

내용과 표현에 대하여

내용과 표현은 각각의 독립적 개념들 혹은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각각 나름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의 형식은 두구-손이라는 극 또는 사물의 학습이라는 형식을 갖고, 표현의 형식은 언어-얼굴이라는 극 또는 기호의 학습이라는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 내용이 있고, 그에 대한 형식으로서의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은 오래되었다. 마치 오늘 알려진 것 같지만, 이미 스토아학파가 이미 말하고 극단까지 역설을 몰고 갔다고 한다. 스토아 학파는 “비물체적 변형, 비물체적 속성은 바로 몸체 자체에 대해, 몸체 자체에 대해서만 말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를 들어 들뢰즈가타리는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다니 정겹구나) 표상이 아닌 전혀 다른 근거가 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인식론의 주제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비물체적 변형, 비물체적 속성은 언표의 표현된 것이면서도 몸체에 귀속된다. 하지만 그 목적은 몸체를 기술하거나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몸체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질, 능동작용과 수동작용, 영혼, 요컨대 자신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 자체가 몸체이며 표상 또한 몸체이다!” 표상은 더 이상 내용에 대한 표현의 대응 혹은 매칭이 아니다. 그것은 “모종의 개입”이다. 이러한 언어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를 비추는 것이라면 귀속하는 언어 행위는 얼마나 무용한가. 이러한 개입은 왜 일어나는 걸까? “내용을 표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용을 예견하고, 퇴보시키고, 지연시키거나 가속시키고, 분리하거나 결합하고, 또는 다르게 재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배치를 본다. “언표행위라는 배치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의 상태나 내용의 상태에게 직접 말한다. ...각각 독립적으로도 유효하다든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표상하고 다른 하나가 지시체라는 식의 명령어의 사슬이나 내용의 인과 관계란 없다. 반대로 두 선의 독립성은 배분적이며, 따라서 어느 쪽 절편이든 끊임없이 다른쪽 절편과 연계되고 다른쪽 절편으로 미끄러지거나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나란히 “개입”이라는 말이 관념론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개입의 지점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입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존재하는 것은 배치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배치이고, 우리의 존재와 인식이 그것 자체라면 우리는 배치를 아름답고 윤리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요구되는 것은 배치에 대한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미학인 것처럼 읽힌다. 주제로 돌아가서, “표현의 형식들과 내용의 형식들, 내용의 형식들과 표현의 형식들은 자신들을 실어 나르는 탈영토화 운동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니 내용에 대한 표현의 우위나 표현에 대한 내용의 우위를 설정할 수는 없”으며 이 두 형식이 서로를 전제한다는 틀 안에서 끼워 넣어지는 지점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각각의 형식을 양화하는 탈영토화의 정도들이 있고....우리가 상황이나 변수라고 부르는 것들도 사실은 탈영토화의 정도들 자체이다. 한편으로 내용의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몸체의 혼합체 또는 몸체의 결집체 안에 있는 비율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표현의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언표행위 내부에 있는 요소들이다.”
이로부터 배치물들의 본성에 대한 두 가지 일반적 결론이 도출된다. 첫 번째 축은 수평축이다. 여기에는 내용의 절편과 표현의 절편이 포함된다. “배치물은 능동작용이자 수동작용인 모체들이라는 기계적 배치물이며, 서로 반응하는 몸체들의 혼합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배치물은 행위들이자 언표들인 집단적 배치물이며,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이다.” 두 번째 축은 수직 방향의 축이며, 여기에는 “자신을 안정화시키는 영토화의 측면들 또는 재영토화된 측면들”이 속하고, 또한 배치물을 실어 나르는 “탈영토화의 첨점들”도 속한다. 이렇게 배치물의 네 가지 요소들에 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생산에 이르면 스피노자의 세계가 떠오르게 된다. 스피노자도 이들의 말, 즉 “그럴진대 내용이 인과 작용에 의해 표현을 결정한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한 걸음 물러서서 표현이 내용을 ‘반영’하는 힘뿐만 아니라 내용에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해도 말이다.”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스피노자 존재론의 암흑 속에 있던 어떤 것들이 빠져나오고 있다. 그 다름이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알고 있었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말해졌지만 이해되지 못한 문제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내용과 표현의 형식 각각의 독립성을 재인식해야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 독립성 덕분에 표현은 내용에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인식론의 역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재인식은 필요하다. 집단적 배치물인 언표행위는 내용과 표현의 형식간의 관계가 “완전히 비결정적인 채로 남아 있”지만 이러한 개입 지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기계적 배치물의 특성 또한 그렇다.
