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6] 네그리, 하트, <어셈블리> 2부 6장

작성자
july123
작성일
2018-10-06 19:45
조회
524
Part II Social Production 사회적 생산

나를 막아서는 높은 벽이 거기 있었다
페인트 칠한 표지가 있었다: 사유지,
그러나 그 뒷면에는 아무런 표지가 없었다---
이 땅은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Woody Guthrie, “이 땅은 당신의 땅(This land is your land)” (1940년 판)

왜냐하면, 사람들이 경치를 그리려 할 때, 산과 언덕(heights)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낮은 평지에 두어야 하고, 평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산 꼭대기 높은 곳에 두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성들(peoples 인민들)의 본질을 잘 알기 위해서는 황태자가 되어야 하고 황태자들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백성 가운데 속해야 한다.
---- 마키아벨리 Machiavelli, <황태자The Prince>


정치적인(political)문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적(social) 지배의 모든 현재의 형태, 특히 신 자유주의 통치와 재정 권력이 오늘날 자본주의 착취와 자본주의 통제 형태를 어떻게 동시에 확장시키고 변형시키고 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적을 아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은 투쟁을 하기 위한 몇 가지 무기들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 ---- 우리가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금융자본(finance capital)은 더 잔혹하고 더 엄격한 메커니즘의 점유(capture)와 통제를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새롭고 더 강력한 저항과 변형의 수단을 허용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재의 지배 형태를 연구하는 것은, 다중(multitude)이 스스로의 일상 생활에서 소유한 자율autonomy 위한 능력(capacities)과 (증가하는) 생산적 권력(power) 또한 드러내 준다.
그러나 권력과 함께 시작되는 정치적 현실주의는 우리들에게 뒤집혀진 세계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사회적 발달의 진정한 운동을 가린다. 만약 여러분들이 권력에서(with) 시작하면, 여러분들은 불가피하게 단지 권력만을 보고 끝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재정적 명령(finance command)의 현재 형태는 자유와 해방의 프로젝트에 대한 반응(reactions)으로 이해된다. 다른 지적인 단어로 요약하자면, 저항은 권력에 우선한다(Resistance is prior to power). 이러한 원리적(principle) 원칙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 연대기적으로 볼 때 새로운 구조의 권력에 우선한다기 보다는(종종 이 말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투쟁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우선하고 말하자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혁신과 창조의 원칙적인 창조자(author)임을 강조한다.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원리적 원칙: 다중에서 시작하라.(Begin with the multitude). 마카아벨리와 그 뒤를 이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정치적 현실주의(political realism)은 우리가 그러하길( 그렇게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에 근거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그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어떠한지에 기초를 두고 추론할 것을 요구한다: “많은 작가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또는 알려지지도 않았던 공화정(republics)이나 공국(principalities)를 상상해 왔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how one lives)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how one ought to live) 사이에는 간격(차이)가 있어서 꼭 이뤄야 할 것(what ought to be done)을 위해서, 이뤄진 것(있는 것, what is done)을 포기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유지(보존 preservation)하기 보다는 몰락(downfall)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세계를 아래로부터, 인민(people)이 있는 곳으로부터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다중(multitude)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 현재 이미 이루어 지고 있는가? 우리는 다중의 분노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열쇠는 두 가지 의미에서 점점 증가하는 생산의 사회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중multitude이 어떻게 무엇을 생산하는가 하는 두 가지 문제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다. 첫째로 다중은 자본주의 관계의 안과 밖에서 광범위한 협동적 네트워크에서 사회적으로 생산한다. 둘째로 다중의 생산은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상품들만을 생산하지 않는다: 다중은 사회 그 자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it produces and reproduces society itself). 이 두 가지 의미의 다중 사회 생산(social production of multitude)은 저항(rebellion)뿐 아니라 대체적(alternative) 사회 관계 건설의 기초가 된다.

