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정동정치』를 논하다ㅣ김미정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11-08 22:34
조회
1190
 
 

『정동정치』를 논하다


김미정(문학평론가)


 

 

1. 한국에서의 ‘affect’론


스피노자-들뢰즈의 계보에서 소개되고 전개되던 한국의 정동론이 다양한 분과의 사유틀이나 문제의식으로 확산된 것은 브라이언 마수미를 비롯한 영미 정동론의 번역, 소개에 힘입은 바가 클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번역된 『정동정치』는 정동개념에 대한 항간의 오해나 혼돈스러운 부분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이후 심화된 논의와 쟁점화가 이어질 것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마수미는 『정동정치』 결론부에서 정동을 둘러싼 여러 선입견과 오해에 직접적으로 응답합니다. 지금 저는 그중에서 “정동은 선이다.”라는 편견에 대한 응답(296쪽)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 관념은, 개인적으로 정동과 관련해서 제 사유 관습에서 좀처럼 떨치기 어려운 이미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수미도 이야기하듯 “스피노자의 ‘기쁨’ 개념에서 온 오해”(295쪽) 혹은 들뢰즈의 정동 해석이 한국에서 받아들여진 맥락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즉, 90년대 이후 퇴조한 ‘목적서사’로서의 이데올로기나 근대적 ‘희망의 원리’에 정향되었던 집합적 경험이, 다른 방식의 탈영토화에 대한 고민과 연동되어 주목받은 것이 스피노자-들뢰즈의 affect론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좀 크게 보자면 80년대 이후 한국의 학술운동장의 변동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주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 연구자는 한국의 정동론이 “학문적 기여도와는 별개로, 학문을 정치적, 윤리적으로 도구화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인정투쟁하는 장소”(함돈균)라고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개인적 의견은 잠시 차치하더라도, 이 말은 한국의 정동론이 80년대 이후 진보담론(이론)의 사정, 이행과 관련있음을 암시합니다. 분명 한국에서의 ‘affect’는, 큰 범위에서의 문화번역, 사상번역에 속할 주제이면서, 80년대 이후 한국의 학술운동과 이론장의 지형 속에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동이 아카데미즘이나 분과학문장의 필요와 관련된 요청이라고만 할 때, 정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더 난망해집니다. 제가 지금 공유하고 싶은 것은, 마수미가 이 신간에서 분명히 암시했듯, ‘정동’ 개념이 ‘새로운 이론’이나 학문적인 방법론이기 이전에, (에피스테메 이행에 상응할) 이 세계와 삶의 변화들을 사유하고 실천하는데 도움이 될 도구라는 믿음입니다.


2. 오늘날 세계의 조건과 정동


마수미는 2000년대 부시 정권이 어떻게 경보시스템과 미디어를 통해 각 사람의 자극감응성(irritability), 신체의 감응성(responsiveness)을 겨냥했고, 거기에서 촉발, 활성화되는 공포와 위협의 정동을 통해 제어(control)권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정동은 이미 우파의 통치술 속에서는 효과적인 조정(modulation)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2000년대 후반 송출되기 시작한 언론재벌의 종편미디어도 떠올려봅니다. 나이 많은 세대를 신체적, 정동적, 정치적으로 결집시키는 장치들의 디테일함(화면 색감, 발성과 톤, 방송세트, 송출볼륨)도 떠올려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일찍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마수미가 주목한 정동적 조정(modulation)의 장치들 속에서 정향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한편, ‘나뉠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나뉠 수 있는’ 분인(dividual)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들뢰즈가 (푸코의 규율사회와 대비되는) 권력, 시스템의 속성을 ‘제어사회’라는 말로 잘 포착했고, 이후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듯, 오늘날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분산형 정보 네트워크로 용해됩니다. 동시에 그 양식은 개개인의 신용카드 사용이력, 브라우징 이력, 신용평가, 소비자 프로필, 의료기록, 생체인증정보 같은 일련의 마이크로한 데이터 흐름이나 집적에 따라서 미세하게, 또는 무제한으로 변화하며 조정됩니다. 글로벌한 제어사회 속에서 개인은 ‘분인’으로 분할되고 그 미세한 정동의 흐름을 조정하며 조직하기 위한 장치를 정비합니다.


