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8.11.8] 디지털 시대 새로운 사회운동의 선구자, 바우웬스를 읽자 / 전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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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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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8.11.8] 디지털 시대 새로운 사회운동의 선구자, 바우웬스를 읽자 / 전명산 작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232


모든 양해를 구하고 아주 건방진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필자는 사회 운동을 하는 분들로부터 ‘나는 기술을 잘 몰라서…’, ‘나는 기계치라…’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는 그때마다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그 말을 할 때마다 당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이 열 명씩 줄어 간다”고….


21세기에 이르러 기존의 사회운동 진영은 새로운 장벽에 직면했다. 크고 작은 형태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온 국가권력은 물론이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가치를 포획하는 자본권력의 지배력이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피케티가 발견한 간단한 공식 “r > g”(r은 자본 수익률, g는 경제성장률)로도 증명된다. 그리고 여기에 기존에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장벽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은, 인류가 수천년간 익숙해져서 이제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종이와 활자 문화를 대체하면서, 사회의 미디어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종교개혁의 기반이 된 인쇄 문화


수천 년 동안 종이 문화는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개인들끼리 소통하고 조직을 만들고 사회시스템을 운영하는 일들에 기반 기술로 작동해 왔다. 종이와 활자 문화는 사회 변화의 과정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쇄 문화는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면서 종교개혁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 역시 1980~90년대 사회운동에서 찌라시(인쇄물)와 출판물은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8~90년대 운동에서 ‘불법 유인물’과 불온 서적을 제외하면 운동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다. 사람들은 정부와 언론이 감추었던 사실들, 세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담은 유인물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거리에 뿌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 당시에는 감춰진 사실을 들춰내고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확신시키고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데 있어서 종이와 활자문화보다 유용하고 접근하기 쉬운 미디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종이에 쓰여진 텍스트로부터 ‘향수’ 이외에 더 이상 그 어떤 변화의 기회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디지털 정보처럼 쉽게 복제될 수 없고 쉽게 확산될 수 없고 빛의 속도로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이와 활자 문화는 이미 낡은 미디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운동이 지금 사회 환경에 맞는 어떤 도구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디지털 기술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디지털 기술을 반드시 익히고 활용해야할 도구가 아니라, 마땅히 그 활용가능성과 활용처를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이해하고 해석해서 기술이 제공하는 새로운 관계 형성의 가능성 등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안해도 되는 것으로 나는 기술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술에 이미 익숙해져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인들 입장에서 볼 때, 바로 이러한 점이 사회 운동 세력들이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며 고전적인 방식에만 머물러있는 시대착오적인 집단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인이다. 적어도 새로운 기술 문화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한국의 사회운동 세력은 보수주의에 물들어 있다.


종이문화에서 정보의 흐름은 일방적


종이 문화에서 디지털 문화로의 전환은 단순히 종이와 활자가 디지털 기술로 전환되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다. 종이 문화에서 정보의 흐름은 일방적이었다. 정보는 소수 혁명가들, 이론가들, 조직의 수뇌부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되었고, 생산자로부터 ‘대중’이라 불리던 소비자들에게로 일방향으로 흘렀다. 이런 이유로 80~90년대 운동은 위계적인 조직을 중심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었다. 위계적인 조직은 소수의 전위 운동가들에 의해 생산된 정보를 일방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안정적으로 다수의 개인들에게 전달하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운동 현장에서 조직을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보다 조직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그 조직들 내부에서는 군대보다 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이 작동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소통이고 피드백이라면, 이러한 구조에서는 일상적인 소통과 피드백이 작동하기 힘들다. 정보를 확산시키는 작업 자체만으로도 벅찬데 그 정보에 대한 피드백을 유통시킬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근대를 관통하는 핵심 사조인 계몽주의 역시 바로 이러한 기술 문화적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계몽은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지식이 없는 사람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데, 종이와 활자 문화에서는 이 구분이 확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에서 계몽주의를 비판하고 계몽주의를 벗어나고자 했던 수많은 사상과 운동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운동은 계몽주의의 주변에서 궤도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에서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층은 소수의 전위활동가들이 아니다. 다수가 정보를 생산하고 생산된 정보는 사방으로 실시간으로 퍼져나가며, 피드백 역시 실시간으로 유통된다. 종이와 활자 문화에서는 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력과 자원이 들어가는 작업이었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아주 쉽게 그것도 실시간으로 진행된다. 종이와 활자 문화에서는 해당 미디어를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인들, 소수의 엘리트들, 이론가들이 평범한 개인들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설 수 있었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새로운 기술에 익숙한 다수의 개인들이, ‘스스로를 기계치로 자처하는’ 지식인들, 엘리트들, 조직의 수뇌부들보다 더 명민하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정보의 생산 양식도 정보의 유통 양식도 모두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특징 덕분에 디지털 기술은 사회 운동에서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21세기에 중요한 사회적 모멘텀을 만들었던 거의 모든 사회운동들이 새로 등장한 디지털 기술에 기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반세계화 운동을 위해 전세계 활동가들이 시애틀에 모여들어 각 소규모 그룹들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하며 거리를 장악해 들어가 결국은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켰던 1999년 11월의 시애틀 전투에서는, 거리 곳곳에 있었던 무선인터넷이 이 자발적인 게릴라 활동의 매개체가 되었다. 2009년 6월 이란의 엄지혁명에서는 휴대폰 문자가 혁명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홍콩의 우산혁명에서도 미국의 월가 점령 운동에서도 인터넷은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시키고 사람들을 모으는 가장 중요한 활동의 매개체로 작동했다.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수없이 반복된 촛불집회에서 집회 일정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모든 집회 현장은 수많은 게릴라 기자들에 의해 생중계되었으며, 집회 후에는 수많은 인증샷과 후기들이 공유되었다. 운동의 방향, 운동 방법, 지도부의 존재가치나 역할에 대해서 수차례의 치열한 논쟁들이 공개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한국의 진보정치세력이 머물고 있는 곳


