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10/12 『일방통행로』 69~121

작성자
bomi
작성일
2018-10-12 19:00
조회
18
삶과예술 세미나 ∥ 2018년 10월 12일 금요일 ∥ 발제자: 손보미
텍스트: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김영옥, 윤미애,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일 뿐이다. (...)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69) (...) 우리가 할 일은 ...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70)"

현재의 삶(자본주의 이후의 삶)은 특정 이론이나 신념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삶은 빠르게 변해가는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러한 시대에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글쓰기는 거대한 기구의 심장부(엔진)에 뿌려질 신념을 만드는 포괄적이고 까다로운 글쓰기가 아니라 그 기구의 고정점과 연결부(대갈못과 이음새)에 살짝씩 뿌려질 견해들을 만드는 신속한 글쓰기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일 뿐이다.(69)"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의 형식이 어떤 면에서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라 할 수 있을까?


<아침 식당>

"꿈의 피안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몸을 씻는 행위와 유사하면서도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정화 과정이다. 이는 위胃를 통과하는 정화과정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사람은 마치 잠꼬대 하듯이 꿈을 이야기 한다.(71)"

"기억의 우월한 위치에서 꿈에게 말을 걸 수(71)" 있기 위해서는, 즉 꿈의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화과정은 '무언가'를 씻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삼키고 소화하는 과정이다.
지금은 욕망을(꿈을) 절제하고 끊어내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욕망을(꿈을) 집어삼키고 흡수하는 과정을 통해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시대다.


<표준 시계>

"천재에게는 어떠한 단절이나 힘겨운 운명적 타격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근면함이 지배하는 작업실에 슬며시 찾아든 집에 불과하다. 그 작업실의 세력권이 형성되는 곳은 미완성 작품이다. '천재는 근면함이다.' (74)"

어떤 면에서 '완성'은 사유의 성급함과 게으름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귀족풍 가구로 꾸며진 방 열 칸짜리 저택>

"19세기 후반의 가구 양식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분석하는 유일한 방식은 일종의 탐정소설을 쓰는 일이다. 이 소설의 역동적 중심에 집안의 공포가 자리 잡는다.(74)(...) 영혼이 결여된 채 집 안을 가득 채운 가구는 시체들에게나 어울릴 안락한 시설이다. (...) 마치 정부를 기다리는 음탕한 여인처럼 이름 모르는 살인자를 기다리는 부르주아 저택의 이러한 성격은 몇몇 작가들에 의해 이미 철저하게 포착되었다. (75)"

부르주아 저택은 영혼 없는 '귀족풍' 가구로 채워진다. 시체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이 부르주아 저택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채워줄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신을 시체로 채워줄 살인자를 기다린다.
영혼 없는 가구로 채워진 부르주아 저택은 생명 없는 신체, 즉 시체를 은밀히 욕망한다.


<장갑>

"동물에 대한 혐오감에서 지배적인 감정은, 동물을 만질 때 그 동물이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 혐오를 일으키는 ... 그 동물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우리 안에도 남아있다는, 그런 의식 말이다. (...) 혐오감을 극복하려고 할 때에도 그것은 과도하게 급작스러운 동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혐오스러운 그것을 재빨리 움켜쥐고 먹어치우는 것이다. 이때 아주 부드러운 피부 접촉은 금지된다. 이렇게 해서만 다음과 같은 도덕적 요구의 역설이 충족될 수 있다. 그것은 혐오감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그 혐오감을 매우 세심하게 키워 나가는 태도가 인간에게 요구된다는 데 있다. (78)"

자신과 접촉하는 대상이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움이 될 때는 언제인가. 우리는 언제 나와 접촉하는 상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는가. 혹은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길 바라는가. 먹어야 할 때. 상대를 파괴함으로써 나의 생명을 지속하고자 할 때. 혹은 지속할 수 있을 때.
어디까지 먹을 것인가. 어디까지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채식 동물과는 다른 육식동물의 슬픔, 혐오, 도덕이 있는 것일까? 자신과 가까운 것을 먹을수록 혐오감은 깊어지는 게 아닐까? 혹은 반대로 깊은 혐오가 먹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이는 결국 같은 이야기일까? 어쨌든, 먹이활동의 근원에 혐오의 감정이 뿌리내릴 때, 재빨리 때려잡고 급히 먹어치워야 할 때, 도덕적 요구의 역설이 생겨나는 것 같다.


