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 122-164쪽

작성자
ujida
작성일
2018-10-19 12:18
조회
105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김영옥, 윤미애,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122-164쪽.


<화재경보기>(124)

“계급투쟁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지가 결정될 힘겨루기가 아니다. (…) 왜냐하면 부르주아 계급이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내적 모순으로 인해 결국 몰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 몰락하느냐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몰락하느냐이다. (…) 부르주아계급의 퇴치가 경제와 기술의 발전에서 대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어느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인플레이션과 가스전이 그 신호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가가 언제 개입하고, 위험을 감지하며, 어떤 템포를 취하느냐는 것은 기사(騎士)적 사안이 아니라 기술적인 사안이다.”

맑스주의자 벤야민의 단상을 읽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잠시 들었던 생각은 “그래, 이 때는 계급투쟁으로써의 전면전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기였겠다.”였는데,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지금은 그것이 (진정) 불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성격의 “분자혁명”(펠릭스 가타리)이 대안으로 여겨진지 한참이 지났지만, 작년 한국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움직임은 이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장치가 ‘화재경보기’로 작동하며,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심지’를 자르고(혹은 잘라보려 노력하고)있는가?

+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이 부지들 임대함>(138)

“비평이란 적당한 거리두기이다. 비평은 관점과 전망이 중요하고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직 가능했던 세계에 터전을 둔다. 그동안 사물들은 너무나 뜨겁게 인간사회에 밀착되어버렸다. 이제 ‘선입견 없는 공평함’과 ‘자유로운 시선’은 단순한 무능함을 드러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 아니라면,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사물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가장 본질적이고 상업적인 시선은 광고다. 광고는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는 자유공간을 없애버리고 사물들을,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화면 밖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 나오는 자동차처럼, 그렇게 위험할 정도로 우리 앞에 가까이 밀어붙인다. (…) 궁극적으로 광고를 비평보다 그토록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빨간색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전광판 글자가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아스팔트의 물웅덩이 위에 반영된 그 글자의 붉은 빛이다.”

이 글은 비평의 몰락을 한탄하는 이들을 “바보들”이라고 칭하며 시작된다. 이어서 벤야민은 이 글을 통해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비평’과 당대 파급력이 급부상한 ‘광고’를 비교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 두 형식이 사물을 바라보는 거리/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비평과 광고는 ‘돈’을 매개로 사물과 관찰자/비평가와의 거리가 좁혀진다는 공통점 또한 지닌다. 벤야민은 결국 “우월함”, 즉 파급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보여지는 방식이라는 점을 짚으며 글을 맺는다.
나아가, 상품의 판매와 직결되는 광고나 돈에 의해 매수되는 비평가의 상황에 대해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 글의 제목이 왜 “매매함”이 아니라 “임대함”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벤야민이 글에서 언급한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은 결국 해당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우리는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에 닿거나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영역을 시각적으로 잠시 “임대”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벤야민은 이 글을 통해 그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셀프서비스 식당 “아우게이아스”>(141)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 (…) 혼자서 하는 식사는 삶을 힘겹고 거칠게 만들어버린다. (…) 음식은 더불어 먹어야 제격이다. 식사하는 것이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나누어 먹어야 한다. 누구와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식탁에 함께 앉은 거지가 매 식사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나누어주는 것이었지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담소가 아니었다. (…)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평등해지고 그리고 연결된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곳에서는 경쟁의식이 싸움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 글은 벤야민이 나고 자란 환경을 은연중에 시사한다. “유복한 유대계 부르주아 집안 출신”인 벤야민에게 음식은 ‘나누어’ 먹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걸인을 식탁에 초대할 수도 있었던 그에게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평등”과 “연결”이다. 그러나 2018년인 지금도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평등”으로 읽히는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주인공 엘리오와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의 한 교외에서 여름을 보낸다. 엘리오의 아버지는 고고학자이고 그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미국 학자 올리버가 그 곳에 초대된다. 이들은 음악과 미술, 시에 대해 이야기 하며 여유로운 일상 속에서 각종 음식들을 향유하지만 이들을 위해 요리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고용된 이탈리아 시골 아낙이다.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식탁에 손님들을 초대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우아한 행위는 르네상스 교회의 파사드와 같이 초-노동적 미학을 자랑하며 가장 앞 면에 세워져있을 뿐, 막상 그 이면에 있는 노동은 가리고 만다. 이 글을 쓴 벤야민은 (아마도) 손수 요리를 한 적이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아마도 평생 ‘집밥’을 손수 지어서 가족들을 먹이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느껴본 일도 없을 것이다.


