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_발제] 제 4고원(200-213)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18-11-24 10:18
조회
470
제 4고원.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p. 200-203 다수와 소수

“다수”와 “소수”는 두 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두 가지 사용 또는 두 가지 기능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독일어로 글을 썼던 체코인 유대인 카프카는 독일어를 소수어로 창조)

변주의 연속체를 만듦으로써, 그리고 상수들은 조이고 변주들은 풀어주도록 변수들을 조작함으로써, 언어가 말을 더듬도록 하라. 또는 언어가 “삐약삐약 울게” 하라.

즉 소수어에는 어휘적 형식들이나 통사적 형식들의 빈곤과 감소가 있으며, 한편 변화를 겪는 결과들의 기묘한 증식이나 감소가 있으며, 한편 변화를 겪는 결과들의 기묘한 증식과 과잉과 바꿔 말하기에 대한 취향이 있다.

빈곤과 과잉 속에서 좌표는 거부되고 상수적 형식은 해체되며 잠재 차원의 차이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한 언어가 이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그 언어는 악보 표기법뿐 아니라 음악 그 자체에도 더 가까워진다. inq. 시, 노래

빼기와 변주, 삭제와 변주, 이것은 똑같은 조작이다. 따라서 다수어 또는 표준어에 대해 소수어의 특징은 빈곤과 과잉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표준어를 소수어로 취급하기, 다수어의 소수화-되기라는 절제와 변주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다수어와 소수어를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라 되기(=생성)의 문제이다. 방언이나 사투리로 재영토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를 탈영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는 소수어, 방언, 또는 나만의 말을 발견해야만 하며, 거기에서 출발해야 자기 자신의 다수어를 소수어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소수파”라 불리는 작가들의 힘이며, 이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하게 위대한 작가들이다. 자기 자신의 언어를 반드시 정복하기, 말하자면 다수어 사용에서 반드시 절제에 도달하기, 그래서 언어를 연속적 변주 상태로 만들기. 우리가 2개어 병용자나 다국어 병용자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언어 안에서이다. 소수어를 사용해 다수어를 자아내기. 소수파 작가는 자기 자신의 언어 속에 있는 이방인이다.

p. 203 – 205 다수파의 상수, 소수파의 생성

다수파는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인 도량형 원기, 즉 표현이나 내용의 상수를 내포하고 있다. “성인 남자 인간 (homme, man)”은 모기, 아이, 여자, 흑인, 농부, 동성애자 등보다 수적으로 적더라도 다수파임이 분명하다. 이는 그가 두 번 나타나기 때문인데, 한 번은 상수 속에 나타나고 한 번은 상수를 추출해 내는 변수 속에 나타난다. 다수파는 권력 상태 또는 지배 상태를 전제로 한다. 결코 그 역이 아니다. (...) 당신의 선택이 상수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당신에게 선택지를 주는 선거 활동이나 다른 모든 활동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당신은 사회의 변화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inq. 타락한 정신분석적 글쓰기, 저녁의 구애 (편혜영)

그러나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역전된다. 왜냐하면 다수파는 추상적 표준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한은 결코 그 누구도 아니며 항상 <아무도 아닌 자>, 즉 율리시즈이지만, 소수파는 그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 한에서 모든 사람되기이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인간 전체(남성과 여성이 모두 포함)와 관련해서 여성-되기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생성을 가능케 할 뿐이다. 여성은 이 생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자기 자신이 이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본질적인 것은 언어 A나 언어 B에 있지 않고 오히려 “실제로 언어 B가 되어가고 있는 언어 A에 다름아닌 언어 X에” 있다는 점 –파졸리니

소수 의식의 보편적 형상은 만인이 생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창조란 바로 이 생성이다. 우리가 다수파가 됨으로써 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형상은 바로 연속적 변주인데, 그것은 넘치거나 모자람으로써 다수적 표준의 표상적 문턱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진폭과도 같다. (...) 오히려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p. 206 - 208

다수파 양식과 소수파 양식은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인데, 전자는 언어에서 상수들을 뽑아내는 방식이고 후자는 언어를 연속적 범주로 만드는 방식이다.

