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전반부

작성자
rakuta
작성일
2018-12-01 19:39
조회
458
제 8장 뒤집힌 베버(WEBER IN REVERSE)

근대 행정 국가의 관료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아래로부터 파악해야 한다. James C. Scott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위에서 관찰하는 것은 국가처럼 보이는 그것의 실질적 동력(motor)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 보면, 다중(multitude)의 증가하는 능력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중요한 활동들 물론 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들이 행정기관들을 위기로 몰아 넣는다. 다중이 사회 조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가능성 그것도 다른 방법으로 수행할 잠재력을 개발해 왔기 때문에 현대 행정은 다중에게 문을 열 수 밖에 없다.
근대 국가(modern state)는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 무기로 구축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근대국가는 가난한 사람들, 농부들 그리고 선거권이 없는 계층들이 귀족들의 통치가 주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습과 재산에 대한 법적 구조에 대항해 싸우는 투쟁의 통로가 되고 관리하고 전쟁하는 역할을 해 왔다. 반면에, 근대국가는 자신들이 중재(mediation)를 통해 사회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역량을 지닌 행위자(actor capable)라고 생각하는 부르주아들의 사회적 정치적 해방에 기여했다.“합리적 중재reasonable mediation”는 갈등하는 사회적 권력들의 이익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행정 기구(machine)의---부르주아의 경제적 힘으로 보장되는---형성에 존재한다. 대표성을 띤 근대 정치 구조들은 이 중재적(mediatory) 기능에 근거해 구축된다: “만인의 의지(will of all)”는 그 국가의 “일반적 의지(general will)”가 되는데 후자는 “주권적 국민(sovereign people)”[sic! 원문 그대로] 에 근거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국민/인민(people)을 관리하고 구성하는 중재적 기구에 근거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중재적(mediatory)인 동시에 헤게모닉하고 행정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근대국가의 행정기구 형성은 자본의 발달과 이음새가 딱 들어 맡고, 근대행정은 산업 생산의 질적 기술(mechanical qualities)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띠고 있다. 이 말은 이 행정적이고 법적인 기구들이 사회의 경제적 근간에서 유래하거나 그것에 의존하거나, 그것에 결정되는 초월적 기구(superstructure)일 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신에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가 평행하게 발달했고, 이 두 가지 모두 계급투쟁에 근거해 있다는 사실이 있다. 행정국가의 현대적 형성 또는 지금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현재 작동하고 있는 적대적 주체성들(antagonistic subjectivities)의 본질과 기능들을 이해해야 한다.

베버의 꿈과 카프카의 악몽 ( Weber’s dream and Kafka’s nightmare)
맑스 베버는 전문적 지식과 합법적 기구 지도자(leadership)에 기초를 둔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그리고 효율적인 행정을 상상하였다. 베버의 행정기구들에서 행위자의 역할은 우리가 파트1 에서 분석한 근대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배치(deployment)을 따른다: 귀족사회( buracracy)를 이루는 간부는 책략적인 의무를 지니고 그 계획을 시행하는 반면에, 지도자leadership는 책략적 계획 작성과 장기적인 의사 결정에 책임이 있다. 베버가 주장하기를, 어떤 조직도 지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근대행정은 주인(주권 통치 Herrschaft)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지도자는 의지(will)를 제공하고 행정가(administrator) 집단은 그 의지를 실천하는 두뇌이고 팔이고 다리이다. 베버에게 행정가(administrator) 는 관료주의 기구의 단순한 톱니바퀴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합리적인 핵심이다. 그는 주장한다; 근대 관료주의 행정의 중요한 우수성은 기술적인 지식과 기술적인 능력competence의 역할에 있다. 그는 주장한다; “관료주의 행정bureaucratic administration은 근본적으로 지식을 통한 지배를 의미한다.”근대 관료주의는 지배의 한 형태이고 권위(authority)의 한 형태이지만 근대 관료주의가 비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고 그것의 합법성을 주로 지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행정 형태보다 우수하다.
베버의 비전에서 근대 관료주의 관리자는 일련의 분리(separation)로 특징지을 수 있는 흥미로운(curious) 동물이다. 첫째로, 행정 관리staff는 인구(주민)의 나머지, 즉 인구와 분리되는 사회적 몸체(body)이다: 그들의 지식은 일반적인(무식한) 인구(주민)와 분리되고, 그들의 이익이 아닌 이성과 법의 근거아래 활동하기 위해서, (그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그들은 생산이나 행정의 수단(을 소유하는) 소유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베버는 근대의 관료 관리자들을 하나의 분리된 사회적 몸체(body)로 보며 하나의 현실적 사회계층으로는 보지 않는다---사실상 하나의 반계층(anticlass)과 같은 것으로 본다: 소유 없이 지식을 보유하는 상황은 행정가들을 현대 계급투쟁의 밖에 위치시키고 그러므로, 그는 순전한 중재적 위치에 행정가들이 위치하도록 한다고 상상한다.