<알림: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 어째서인가? (...)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동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81)"

"지나가는 사람"은 자신을 벗어난 곳에서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결점'(약점)에 대해 오로지 두 가지 태도밖에 취하지 못한다. 그것을 메꿔버림으로써 없애려 하거나 혹은 접근(접촉)을 금지 함으로써 보호하려 하거나. 왜냐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곳임을, 바로 거기가 사랑의 떨림이 둥지를 틀 수 있는 곳임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사현장>

"특이하게도 아이들에게는 뭔가는 만드는 작업장을 찾아가는 성향이 있다. 아이들은 건축, 정원일 혹은 가사일, 재단이나 목공일에서 생기는 폐기물에 끌인다. (...)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 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아이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사물세계, 즉 커다란 세계 안에 있는 작은 세계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81)"

아이들은 어른들이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 잘라 내버린 쪼가리들에서 "사물의 세계가 ..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아이들에게 이 쪼가리들은 완성의 틀에 들어가지 못해 낙오된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무수한 잠재성을 품은 신비로운 사물의 얼굴이다. 결코 커다란 세계에 편입되지 않는, 절대 재활용되지 않는 그 자체로 신비로운 얼굴이다.


<까다로운 여성들을 위한 미용사>

"(...) 각 감방에 사형집행에 대한 설문지를 나누어 주고 거기에 서명하게 하면서 각자 어떤 처형방식을 원하는지 고르도록 한다. 이 설문지 필기시험에서 '아는 바에 따라' 채워야 할 사람들은 지금까지는 묻지 않아도 '양심껏' 의견을 피력하던 사람들이다.(93)"

세련된 미용사는 손님이 오면 그들이 원하는 스타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헤어스타일 사진이 담긴 카탈로그를 건넨다. 그리고 자신이 주관하는 의자 위에서 그가 자유롭게 선택한 스타일을 실현한다. 손님의 까다로운 취향은 이렇게 구성된다. 이제 그는 집에서는 혹은 최신 유행의 카탈로그를 준비하지 않은 동내 이발소에서는 결코 자신의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킬 스타일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공인 회계사>

"(...) 다가올 미래의 진상을 보았던 말라르메는 시집 '주사위 던지기'에서 처음으로 광고의 그래픽적인 긴장들을 문자 이미지로 만들었다. (...) 말라르메가 발견한 것은 오늘날 경제, 기술, 공공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결정적인 일들과 예정조화를 이루는 것으로서 단자單子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었다. 문자가, 인쇄된 책 속에서 은신처를 찾아 자율적인 삶을 살아온 문자가, 이제 광고들에 의해 거리로 무자비하게 끌어내어져 경제적 카오스의 잔인한 타율성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94) (...)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문자의 발전이 과학과 경제에서의 어떤 카오스적 운영이 휘두르는 권력들에 한없이 종속되어 있지 않을 거라는 점, 오히려 양이 질로 전환되는 순간, (95) 즉 새 기괴한 형상성을 띤 그래픽의 영역속으로 더욱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문자가 돌연 자신의 적절한 사실 내용을 획득하는 순간이 올 거라는 점이다.(...) 시인들은 국제적인 이동문자를 정초함으로써 ... 그들의 권위를 새로이 얻을 것이고 또한 그 앞에서 수사학을 변혁하려는 모든 야망들이 케케묵을 꿈이 되어버릴 어떤 역할을 떠맡게 될 것이다.(96)"

고대의 수직적 문자들은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책 속에 누워 자율적인 삶을 살다가 경제적 카오스 속에서 다시 수직적 방식으로 내몰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 다시 누운 문자의 시대로 회귀해야 하는가? 암울한 발상이다. 새로움은 이렇게 세워진 문자가, 즉 지금의 "형상문자"가 "적절한 사실 내용을 획득"할 때 생겨난다.

시인들의 역할은?


<독일인 여러분, 독일 맥주를 마셔요!>

"우중愚衆은 정신적 삶에 대한 광적인 증오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정신적 삶을 확실히 없애버리는 방식을 몸뚱이를 세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98)"

접촉을 혐오하는 어리석은 무리의 구성원은 전체 구성원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린다. 자신의 뒤에 몇이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앞에는 몇이나 있는지를. 자신의 먹이가 얼마나 있는지, 자신의 천적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그들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자신의 이마에도 숫자를 써넣어야만 한다.


<응급처지>

"아주 복잡한 구역. 여러 해 동안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도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하자 일순간 훤해졌다. 마치 그 사람의 창문에 탐조등이 세워져 그 지역을 빛다발로 분해해 놓은 것 같았다.(105)"

상처가 있는 부위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구역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등장은 그곳의 복잡한 길들을 분해해 버린다. 환부와 환부가 아닌 곳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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