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8/17 『세미나11』6,7장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작성자
bomi
작성일
2018-08-17 15:21
조회
941
삶과예술 세미나 ∥ 2018년 8월 17일 금요일 ∥ 발제자: 손보미
텍스트: 자크 라캉 『세미나11』, 맹정현,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08

대상a로서의 응시에 관하여


6 눈과 응시의 분열


6_1 메를로퐁티가 일러준 길을 따라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응시의 선재성입니다. 나는 단 한 지점에서 볼 뿐이지만,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에서 응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114)

6_2 메를로퐁티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으며 나아가 분석 경험의 흐름에 따라 다소간 관심의 대상이 된 시관적 장에서, 존재론적인 위상은 그 장이 미치는 더없이 작위적일 뿐 아니라 더없이 허약한 효과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 응시는 우리의 지평에 나타난 경험의 막다른 골목, 즉 거세불안의 구성적인 결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묘한 우발성이라는 형태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눈과 응시의 분열, 바로 이것이 시관적 장의 수준에서 충동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115)

6_3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저는 우리가 세계의 광경 속에서 응시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의식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리를 '세계의 거울'로 위치시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메를로퐁티를 따라서 이야기한 우리를 에워싸는 응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채 무엇보다 우리를 응시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응시, 바로 그러한 응시에 의해 우리는 응시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118)


7 왜상


7_1 메를로퐁티는 시각 자체가 출현하는 지점을 자리매김하고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다루면서 직관의 원천으로 되돌아가고, 정립적이건 비정립적이건 모든 반성에 선행하는 어떤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을 제안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육체가 아니라 메를로퐁티 자신이 세계의 육신chair(살)이라 부른 것으로부터 시각의 원점이 출현하게 되는 과정을 복구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7_2 우리는 '보는 자인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이름없는 실체로부터 도출해내는지에 관한 탐구'가 이 미완성 저서(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구체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내가 그 일부로 속해 있었던 어떤 영롱한 광채의 그물, 이를테면 빛줄기로부터 나는 '봄' 기능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을 출현시키면서 하나의 눈으로서 등장합니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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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음, 남수인,최의영 옮김, 東文選


1 내가 진정한 사물에 도달하는 것은 바라봄으로써이고, 다름 아닌 나의 눈을 가지고서이다. (..) 사물들과 내 몸의 관계는 정말 특이하다. 내가 때로 외양 가운데 머무르게 하는 것이 이 관계인가 하면, 내가 때로 사물들 자체에게 가게 하는 것도 이 관계요, 그리고 외양들의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 이 관계인가 하면 외양들의 진동을 침묵시키고 나를 세계 한가운데로 던져넣는 것도 이 관계이니 말이다. (24)

2 타자의 시선은 나타날까? 타자의 시선은 사물들 가운데에서는 나타나지 못한다. 일반적 의견이 어떠하든간에, 내가 타자들을 보는 것은 그들의 몸속에서가 아니고 다른 어느곳에서도 아니다. 타자의 시선이 발단하는 것은 공간의 한 지점에서가 아니다. 타자는 내 쪽에서, 일종의 삽수(꺽꽂이) 또는 분열에 의해 탄생한다. (92)

3 눈에 보이는 현재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 있지 않고, 물론 시간과 장소의 밖에 있지도 않다. 보이는 현재의 앞, 그 뒤, 그 주변에서 현재의 가시성과 경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보이는 현재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는 현재는 전체가 아니다. 정확히 보이는 현재는 나의 시각을 틀어막고 있다. 즉 시간과 장소는 저 너머로 펼쳐지고 있으며 동시에, 시간과 공간은 보이는 현재의 뒤에, 심층적으로 숨어 있다. 보이는 것이 결국 나를 가득 채울 수 있고 나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보이는 것을 보고 있는 내가 보이는 것을 무의 바닥으로부터 보지 않고, 보이는 것의 중앙으로부터 보기 때문이며, 보는 자인 나 역시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 색깔, 각 소리, 각 촉각적 조직, 현재, (그러니까) 세계의(가) 무게, 두께, 살을 이루는(이룬다는) 것은, 곧 1)이들을 포착하는 자가 스스로 일종의 말아들이기 또는 중복에 의해 이들로부터 자신이 떠오름을 느끼며, 이들과 근본적으로 동질임을 느끼는 탓이요, 2)이들을 포착하는 사람 자신이 자기에게로 오고 있는 감성적인 것 그 자체이어서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감각되는 것은 회귀적으로 그의 눈에 자신의 분신 또는 자신의 살의 연장이라는 사실이다. 사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은 사물을 포착하는 사람 자신의 조각들, 그의 공간화, 그의 시간화의 조각들로서, 그것은 .. 동시적인 것과 연쇄적인 것이 어우러진 부조이고, 개체들이 차이화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과육(살)이다. (164~165)