두 번째로 행정가들은 내부적 분리로 정의된다.(Administrators are defined by internal separation.) 베버가 주장하기를, 행정은 일생 지속할 직업, 소명, 그리고 임무가 되어야 하지만, 사무실은 삶의 영역과 구분되어야 한다. 행정가들은 이중적 존재의 삶을 산다. 더구나, 행정가를 특징지는 지식과 기술적 능력이 좁고 제한되어 있다. 과거의 행정 형태는 행정가의 생활과 일치하는 넓은 사회적 지식을 가진 “교양있는cultivated”행위자를 찾았다. 반면에 근대 관료주의는 그들의 제한된 지식 때문에 의사 결정을 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지만, 그들은 사무실의 의무를 수행할 자격을 갖는 전문가나 숙련된 사람을 요구한다. 관료적인 지식과 행동이 갖는 본질인 인간미 없음(impersonal)은, 합리성의 요구와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는 능력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전문 지식에 근거를 둔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투명한 관료주의를 꿈꾼 베버의 꿈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악몽으로 경험된다. 프란츠 카프카 작품에서 정점에 도달한 비평의 맥락에 따르면, 근대 관료주의는 대신에 비합리와 부정의(irrationality and injustice)를 근본적인 특징으로 한다. 그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불완전하게 또는 불충분하게 실현되는 행정 프로젝트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사회 행정 프로젝트는 자체 내에 비합리적인 핵심을 가지고 있다. “전문가/숙련된 사람(expert)”은
진리(the truth), 옳은 것(the right), 그리고 정의로운 것(the just)를 모른다---대신에 그들은 부당하고(injustice), 사실이 아닌 것(untruth)의 이해 불가능한 체제를 구축한다. 법 앞에서 문지기에 부딪는 사람과 그 성으로 들어가려는 K의 고집스런 시도에 대한 카프카의 이야기는 현대 관료주의 권력이 지닌 잘 보이지 않는 그리고 소외시키는 형태에 대한 우화(parable)이다. “이성의 비관주의(pessimism of reason)”에 근거한 현대 관료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평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으며 전 세계에 걸친 모든 나라에서 그 좌절감은 잘 알려져 있다. 우선 근대 관료주의 사고방식(mentality)의 부당성과 불합리성을 알기 위해서 범죄적인 사법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불행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어떤 불합리한 행정 업무를 마치기 위해, 외견상 끝없는 기다림의 줄을 통해 누구든 고통을 받지 않았는가? 우리는 모두 관료주의의 미로 같은 그리고 불투명한 길(/처리과정 passage)을 매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식의 특징짓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특징들이 근대 행정을 하나의 거대 기업으로, 자율적으로 그리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모든 형태의 권력과 마찬가지로 근대 행정 두 개로 나누어진 관계성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행정이 가지고 있는 중재(仲裁)적 기능을 이해해야 한다: 이미 이야기 하였듯이, 부르조아지(bourgeoisie)와 병행하여 근대 행정 국가는 헤게모니와 중재 둘을 모두 가지고 있는 파라독시컬한 혼합(a paradoxical mix)으로 발달하고 있다. 다른 면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관료주의에 대항해 싸운 사람들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관료주의 비판은 절망의 순환에 갇힐 뿐만 아니라 근대 행정이 왜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결코 밝힐 수 없을 것이다. 근대 행정은 어떤 내부의 부패로 자기 스스로 무너진 일은 없으나 행정 권력을 공격하고 행정의 가장 핵심적 기능을 교체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힘에 의해 위기에 빠졌다.

근대 행정에 도전하는 힘과 관련된 분석에 필요한 몇 가지 요소들을 위에서 이미 모아 보았다. 한 타입의 분석은 지식/정보(intelligence), 사회적 지식, 복잡한 과학기술의 스킬(technological skills),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광범위한 범위의 사회적 협동이 노동현장 안팎에서 중심적 능력이 되어가는 조건 아래 지금의 자본주의 생산에서 어떻게 지배적인 노동 형태가 변형해 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다른 타입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정해진 자본을 재 전유하고(reappropriating)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그것을 자신들의 사회적 삶 속에 통합시키면서, 어떻게 디지털 기구들과 플랫폼(platform)에 더 많이 접근해 가는가를 기록한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가진 16살 된 아이 (또는 12살 난 아이)는 지식과 도구를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협동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수단들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 모든 종류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것과 정부가 데이터를 막을 능력이 부재하는 것 역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부가 탄압하기 위해 인터넷 접근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계속적으로 좌절하고 있고, 진행 중인 WikiLeaks의 폭로가 보여주듯이 모든 국가들이 정보에 대한 접근을 통제할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 가고 있다. 사람들이 지식 자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능력, 기구, 그리고 정보를 가지고 있고 지식, 전문성, 그리고 정보에 대한 독점(獨占)을 비집고 들어가 열어젖힐 때 베버가 말한 근대 행정의 “지식을 통한 지배(the domination through knowledge)”는 사실상 붕괴하기 시작한다. 광범위하고 대안적인(alternative)인 지식 생산은, 지식이 권력뿐 아니라 자유와 상응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투쟁(protest)과 해방 운동(liberation movement)의 무기창고에서, 핵심적인 무기가 된다. 이런 지식생산은 행정가들에게만 한정되었던 능력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행정적 기구를 개방하도록 강요하는 어떤 힘(force)이 된다.