명령어는 언표행위의 변수로서 랑그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며 요소들을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는 방식을 규정하니, 명령어야말로 변수의 두 가지 방향과 변수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메타언어”인 것이다.

명령어는 사형 선고이다.

“이렇게 해라.”, “그러지 마”라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아들이 자신의 인격의 한 지점에서 체험하는 작은 사형 선고와 분리될 수 없다. 죽음, 죽음,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판단(=심판)이며 판단을 체계로 만드는 자이다. 판결.
inq.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불안
배변훈련(몸 안과 몸 바깥의 선 긋기), 메스꺼움과 혐오

그러나 명령어는 그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놀람의 외침이나 도주 신호 같은 것이다. 도주가 명령어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오히려 도주는 복합적 배치물 속에 있는 명령어의 다른 얼굴, 명령어의 다른 성분으로서 명령어 안에 포함되어 있다. (...) 사자의 포효는 도주와 죽음을 한꺼번에 언표하고 있는 것이다. (카네티) 명령어는 두 가지 음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명령어의 첫 번째 양상, 즉 언표의 표현된 것으로서의 죽음을 살펴보자. (...) 죽음이 본질적으로 몸체에 관련되고 몸체에 귀속된다 할지라도, 죽음은 비물체적 변형이라는 진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죽음 자체의 직접성과 순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 죽음은 그 자체로는 능동작용도 아니요 수동작용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표행위가 언표 즉 선고에 용접시킨 순수 행위요 순수 변형이다.

실제로 죽음은 모든 곳에 있다. 한편으로 죽음은 몸체들과 몸체들의 형식들과 상태들을 분리시키는 저 건널 수 없는 관념적 경계로서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주체가 형식 또는 상태를 바꾸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조건 – 그것이 비록 통과제의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 으로 존재한다.

카네티의 “변형의 금지”
그것은 확고부동하고 엄숙한 <주인>에 기대는 체제이다. 이 체제는 매 순간 상수들을 통해 법을 제정하며, 변형을 금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하고, 형상들에 안정되고 분명한 윤곽을 정해주며, 형식들을 둘씩 대립시키고,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이행할 때는 주체에게 죽음을 강요한다. 한 몸체가 다른 몸체와 분리되고 구별되는 것은 항상 어떤 비물체적인 것을 통해서이다. 형상이 한 몸체의 윤곽인 한 그것은 몸체를 제한하고 완성하는 비물체적 속성이다. 죽음이 그 <형상>이다. 한 몸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은, 그리고 몸체의 선들이 윤곽을 형성하거나 그려내는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이다. 죽은 시간이 있듯이 죽은 공간도 있다. “변형의 금지가 반복되면 세계는 축소된다. ... 변형을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일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일일 게다. ... 죽음 그 자체가 가장 엄격한 경계로서 계급들 사이에 놓이는 것이다.”

inq. 공간이란 본질적으로 비워진 것. 즉 어떤 경계가 설정됨으로써 그 안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경계는 끝이 아니라 구획지어짐으로써 비로소 어떤 것이 시작되는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설정된 빛의 공간에서 물이 흐른다. -하이데거

inq. 경계 지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 하얀 공포.

p. 208 – 209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 사이의 선험적인 관계 (동형성)