즉, 오늘날의 미디어 테크놀로지 환경 속에서는 개인/집단 식의 이분법이 좀처럼 통용되지 않습니다. 마수미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이야기해왔지만 오늘날 세계는 강제나 억압이 아닌 공모, 동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정동 수준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콘트롤하게 합니다. 인터넷은 탈중심적이 아니라 분산적인 네트워크이고 고도로 콘트롤됩니다. 규율(훈육)사회가 고정적이고 개별적인 단위를 근거로 작동하는데 비해 제어사회는 유연하고 조정가능한 네트워크를 통해 기능한다고 말해집니다. 다양한 레벨에서 많은 매개변수를 조정하면서 우리의 주체성이나 아이덴티티를 분해하고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마수미가 주목하는 정동이 자주 테크놀로지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흥미롭습니다. 그는 사회를 구조(혹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과정” “작동” “역동”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구조화(self-structuring)”(138쪽)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체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 경험의 어떤 양태를 산출하고 그런 것이 어떤 생명 형상들로 발전할지, 그리고 그런 발전에서 어떤 권력체제가 발생할지에 대해 사고할 필요를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삶의 조건과 ‘정치’를 사유하게 만듭니다.


한편 구글,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거대 플랫폼에 늘 접속해 있는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검색, 광고터치, 개인정보 제공 등등) 노동력을 제공하고 우리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합니다. 플랫폼기업이 세팅해놓은 어떤 방향성 속에서 우리의 정동적 소통은 부지불식중 일정한 흐름을 갖고, 애초의 기원과 무관한 정보의 자율적 회로를 갖춰갑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빈번하게 경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문제적 정동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혐오’ 같은 것의 확산 회로(테크놀로지-자본주의-법-제도)와도 연결지어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는 점입니다. 마수미가 계속 미디어를 염두에 두며, 혹은 대상으로 삼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즉, 정동을 대상으로 하는 통치술과, 그것이 대중 안에서 자발적으로 변형, 유통되는 오늘날 소통의 메커니즘은, 정동정치의 각별한 현장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정황들을 생각하면 ‘정동’은 이미 횡령된 개념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동 개념은 우파정치 혹은 파시즘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과 더 친연성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마수미는 “정동 및 지각-능통(perception-savvy)”(107쪽)을 다루는 우파통치술을 주목하면서 ‘존재력(an ontopower)’의 양가적 측면을 논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성은 늘, 최첨단에서 정동적이다. 우익이 이걸 잘 이해했고 활용했다.”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동은 왠지 파시즘과 친연성을 띤 이미지처럼 전달됩니다.


3. 정동의 힘


하지만 마수미는 『정동정치』를 통해 다시 분명히 해둡니다. 정동은 선악을 모른다고요. 그리고 “잠재적인 것이 파시즘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파시즘이 정동정치에 내재”하지는 않는다고도(108쪽) 말합니다.