“아래로부터”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피그램(epigraph)에서 이미 말했듯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몇 마디로 권력에 대해 충분한 개념을 표현한다. 오로지 아래로부터(from below) 우리는 위에 있는 사람들(those above)의 본질(nature)을 알 수 있다; 시민의 위치에서만 황태자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노동자의 위치에서만 자본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소위 “마카아벨리즘”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autonomy of the political)” 또는 현실적으로 국가이성(state reason)이 끼어들 여유를 주지 않는다. 반대로 권력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그들은 권력에 복종하던가 반항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그 사람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고 판단될 수 있다. 근대(modernity)의 여명기에 마카아벨리는 권력에 대한 근대적 개념(modern concept of power)을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간략히 설명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직관이 행동으로 옮겨지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 권력의 유기적 (조직적 자연적 organic)개념---다시 말하자면 자율적이고 단일 통일적인(autonomous and monolithic) 것으로 정의 되는 것---은 효과적으로 파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저 관계의 형태 속에서 권력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미 대담한 지적 사업(intellectual enterprise)이 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하는 경우까지 포함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키아벨리의 뒤를 따라왔다. E.P Thompson, Howard Zinn, the Subaltern Studies Group, 그리고 많은 다른 역사학자들은 아래로부터 쓴 글(writing from below), 예속된 자들의 관점에서 쓴 글이,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는 데 더 명료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제공해 주었음을 실증한다. W. E. B. Du Bois도 마찬가지로 예속된 자들의 관점이 사회에 대해 더 구체적인 지식과 잠재성을 제공해 준다고 한다. 그는 주장한다: 블랙 아메리칸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의식(double consciousness)은 고통인 동시에 우월의 표식이 된다; 그들은 “예지력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gifted with a second sight). 그들은 흑인 문화와 지배하는 백인 문화를 통해 사회를 더 충분하게(fully) 본다. 그리고 그들의 그들 자신들 속에, 신체에 글로 새겨진, 지배domination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Du Bois와 마찬가지로 James Baldwin은 “그의 삶, 그 모든 면에서” 미국의 흑인들은 “옥션 블록(auction block)의 기억을 드러낸다”고 쓰고 있다. “아래로부터”(from below)는 해방을 위한 광범위한 영역의 프로젝트를 지닌 위치(standpoint)이며, 이것이 우리가 지금 분석하려는 논지를 펴가려는 관점(perspective)이다.
그럼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근대 전통 속에서 비록 권력에 대한 훌륭한 몇 이론가들이 마키아벨리의 많은 분석을 공유하였지만 어째서 그것의 결론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하는가를 추적해 보자. 예를 들어 맑스 베버(Max Weber)는 권력(power/Macht)이 지배 (domination/Herrschaft)와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권력)는 한 사회적 관계에 속해 있는 한 행위자(actor)가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의 의지를 수행할 위치에 있을 확률(probability)---이 확률이 결정되는 근거와는 관계없이---이다. 후자는 어떤 주어진 특정한 내용을 지닌 명령 하나가, 다른 주어진 그룹의 인민people에 의해 복종될 확륩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합법성이라는 개념 다시 말해 명령(command)이 동의(consent)와 어떻게 묶여 있는지, 명령이 복종하는 사람들의 이익/관심을 대변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어떻게 묶여있는지 대한 생각/이해(idea)가 나타난다. 이 개념은 “정치적인 사람들의 자율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이라는 아이디어와 마키아벨리즘의 “현실주의”적 형태 (그런데 이 현실주의적 형태는 마카아벨리의 생각에 역행한다)를 형성한다. Weber는 계속해서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지배는 지배자 (ruler) 또는 지배자들 (rulers)이 분명하게 표시한 의지(manifested will (명령command)가 한 명의 또는 더 많은 타자들의 행위에 영향을 줄 의도가 있으며,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위가 마치 지배 받은 자들이 명령 내용을 행위 그 자체를 위한 행위의 계율인 것처럼 일어나게 하는 식으로 그것에(한 명의 또는 더 많은 타자들의 행위) 실제적으로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쪽에서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은 복종obedience라고 불릴 수 있다.

권력이라는 개념은 크레이토스(Kratos, a figure in Greek mythology, the personification of authority in all its forms, 힘과 권력의 신화 혹은 의인화)와 에토스(Ethos, 정신/기풍)의 변증법적 합인데, 마카아벨리의 합---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복종이 조화를 이루어 행동하는 효과적인 합---이 되고 있다. 결국 Weber는 권력의 정의를 하나의 관계로 약화시키고 있다. 저항은 명령(command/ Herrschaft)이 복종의 원형(prefiguration)으로 기려질(celebrated) 때 시야에서 사라진다.
한나 아렌트도 권력에 대한 유기적 개념(organic conception of power)에 반박하여 리바이어던을 깨뜨리는 것을 시도했다. 그녀의 글에서도 역시 권력은 관계성으로 이야기 되고 있지만, Weber와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그 관계성을 폐쇄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마키아밸리는 이 세상의 변화, 변화 상황(mutation rerum)의 영웅이다. 우선 이 변화(mutation)들은 정해진 이상적 타입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와 관계를 맺고 변형에 열려져 있는 ‘정당성(합법성? legitimation)’의 개념과 일치한다. 이런 개방성은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이다.(what characterizes democracy). 아렌트는 14세기 플로렌스에서 일어난 ‘시옴피 반란’부터 20세기 초 ‘성 피터스부르그 노동자’의 소비에트까지 펼쳐져 있는 마키아벨리적 “순간들(moments)”에서 이미 예정된 외형적 내러티브를 본다.