비물체적 변형은 명령어의 표현된 것이지만 몸체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표현의 언어적 변수일 뿐 아니라 내용의 비언어적 변수이기도 하며, 이 변수들 각각은 상수들을 뽑아내기에 적합하도록 서로 형식적 대립 관계 또는 형식적 구별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두 판 사이에는 그 어떤 유사성도 없으며 그 어떤 분석적 대응관계나 일치 관계도 없다. 하지만 두 판이 서로 독립적이라고 해서 동형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양쪽에는 동일한 유형의 상수적 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계들의 유형이 있었기에 언어학적 요소들과 비언어학적 요소들은 서로 대응하지 않으면서도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이다. 내용의 요소들이 몸체의 혼합물들에 분명한 윤곽을 부여하는 일과 표현의 요소들이 비물체적인 표현된 것에 선고 또는 판단의 권력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 종합 판단의 학설이 갖는 의미는 <형상>과 <선고> 사이에,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 사이에 선험적인 관계(동형성)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각주. 칸트의 선험적 종합 판단, 범주의 초월적 연역과 관련)

p. 209 – 211
명령어의 또 다른 측면, 죽음이 아니라 도주를 고려하면 변수들은 이제 새로운 상태, 즉 연속적 변주 상태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극한으로의 이행은 이제 비물체적 변형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몸체들에 귀속된다. 이것은 죽음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축소시키거나 죽음 자체를 하나의 변주로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다. 언어는 이 운동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극한으로 밀려간다.

변형의 대가(大家)는 변함없는 엄숙한 왕과 대립된다.

가장 작은 간격이라는 관념은 같은 본성을 가진 두 개의 형상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곡선과 직선, 원과 접선을 고려해야 나오는 관념이다.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실체들은 변형되고 형체들은 와해된다. 그것이 극한으로 치닫는 형식이든 윤곽들의 도주든 말이다. (...) 이 강렬한 물질의 비물체적 역량, 이 언어의 물질적 역량. 몸체들과 말들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유동적이며 타오르는 듯한 하나의 질료. 연속적 변주 안에서는 더 이상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을 구분할 여지조차 없다.

탈영토화가 절대적이 되고 배치물을 휩쓸어가는 고른판 위에서. 이때 절대적인 것은 분화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한히 작게” 된 차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질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물질은 비물체적 역량으로서의 표현뿐 아니라 제한 없는 물체성으로서의 내용을 위해서도 똑같이 사용되는 것이다. 내용의 변수들과 표현의 변수들은 더 이상 두 개의 형식을 가정하는 전제 관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변수들이 연속적으로 변주되면 두 형식은 접근하고 양쪽의 탈영토화의 정점들은 접합접속된다. (...) 몸짓과 사물, 목소리와 음은 동일한 “오페라” 속에서 포착되며, 말더듬기, 비브라토, 트레몰로, 범람 등 변화하는 효과들 속에 담겨 있다.

inq. 섹스 그리고 사랑, 출생과 창조

신시사이저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마침내 모종의 방식으로 서로 전환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접합접속이 있자마자 공통질료가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만 우리는 추상적인 기계, 또는 배치물의 도표에 이른다. 질료가 형상 또는 형식을 부여받은 실체를 대체했듯이, 신시사이저는 판단을 대체했다. (...) 강렬함의 체계들의 다양성은 도주의 벡터들 또는 긴장들이 전체 배치물을 낳자마자 그 배치물에 결합되며 그 위에서 리좀화된다.

p. 211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한다. 즉 “어떻게 명령어를 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명령어가 감싸고 있는 사형 선고를 피할 것인가?”, “어떻게 명령어의 도주 역량을 펼쳐나갈 것인가?”, “도주가 상상적인 것 안으로 빠져들거나 검은 구멍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어떻게 명령어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지하거나 뽑아낼 것인가?”라고.

절단이 됐든 단절이 됐든 오직, 연속적 변주만이 이러한 잠재적 선을, 삶의 이러한 잠재적 연속체를, “일상 뒤에 있는 본질적 요소나 실재”를 끄집어낼 수 있다.

헤르초크의 영화 속의 인물은 자문한다. <이 대답에 누가 대답하지?> 사실 물음이란 없으며 우리들은 대답에 대해서만 대답할 뿐이다. (...) 명령어 속에서 삶은 죽음의 대답에 응답해야만 한다. 도주함으로써가 아니라 도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 하나의 사물, 하나의 말이라도 분명 이중의 본성이 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출하라. 명령의 구성물을 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켜라.

inq. 통과와 투명,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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