이러한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발맞추어 2010년 이후에는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 운동 세력들이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단순히 기존의 시스템을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들이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도구, 의사결정 도구 등을 직접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고라보팅, 루미오, 데모크라시 OS와 같이 다수의 실시간 의사소통, 다수의 직접적인 참여, 직접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툴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보급하면서, 디지털 민주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활동들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세계적인 흐름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의 진보정치세력이라고 자처하는 곳들은 여전히 홈페이지와 게시판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그렇게 무시해왔던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이미 7년 전에 카카오톡으로 대선을 이겼고, 2018년에는 유투브로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단언컨대, 아무리 좋은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렇게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 툴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활용할 수 없는 정치 조직들은 점점 더 축소되고 왜소해지며 사회에서 존립 근거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기술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며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 그것을 분석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기술 중에서도 특히 미디어와 관련된 기술의 변화에는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고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다.


2005년에 이미 P2P재단 설립한 바우웬스의 혜안


미셸 바우웬스는 디지털 기술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 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 중 하나다. 필자는 바우웬스를 두 번 만났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엄청난 활동력과 뛰어난 직관과 탁월한 해석 능력을 보여주었고, 필자의 상상력을 자극했었다. 바우웬스는 21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P2P 기술과 P2P 생산 문화에 특별히 천착해온 이론가이자 실천가이다. 그는 이미 2005년에 P2P 재단(P2P Foundation)을 세우고 P2P 기술과 문화가 가진 혁명성을 확장하는데 주력해왔다. P2P 기술은 동등한 권한을 가진 컴퓨터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서로 서버이자 클라이언트 역할을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술 안에 민주주의, 동등한 권력, 자발적인 참여 그리고 참여에 대한 보상 로직들이 작동하고 있다. 이 혁신적인 기술이 지금까지는 단지 이동키나 비트토렌트 같은 파일 공유 서비스 정도에만 사용되어 왔기에, 기존 산업계에서는 다소 불온한 음지의 기술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이 P2P 기술이 마침내 블록체인 기술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중이다. P2P 기술이 가진 파괴력이, 단순한 파일 공유 수준을 넘어 경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책은 블록체인 기술이 바웬스의 눈에 들어오기 전인 2014년에 쓰여진 글이라, 이 책에서는 아직 블록체인을 본격적으로 주목하고 있지 않다. 최근 바웬스는 블록체인 기술에 상당한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P2P 생산 문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라는 혁신적인 산업 영역을 만들어냈다. 개인들이 위계적인 조직에 속하지 않고 네트워크 상에서 자발적으로 협업을 하면서, 리눅스, 아파치, 하둡, 워드프레스와 같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같은 블록체인 기술 역시 이러한 오픈소스 문화의 결과물 중 하나다.


바웬스는 『네트워크 사회와 협력 경제를 위한 미래 시나리오』라는 책에서 P2P 기술이 가진 특징과,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생산물들 즉 P2P의 산물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한다. 그는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들춰내고 거기서 가능성을 발견해서 그것을 최대한 확장하려는 전략을 실행 중이다. 그의 이론과 활동 이력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궤적이다.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사회운동의 선구자, 바우웬스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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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사회와 협력 경제를 위한 미래 시나리오 | 미셸 바우웬스·바실리스 코스타키스 지음 | 윤자형·황규환 옮김 | 갈무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