독재는 마키아베리 사상에 그 근거가 없다: 그는 혁명을, 지속적인 변화를, 법 제정적 권력(constituent power)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국가이성은 폐쇄되고 이미 확정된 권위(authority)의 기능이고 해석일 따름이다. 권력이라는 정해진 근본에 상호작용을 통해 정치적 차이가 확장된 조직이 존재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근본적 정신(the spirit of foundation)”, 그것은 “증가시킬 수 있는 미덕(virtue)을 통해서 그것의 활력(vitality)을 드러낸다.---그것은 토대들(foundations)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런 컨텍스트에서 아렌트는 마키아벨리를 반복해서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정치적인 것이란 개념(the concept of the “autonomy of the political”)이 지닌 비관적 형태는 줄어든다(fall away). 권력은 국민 subject의 손에 놓이게 되고 아렌트에게 “진정한(authentic)” 실천praxis은 공공적(public) 정치 행동이어야 한다. 실천적 삶(victa active)은 시민 생활(civil life)과 완전히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눌려있는 것(flattened)이 아니라 “간존재(inter-esse=inter)를 향해, 인간적 상호관계를 향해 열려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Weber의 분석 (그리고 권력관계들의 합법화legitimation of the relations of force)이나 아렌트의 발전된 개념(그녀 초기 작품에서 합법성에 대한 객관적 개념에서 그녀의 후기 작품에서 그것의 민주적 형태까지) 이나, 이 둘은 권력에 관한 모던의 지배적 정의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게 벗어나게 해 줄 수가 없다. 종국에 Weber나 Arendt가 이해한 사회적 관계성에 대적하여 the One 이 항상 승리하며, 내재되어 있는 적대적 저항을 명령의 초월성(transcendence of command)이 지배한다. 아렌트는 “황태자의 조언자(advisor to the Prince)”이 아니라 Raymond Aron의 용어를 빌리자면 “원리의 친구(confidant of providence)”인 마키아밸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Weber는어떤 대안적 가능성(alternative possibilities)도 남기지 않고 권력의 합법화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관료적 기능(bureaucratic function)의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특징은 주체성subjectivity 생산의 자기 자신만의 형태를 지지고 있으나 Weber는 정동affects, 격정passions, 그리고 개혁innovation까지도 버리는데 이것들(정동affects, 격정 passions, 그리고 개혁innovation)은 모두 “계산으로부터 도피한다(escape from all calculation)”
반대로 마키아벨리의 작품을 정의하는 근본적인 요점은, 권력을 (“정치하는 것들의 자율 autonomy of the political”을 깨뜨리고 열어 놓는) 관계로써 인정할 뿐 아니라 권력이 아래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권력은 항상 정해진 관계들을 능가한다: 그것은 사회적 갈등으로부터 넘쳐 흐르고 차오른다. 다중multitude은 권력을 가진 자들을 무섭게 만들고 다중의 무시무시함은 제어할 수 없이 넘쳐 흐르는 힘이다. 마카아벨리가 산의 정상은 산 밑에서 볼 수 있고 기술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수사적으로 그려진 황태자에게 복종하는(겸손한) 하인의 위치나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더욱이 이것은 인식론적인 위치---권력을 더 분명하게 보는 것--- 뿐 아니라 위top를 향해 아래로below부터 만들어 지는 정치적 궤도를 가리킨다. Spinoza가 Political Treatise 에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자유의 한 수단으로 해석하고, 또한 자유를 민주주의의 생산으로 소유할 때, 이것은(다중의 힘은?) 다중의 길path이 된다.