4 하나의 보이는 것은 .. 언제나 활짝 열린 외부 지평들과 내부 지평들 사이에 가로놓인 일종의 해협이요, 유색의 세계 또는 보이는 세계의 다양한 지역들을 멀리서 가만히 건드려서 반향을 일으키게 하는 어떤 것이고, 이 세계의 어떤 차이화, 일시적인 변조이며, 그러니까 결국 색깔이나 사물이기보다는 사물들과 색깔들 사이의 차이, 유색 존재랄까 가시성이랄 것의 순간적인 결정結晶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들은 이른바 색깔들과 가시적인 것들 사이에서 그것들에 안을 덧대서 그것들을 뒷받침하며 부양하는 직물을 발견할 것이며, 이 직물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의 가능성이고 잠재성이며 살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190)

5 보는 자가 보이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보이는 것에 의해 소유될 때에만, 자신이 보이는 것에 속할 때에만, 자신이 원칙적으로 시선과 사물들의 접속에 의해 지시된 바에 따라, 보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보는 자) 자신이 기이한 역전에 의해,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는 힘을 가질 때만이다. (이러할 때야만 보는 자는 보이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 (193)

6 보는 자와 사물의 사이에 있는 살의 두께는 보는 자와 사물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보는 자와 사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 몸의 두께는 세계의 두께와 경쟁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몸의 두께는 내가 나를 세계로 만들고 사물들을 살로 만들어서, 사물의 심장부로 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194)

7 세계가 살인데, 몸과 세게의 경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 ... 보여진[보인] 세계는 나의 몸 '속'에 있지 않으며, 나의 몸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이는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세계는 살에 붙여진 살이기에, 살을 둘러싸고 있지 않으며 살에 의해 둘러싸여 있지도 않다. 시각은 보이는 것에의 참여이고 결속이기에, 보이는 것을 감싸지 못하며, 보이는 것으로 결정적으로 감싸이지도 않는다. 보이는 것의 표면을 덮고 있는 피막은 나의 시각과 나의 몸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 아래의 깊이는 나의 몸을 담고 있으며, 그러니까 결국 나의 시각을 담고 있다. 보이는 사물로서의 나의 몸은 거대한 경관 가운데 담겨 있다. 하지만 보는 자로서의 나의 몸은 이 보이는 몸의 기반을 이루며, 보이는 몸과 함께 보이는 모든 것들의 기반을 이룬다. 이 양자간에는 상호간의 삽입과 얽힘이 있다. (...)
우리는 우리가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이 이상한 유착과 함께 발견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숙고해야 한다. 시각이, 촉각이 발생하는 것은 어떤 보이는 것, 어떤 만질 수 있는 것이 자기가 속하고 있는 모든 보이는 것 쪽으로 돌아설 때, 모든 만질 수 있는 것 쪽으로 돌아설 때, 또는 갑자기 모든 보이는 것으로, 모든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한 때이다. 또는 자기(어떤 보이는 것, 어떤 만질 수 있는 것)와 모든 보이는 것 모든 만질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상호간 교류에 의해 가시성 자체가, 만질 수 있는 것 자체가 이루어질 때이다. 이 가시성 자체, 만질 수 있는 것 자체는 사실로서의 몸에도, 사실로서의 세계에도, 고유적인 것으로 속하지 않는다. - 마치 서로 마주 보게 놓인 두 개의 거울 위에서 두 개의 한없는 서랍형 영상 시리즈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 거울 영상들은 거울 표면의 어느쪽에도 진정으로 속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 영상은 다른 영상의 반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결국 두 거울 영상은 짝을 이룬다, 각각의 영상보다 더욱 실제적인 짝을 이룬다. 그리하여 보는 자는 그가 보고 있는 것 속에 사로잡혀 있기에, 결과적으로 그가 보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요컨대 모든 시각에는 근본적인 나르시시즘이 있다. 또한 결과적으로 동일한 이유로 보는 자는 자신이 행사하는 시각을 사물들 편으로부터 당한다. 그래서 나는 많은 화가들이 증언하듯이 사물들이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나의 능동성은 똑같이 수동성인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의 제2의 의미이자 본뜻보다 더욱 심오한 의미이다. 제2의 의미, 요컨대 그것은 우리가 드어가 사는 몸의 윤곽을 타자가 보듯이 외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특히 외계에 의해 보여지는 것, 외계 속에서 생존하는 것, 외계 속에 이주해 가는 것, 환영에 의해 유혹되며, 사로잡히고, 착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그리하여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여지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살'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 가시성, 이 감성적인 것 자체의 보편성, 나 자신의 타고난 익명성이다. (198~200)