그리고 재밌는 지적이 등장한다. 들뢰즈가타리는 내용과 표현의 관계를 혼동하는 것에서 배치를 들여다보기 어렵게 하는, 그래서 개입 지점을 찾기 어렵게 하는 것으로 ‘형식의 독립성’에 대한 무지 및 그 독립성 자체가 갖고 있는 특이성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오래된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표현의 형식만 있으면 언어 체계로서 충분하다는 믿음”에 대한 지적은 내게는 처음이다. 이 지적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꼬집는다. “이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첫 번째 오류와 결합된다.” 마치 큰 문제에 매달린 부차적 문제처럼 다뤄진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언표행위를 보게 되면 “내용은 한갓 ‘지시체’의 자의성에 불과한 것이 되고 화행론은 비언어적 요소들이라는 외부적인 것으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이 전락이 가져다주는 것은 불충분한 탈형식화, 즉 충분한 추상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매개적 추상의 층위에서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를 세우고, 이 기계를 상수들의 공시적 집합으로 건립하는 것”이 한 예이다. 추상화를 충분히 극한으로 밀고 갔을 때 들뢰즈가타리가 도달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랑그의 사이비-상수가 언표행위 그 자체의 내부에 있는 표현의 변수들에 자리를 내주고야마는 층위”이다. 바로 개입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참된 추상적인 기계”가 한 배치물 전체와 관련되어 있는 양상을 본다. “그것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도표적이고 초선형적이다. 내용은 기의가 아니고 표현은 기표가 아니다. 내용과 표현은 모두 배치물의 변수이다. 따라서 화행론의 규정들과, 나아가 의미론, 통사론, 음운론의 규정들을 언표행위라는 배치물과 직접 결부시키지 못한다면 헛수고를 하는 셈이다.” 파하하하하하
그런데 왜 언어학자들이 문제 설정을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일까? 들뢰즈가타리는 언어학이 학문일 수 있는 토대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구조적 불변항이라는 문제는 언어학에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학은 외적 요소니 화행론적 요소니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순수한 과학성을, 과학 그 자체임을 표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불변항이라는 구조를 가능케 하는 6가지 요소들이 발견된다. 한 랑그의 상수들, 언어의 보편자들, 요소들을 연계시켜 주는 나무들, 그리고 모든 나무들에 적용되는 이항관계. 언어능력. 등질성. 공시성.
이러한 조건의 학문의 토대 위에서 모든 언어학자들이 동일한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촘스키의 방식에 대응하여 라보프의 언어학을 예로 든다. 촘스키는 체계의 거름망을 빠져 나가는 ‘실재’에 관해서는 학문 외적인 것으로 남겨둔다. “권리상 과학적인 연구를 가능케 하는 등질적 체계 또는 표준적 체계를 이 실재의 집합에서 재단해내야 한다.” 나머지는 학문외적인 사실일 뿐이다. 라보프는 “언어학이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양자택일, 즉 변이형들을 각기 다른 체계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구조 바깥쪽에 놓느냐 하는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체계적인 것은 변주 그 자체이다. 음악가들이 ‘주제, 그건 바로 변주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여기서 사실과 권리의 관계는 촘스키의 것과 다르다. “라보프는 사실과 권리를 달리 분배하고자 했으며, 특히 권리 그 자체와 추상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자 했다.” 권리와 추상을 구분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체계는 변주 중에 있다는 것, 체계는 상수와 등질성이 아니라 내재적이고 연속적이라는 특성을 갖는 일종의 변화 가능성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 그리고 체계는 아주 특별한 양태(가변적 규칙 또는 임의 선택적 규칙) 위에서 조정된다는 것.” 이것은 기존의 학문성에 대한 대항처럼 들린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어가고 있다.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개념이 생산(혹은 환기)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잠재성, 현재성, 실재성과 같은.
들뢰즈가타리는 ‘연속적 변주’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것의 탐구가능성, 이 개념의 권리가 증명되어야 한다. “내용의 가짜-상수”나 “표현의 가짜-상수”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변주 만들기”를 하라. “왜냐하면 변주 만들기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체 또는 매체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학문의 진정한 대상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연속적 변주를 변수 그 자체의 연속적이거나 불연속적인 성격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즉, 불연속적 변수를 위한 연속적 변주인 명령어[암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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