<우표상>(143)

“도장이 찍힌 우표만 모으는 수집가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 그들은 우표의 제의적 부분, 즉 도장을 중요시 여긴다. 왜냐하면 도장은 우표의 어두운 이면이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머리에 성자의 후광을 새겨 넣은 위엄에 찬 도장이 있는가 하면, 암살당한 이탈리아 왕 훔베르트의 머리에 순교자의 왕관을 씌운 예언적 도장도 있다. 그러나 어떤 가학적 환상도 핏물이 새겨진 띠로 얼굴을 덮고 지전처럼 지구의 전 대륙에 균열을 내는 저 어두운 과정에 근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능욕 당한 우표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톱니바퀴 모양의 하얀 레이스와 이루는 대조를 바라보는 도착적 기쁨은 또 어떠한가. 우표를 꼼꼼히 살피는 사람은 탐정이 되어 평판 나쁜 우체국의 흔적을 찾아내고, 고고학자가 되어 낯설기 짝이 없는 장소의 이름 조각을 찾아내는 기술을 지녀야 하며,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카발리스트가 되어 그 세기에 관한 모든 상세한 사실들의 기록문서를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

벤야민이 사물의 이미지를 관찰하는 행위를 통해 역사적 징후를 읽어내고 사유를 전개해나간다면, 우표는 그 대표적인 사물/이미지이다. 우표는 그 탄생과 관련된 다양한 배경들, 즉 발행 지역이나 연도,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이미지로 태어난다. 벤야민이 지적한 것처럼, 대부분의 우표들은 ”톱니바퀴 모양의 하얀 레이스“를 지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당대 권력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적 상징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편배달을 위한 추가 요금 목적으로 단순히 소비되기도 한다. 우표는 단지 그 이미지 자체로도 수많은 역사적 맥락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벤야민이 말한 ”제의적 부분“이자 또 다른 맥락의 이미지, 즉 우편국의 도장이 찍혀야만 그 쓰임새와 의미를 획득한다. 벤야민은 이를 우표가 당하는 ”능욕“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되는 이미지가 범람하는 동시대에, 오히려 우표만큼은 더 이상 이미지로 기능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죽음을 말하는 지금, 우표는 활자가 찍힌 스티커로 대체되었다.


<긴급기술지원대>(148)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한 게 있을까. (…) 진실은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바란다. 누가 참된 작가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경고음을 셀 수 있었겠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앞서 언급된 <화재경보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벤야민은 글쓰는 이의 책무가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나아가 이 글에서 벤야민은 ‘글의 구성’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오달리스크”에 비유하여 이야기 한다. 그는 “진실”을 담은 글이 때로는 “왜곡”되거나 쫓기듯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면서도, 결국 “승리”에 차서 사람들 사이로 달려 나가게 되며, 그때 이 글이 “잘 구성되어져” 있어야 하고, “건강하게 구축되어져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마권 매표소>(158)

“속물근성은 사랑의 삶을 철저히 사적인 일로 만들 것을 선포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삶에 있어 구애는 단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말없는 완강한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구애가 이토록 철저하게 사적인 것이 되고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야말로 연애에서 정말 새로운 무엇이다. 그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랑 유형과 봉건적 사랑 유형은 구애에 있어 설득 대상이 여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쟁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를 그녀의 ‘자유’보다 더 존중한다는 것, 즉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은 채 그녀의 뜻대로 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애적 강조점을 공적 영역으로 옮겨놓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봉건적이다.”

이 부분에서 벤야민이 말하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적/봉건적 사랑 유형은 무엇을 말하는가? 설득 대상이 여자이기보다 오히려 “경쟁자”라는 점은 어떤 뜻인가? 그녀의 ‘자유’보다 그녀를 더 존중한다는 것, “성애적 강조점을 공적 영역으로 옮겨 놓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이것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적/봉건적 사랑과 연결되는가?


<맥주 스탠드바>(159)

“도시는 방문의 대상이기보다 쇼핑의 대상이다. 선원들의 가방에는 홍콩에서 구입한 가죽 혁대가 팔레르모의 파노라마와 슈테틴의 소녀 사진 옆에 나란히 놓여있다. (…) 그들에게 산업의 국제적 규범은 뼈에 스밀 정도로 친숙하다. 그들은 야자수나 빙산 따위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선원은 가까움을 ‘먹어 치웠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세밀한 뉘앙스일 뿐이다. 그는 각 나라들을 건물들의 양식이나 풍경을 채우고 있는 장식에 따라 구별하기보다는 생선의 요리방식에 따라 구별할 수 있다.”

도시는 지금도 방문의 대상이기보다는 쇼핑의 대상인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미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품목을 한국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각종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카페는 몇몇 로컬리티를 강조한 항목들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거의 균등한 서비스를 어디에서나 제공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진귀하거나 낯선 물건을 쇼핑하기 위해 여행하지 않는다. 포스트-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원재료에서부터 그것이 가공/유통되는 물건들과 함께 끝없이 여행하며, 어느 지점에서 보다 우아하게 착취할 수 있는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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