미셀 푸코 Michel Foucault는 우리가 현재 주류를 이루는 근대(modern) 권력에 대한 개념(conception)을 우리들의 동시대적 세계의 조건 안에서 도전하는 것을 해석하게 해준다. 1979년 biopolitic에 관련된 강의의 모두에서 그는 방법론적 결정(확신)을 설명한다: 나는 정치적 실행(government practice)에 대하여 말하거나 정치적 실행에서 시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주권자sovereign, 주권sovereignty, 인민the people, 주체subjects, 국가state, 그리고 시민사회civil society와 같은 개념들을 기본적이고primary, 원래적이고original, 이미 주어진 대상 already given object으로 취급하지 않기 위한 분명하고 자명한 방법임을 솔직하게 지적하려고 한다. 국가, 사회, 주권자sovereign, 그리고 인민과 같은 존재들을 선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역사를 쓸 수 있습니까?” 이 말은 대단히 래디컬한radical 아래로부터의 길 “path from the below” 을 정의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이것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수 있다. 진리truth는 새로운 존재being를 생산해 내는 어떤 생산적인(poietic) 영토(terrain)에서 형성된다. 예를 들면 해방투쟁liberation struggle은 진리를 창조해 내는 자유, 비전이적(intransitive) 자유, 그 실천들을 발전시킨다. Noam Chomsky와의 토론에서, Chomsky가 프롤레타리아의 행위가 정의justice에 근거한다고 했을 때, 푸코는 그 관계를 뒤집는다: “나는 스피노자의 용어로 대답하려고 합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전쟁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배계층과 전쟁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처음에,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잡고 싶기 때문에 지배계층과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층의 권력을 전복시킬 것이기 그러한 전쟁은 정의롭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이론가들이 “아래로부터”라는 권력의 인식론을 주창한 푸코의 말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은 어떤 주체subject의 저항도 허락하지 않는 프랑크프루트(Frankfurt)학파의 말을 반복하면서 그가 자율적이고autonomous 전체주의화하는totalizing 개념의 권력을 제안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설명은 그의 1960과 1970년대 그의 글과도 관련이 없다.(사실이 아니다.) 당시 그의 글은 강한 구조주의적 프레임워크structural framework을 보이지만, 그는 구조주의의 제약 constraint을 점진적으로 깨뜨리려고 애썼다. 첫째로 모든 개별화(individualizing) 작업과 데카르트의 주체성(Cartesian subjectivity)의 반복에 반대하여 쓰디쓴 반론을 폈다. 그리고 생성(becoming)일 뿐 아니라 다층성의 실천(practice of multiplicity)으로서 “우리we”---“나I” 와 “우리 We”사이의 관계성으로서----의 발굴excavation과 탐구exploration로 표현되는 주체의 궁핍(“destitution” of subjectd)을 통해서 이것(구조주의의 제약을 점진적 극복)을 성취하였다. 푸코는 1970년대에 미시권력micropowers이라는 개념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권력개념을 분명히 일반화했으나generalize, 결코 이 권력에 자율적이고 전체주의화하는 형태를 부여하지 않았다.---반대로 그것은(구조주의의 제약을 점진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그것을(자율적이고 전체주의화하는 형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권력의 상대적 개념이란 점이다. relational conception of power.
1970년대 주된 정치적 긴장에 푸코의 작품을 위치시켜야 한다. 그의 작품은 공장에서 더 넓은 사회적 영토로 확장되는 사회적 반감반감antogomism을 따라갔고, 새로운 형태의 투쟁의 주체화subjectivation를 분석했다. 푸코는 이 안에inside of this 완전히 들어가 있었고 그것이 그가 맑스를 넘어선 방식이다.(That is how he went “beyond” Marx.). (어떤 활동가가 원용하였듯이) 맑시즘의 경제적 버전을 넘어서는 것과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서 변형된 맑시스트 사상을 회복하는 게 필요함은 분명하다. 이것이 “생-정치 biopolitics”라는 개념이 표현하는 것이다: 삶의 모드(mode of life)에서 경제적인 것(the economic)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재채택(readotion)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주체적인 것(the subjective)과 주체화에서(이것이 “생정치학 biopolitics”이라는 개념이 표현하는 것이다). 1970년대 운동에서 발전한 것이 푸코가 (겪은) 과정 속에, 그리고 그 과정과 나란히 반영되어 있고, 푸코의 그 과정은 구조주의자들과도 그리고 경제적 프레임워크 내의 권력개념과도 분명한 단절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from below)”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그것은 “위에above” 있는 사람들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는 저항과 투쟁으로 변형된 지식을 지닌 지배받는subordinated) 사람들의 위치에서 권력을 정의한다는 의미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전체(social whole)에 대한 더 충분한 지식, 커먼(common)을 구성하는 다중적인 과업multitudinous enterprise의 기초가 되는 재능을 지닌다. 또한 아래로부터 정치적인 궤도 political trajectory가 형성된다(위치지어진다, 지정된다: 명령을 전도시킬 힘(권력) 뿐만 하니라 대안적 사회 alternative society를 정치적으로 구성하려는 능력을 가진 제도적 프로젝트가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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