Sine ira et studio 분노나 편향없이

근대 행정의 위기는 행정 주체성(administrative subjectivity)의 변환을 의미한다. 베버를 따르면, 현대 행정가는 정동(affects)을 버려야 한다: sine ira et studiol (without anger or partiality 분노나 편향없이)는 그는 좋은 행정의 주관적 태도를 기술하기 위해 Tacitus의 말을 빌려와 사용한 모토motto이다. 정념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학자같이, 베버는 행정적 이성administrative reason을 왜곡시킬 정동affects를 피하려고 시도한다.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재산 소유권과 관계가 없고, 그들이 작업을 할 때 그들이 작업하지 않는 생활로부터 독립해서 작업을 하는, 일단의 직업 관료들은 career bureaucrats 인간성이 없는impersonal 사무실을 차지하고 정념이나 편견 없이 지식, 정보, 과학기술적 기술을 통제한다.
행정가의 주체subjectivity에서 정동affects를 배제하는 것은 지도력을 카리스마적인 형태와 합리적인 형태로 구분한 베버의 주장을 반영한다. 카라스마적인 권위는 추종자들의 정념passions을 이용하고 종교적 개종과 유사한 것을 통해서 내부로부터 사람을 변화시킨다. 상대적으로, 관료주의적 행정같이 합리적 권위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외부로부터 사람을 변화시켜 사회구조와 그들의 삶의 조건을 변환시킨다. 관료주의적 행정가처럼, 베버의 합리적 지도자는 순수하고 실용적인 이성을 가진 이상적인 주체이다. An ideal subject of pure and practical reason.

베버는 정동(affects)이 지닌 문제란 그것을 측정을 할 수가 없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정동affects이 변하기 쉽고 믿을 수 없다는 표준적인 합리주의자의 개념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일 것이나, 이것이 근대 행정과 자본주의적 생산 사이에 있는 핵심적인 연결을 분명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행정은 측정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인간적human”인 정동affects과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면서 계산 가능한(측정이 가능한) 사회적 요소만을 고려해야 한다. 베버는 계속해서 말한다: “관료주의는 그만큼 더 완전하게 발달한다. 그것이 더 비인간화 되면 될수록 계산할 수 없는 사랑, 증오, 모든 전적으로 개인적이고personal,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을 공무로부터 제거하는데 그만큼 더 완전하게 성공할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근대 관료주의는 특히 자본의 규칙(rule of capital)에 알맞은 보충제complement이다; 그 이유는,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 역시 주로 측정으로 (아마도 가치의 측정measure of value) 작용하며, 자본은 관료주의와 마찬가지로 측정 불가능한 것에 의해 위협받기 때문이다. 11장에서 볼 것인데, 자본주의 돈capitalist money의 주된 기능은 가치의 단위 the measure of value를 정하고 그리고 파생상품(derivatives??) 같은 복잡한 금융상품을 통해서 계산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에 측정(測定)된 가격(價)을 매기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오늘날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요즘 근대 행정을 위기로 몰아넣은 기계적인 주체들(machinic subjectivities)은 지식/정보(intelligence), 지식 정보information 그리고 과학적 기술을 부여 받았지만, 이 기계적 주체들은 감정/열정passions를 버리지 않는다. 이 주체들을 감정/분노와 편향적(cum ira et studio)이라고 명명하고 싶지만, 이것이 단순히 베버의 합리성rationality에 대한 반향적(specular) 이미지 즉 비합리적인 정념(irrational passion)만은 아니다. 반대로 이 새로운 주체들을 우선 베버의 입장에서 근대 행정가를 정의하는 그 모든 분리들(separations)이 붕괴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상, 물질적 생산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code, 문화상품cultural products, 정동affects과 같은 다양한 비물질적 상품들의 생산이---간단히 말해서 주체성의 생산이---점점 더 핵심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생산적 다중productive multitude의 형성과 삶은 이성과 정념passion의 이분법에 따르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대신에 측정할 수 있는 그리고 측정이 불가능한 모든 정념들affects과 주체의 생산production of subjectivity을 연결시킨다. 측정 불가능하고 주체적인 사회 현상들과 관련이 있는, 이 생산적 능력capacity들은 정치politics적 잠재성potential을 드러낸다.: 셀 수 없는 것(incalculable), 결정 불가능한 것(undecidable)을 결정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치적 능력이다.