8 내가 .. 어떤 임박한 경험 같은 것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이 풍경에 대해 누군가와 말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그의 몸과 나의 몸의 부합 작용에 의해, 내가 보는 광경은 그의 내면으로 넘어가고, 나의 눈 아래 펼쳐진, 나 개인에 속하는 초원의 초록은 나의 시각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시각을 점령하며, 나는 마치 세관원이 통관하는 한 사람에게서 적발해야 할 인상착의의 남자를 불현듯 알아보듯이 나의 초록 가운데서 그의 초록을 알아본다. 여기에 타아(alter ego)의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보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며, 익명의 가시성이, 즉 일반적 시각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주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시각이 두 사람 모두에게 주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 있기에 도처로 영구히 방사하는 그 원초적 특성, 개체이기에 차원이고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는 그 원초적 특성, 살에 속하는 그 원초적 특성 덕분이다. (204~205)

9 만져진 것과 만지는 자가 그리는 동그라미가 있어서, 만져진 것은 만지는 자를 붙잡는다. 보이는 것과 보는 자의 동그라미가 있어서, 보는 자는 보이는 존재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보이는 것에는 만지는 자의 기록도 있으며, 만질 수 있는 것에는 보는 자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상호적으로 내가 보고 만지는, 동일한 타입의 몸들과 동일한 스타일의 몸들 모두에는 이러한 교환이 퍼져 있다. (...) 이제부터 다른 눈들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된다. 우리의 두 눈은, 우리의 등이 들어 있는 곳의 공백 지대는, 채워진다. 이 공백 지대는 여전히 보이는 것에 의해 채워지는데, 그러나 그 보이는 것의 명의인은(표면상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205)

10 살은 물질이 아니다. 살이란 보는 몸 위로 보이는 것이 감기는 것이요 촉각하는 몸 위로 촉각되는 것이 감기는 것이다. 이러한 감김은 특히 몸이 사물을 보고 있는 중인 자기 자신을 볼 때, 만지고 있는 중인 자기 자신을 만질 때 확인된다. 결국 동시적으로 몸은 촉각되는[만질 수 있는] 것으로서 사물들 사이로 내려오고, 촉각하는[만지는] 자로서 사물들 모두를 지배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 관계를 끌어내고, 자기 덩어리의 열개 또는 분열에 의해 이 이중의 관계 역시 끌어낸다. 보이는 것들 중 하나의 주변으로 보이는 것들이 집중하는 것이나, 또는 사물들을 향해 몸의 덩치가 폭발하여 나의 피부의 진동이 매끄러운 것 혹은 꺼칠한 것이 되게 하거나, 내가 사물들 자체의 운동들과 윤곽들을 두 눈으로 좇게 하는 것; 나는 사물들에게 나의 몸을 빌려 주고, 사물들은 나의 몸에 등재되어 나를 사물들과 흡사하게 만드는, 사물들과 나 사이의 이 마법적 관계, 이 계약; 바로 나의 시각인 보이는 것의 이 주름, 이 중심적 공동空洞;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만지는 자와 만져진 것의 이 거울상 두 열, 이러한 것들은 내가 기초로 삼고 있는 밀접히 결속된 체계를 형성하며, 일반적 시각과 가시성의 항구적인 체계를 규정한다.
(세계의 살이든 나의 살이든) 살은 우발적인 것, 또는 카오스가 아니요, 자기에게로 되돌아와 자기 자신에게 적합해지는 짜임새texture이다. 나는 절대 나의 망막을 보지 못할 터이나,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사람들이 나의 눈동자 속에서 이 칙칙하고 비밀스러운 막을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여간 나는 이 점 - 내가 인간의 감각들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점 - 을 믿는다. 왜냐하면 나의 것인 세계의 광경은 대조에 의해 판단하건대 타자들의 세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고, 나에게서나 타인들에게서나 전형적인 가시성 차원들과 명백히 관계되고 있으며, 결국 시각의 어떤 잠재적 초점, 즉 .. 불투명한 몸과 불투명한 세계의 접합점에 일반성과 빛의 한 줄기가 있기 때문이다. (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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