앞에서 저는 “정동은 선이다”라는 이미지와 믿음을 오랫동안 떨치지 못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기쁨으로 정동하라’는 스피노자-들뢰즈의 명제를 ‘힘’ ‘강렬도’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은 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수미의 말대로 스피노자의 기쁨이 종종 오해되는 것과도 관련됩니다. 스피노자의 기쁨은 정서적 좋음, 선의 상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라는 힘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이 ‘기쁨’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애초에 ‘정동=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기쁨(존재의 역량)’을 희망의 원리로서의 ‘목적’처럼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수미가 희망, 목적, 낙관을 거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희망’을 비관/낙관의 이분법으로부터 떨어뜨리려고 애씁니다. 대신, 존재를 변이시키는 강렬도의 매 지점이 존재하고, 그 ‘문턱’을 넘을 때마다 우리는 다른 장으로 이행할 수 있음을(287쪽) 강조합니다. 즉, 정동이 어떤 개체적 정서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사유대로 ‘힘’ ‘존재의 역능’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마수미의 말처럼 정동은 파시즘적일 수도 진보적일 수도 있고, 반동적일 수도 혁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정동이 “사변적으로 움직임의 제스처를 취하는 초개체적 욕망의 정향”(296쪽)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즉, 촛불광장과 태극기집회를 가르는 것은 단순히 즉자적으로 촉발되고 활성화되는 정동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정동은 역사적, 공간적으로 축적된 에토스를 매개로한 정향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그가 정동의 ‘기폭작용(priming)’을 말한 것도, 정동정치가 원초적인 자극-반응 체계가 아니라 ‘조율’(modulation)과 관련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율은 “간섭과 공명”입니다. 정동은 일방향적인 것이거나 상호작용적인 것이라 아니라, 주체/대상으로 나뉘기 이전 혹은 그것을 가로지르며 작동합니다. 정동과 파시즘 사이 오해를 말하면서 마수미는 ‘사유의 부재’로 오해되기 쉬운 (정동적)“비의식적 과정”을 “배아적 사유”(들뢰즈, 가따리) “다가오는 행위 속에서 존재의 역량을 표현하는 시간의 강요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109쪽)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결정적인 과제는 “우리들 몸체들 안” “우리 삶의 부상” “맨 활성” “집단적 장의 모든 작은 틈새들” “안”에서(168쪽) 우리의 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맨활성’ ‘잠재성’으로서의 정동의 영역에 놓인 것을 어떻게 현실화시킬지가 과제가 됩니다. 태극기 집회와 촛불광장 사이에서 어디를 향하고, 어디와 관계를 끊을 수 있을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문제, 그리고 그 회로를 만드는 것이 관건인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잠재성의 사유를 ‘어울림(관계)의 정치’(a politics of belonging)(45쪽)라는 개념을 통해 제안합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론에서 인터랙티브 아트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관계의 기술”을 미학의 원리로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관계의 정치’ ‘관계의 기술’은 미학이나 정치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새삼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무엇을 소유(having)하고 있는지, 즉 ‘정체성’으로 환원되는 방식의 존재론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마수미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소속, 관계(belonging)을 바탕으로 하는 존재론입니다. 이런 존재론은 결코 “인간-대-인간의 돌봄”이나 개별적으로 구획된 주체/대상 사이의 돌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원리상 ‘정동적’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암시되어왔듯 정동은 휴머니즘, 인간에 대한 다른 사유를 제안합니다. 그가 말하는 ‘어울림(관계)의 정치’란 따뜻한 휴머니즘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건-기반 돌봄(event-based care)”의 한 형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어울림(관계)의 방법에 있어서 “공통언어”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대목은 잘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공통성 차원의 집단적 정치”(113쪽)를 회의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논의가 mole적 주체성 이야기로 오해되는 것에 대한 강조처럼도 보입니다. 이미 주어진 공통성에서 출발하는 정치의 나이브함을 경계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갈 의지나 노력에 대해서까지는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의 common에 대한 견해가 더 궁금하긴 합니다. 이 책에서의 ‘공통언어의 거부’는, “합의가 언제나 지배-권력의 산물”이었다거나 “보편적” 무엇을 찾는 프로젝트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대목과 함께 읽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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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18년 8월 26일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개최된 『정동정치』 서평회에서 발표되었으며 ( http://bit.ly/2QqAQth ), 2018년 11월 7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bit.ly/2z8Le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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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가상과 사건 ― 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정유경 옮김, 갈무리, 2016)


사건은 늘 지나간다. 어떤 사건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지나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현실적으로 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금-존재했던 것과 곧-존재하려고-하는-것을 포괄하는 경험을 지각하는가? <가상과 사건>에서 브라이언 마수미는 윌리엄 제임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질 들뢰즈 등의 저작에 의존하여 ‘가상’이라는 개념을 이 물음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전개한다.


가상계 ―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1)


윌리엄 제임스의 급진적 경험주의와 앙리 베르그송의 지각에 관한 철학을 들뢰즈, 가타리, 그리고 푸코와 같은 전후 프랑스 철학의 여과를 통해 재개하고 평가하면서, 마수미는 운동, 정동, 그리고 감각의 문제와 변형의 문화논리를 연결시킨다. 운동과 정동 그리고 감각의 개념들이 기호와 의미작용만큼이나 근본적인 것이라면, 새로운 이론적 문제설정이 출현한다. 또한 그 개념들과 아울러 과학과 문화이론의 새로운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외 옮김, 갈무리, 2015)


이 선집은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정동의 힘 ― 미디어와 공진(共振)하는 신체(이토 마모루 지음, 갈무리, 2016)


전자미디어가 창출하는 네트워크가 인간사회의 기본적 환경의 하나가 되면서 생기는 사회현상 및 인간의 지각이나 감각의 변용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책이다. 포스트포디즘적 산업구조는 정보서비스 산업을 확대시켰고, 지식이나 커뮤니케이션, 감정 등을 자본축적의 자원으로 활용했으며, 한편 불안정한 노동자층을 글로벌하게 양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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