근대 경제 사회의 위기라는 맥락에서 이성reason과 정념passion의 분리를 유지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워지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한다. 사회적 안정기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열정 없는 passionless 관료를 전쟁이나 위기의 혼란 가운데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버의 생각은 자본주의자가 비교적 조용하게 사회적 역할을 해도 괜찮았던 시절 (제 1차 대전 이전의 시절)의 산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위기가 지배한다. 독일 수상 메르켈이 법을 따라 시리아 아이들의 시민권을 거부한 후 곧 그녀의 결정을 번복하고 시리아 출신 이민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가 결국 그 후에 곧 그 문을 닫았다. 이것은 정부 차원의 결정에서 법적인 논리, 공감compassion, 공포 그리고 냉혹함이 복잡하게 혼합되어 나타난 하나의 예(例)일 뿐이다. 특히 이주하는 다중migrating multitude에 관해서, sine ira et studio 감정과 편향성이 없이, 행동하는 현재의 행정 administration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 질서 아래에서 정동affects이 관리를 정상화하고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갖는 어려움은, 미국의 9/11, 마드리드의 3/11, 런던의 7/7, 파리의 11/13, 브랏셀의 3/22 그리고 올랜드의 6/12 같은 유럽과 북미에서 일어난 테러 공격과 이에 따라 일어나는 사회적 비상사태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상사태에 대한 정념과 비상사태의 선언이 가져다 주는 불행을 따라서 표준적인 법과 이성은 곧 휩쓸려 사라진다. 그러나 법이 시행될 수 없을 때---예를 들면 이민자들을 통제할 수 없을 때---이런 극적인 환경 외부에서도 법은 그 새로운 상황에 기능적인 행정 태도administrative behaviors으로 대치replaced된다. 위기상황에서, 다른 말로 하면, 인민people의 정부가 가지고 있는 관료주의적 합리성은 다중의 통치방식을 인도guide하는 정념passion을 낳는다. 처음부터 합리적 행정에서 ira et studio 정념과 증오와 편향을 제외한다는 추측presumption은 다중의 정념을 강압적으로 관리하는데 필요한 환상에 불과한 위선적인 추측이지 않은가? 위기와 예외 상태의 시대에서 행정적 행동들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디지털 테일러리즘
측량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는 것만 보는 소견이 좁은 근대 관료들은 인간이라기 보다 기계로 보인다. 사실상 베버는 관료사회의 이성적 주체들을 산업기계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설명한다; “기계를 비기계non-mechanical 생산 모드에 비교 하듯이, 충분히 발달한 관료주의 기구들은 다른 조직과 비교된다.” 이 풍부한 비유를 잠시 멈춰 생각해 보자. 생산의 비기계적인 모드에서 산업적인 모드로 가는 경로에서 핵심적인 것은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의 전도(轉倒)inversion다. 수공업과 제조업에서 숙련공/기능공이나 작업자들은 자신들의 도구 (신발수선공의 송곳이나 대장장이의 해머)와 일생을 같이 하는 관계, 즉 그 도구들이 자신들의 몸을 연장하는 보충적인 팔 다리 같은 것이 되는 것 같은 관계를 지속한다. 반면에 대규모 산업사회에서는 그 관계가 뒤집어져 노동자들은 복잡한 산업기계에 의해 이용당하고 그 기계의 보충물prostheses이 된다. 기계가 주체가 되고 노동자가 객체가 된다. 시작 장면에서 찰리 채플린은 산업기계가 요구하는 기계적인 노동자 되기를 시도 한다 (그리고 희극적으로 실패한다.) 베버의 비유는 암시하고 있다: 근대 행정은 주체와 객체의 유사한 도치inversion를 작동시킨다; 근대 행정은 모든 인간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현상들이 측정 가능하다고 주자하지는 않지만, 기계의 입력input을 통해 “객관적인objective” 데이터를 걸러내고 수용한다. 계산 불가능한incalculable 모든 “주관적인 subjective” 현상들은 그 일에 맞지 않는다 (또는 해롭기 까지 한다). 이런 식의 언급은 계속 된다: 기계와 같은 근대 관료주의 사회에서, 여러분들은 하나의 숫자가 된다. You become a number.
근대의 기계적 행정이 인간의 노동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고 반대로 인간들을 더욱 기계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머쉬닉한 행정(machinic administration)은 일상적인 디지털 작업과 기계적 분석 rote analytics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낸다. 현대 공장과 관료사회에 적용시켜 모든 작동operation을 단순하고 측정 가능한 작업으로 분리해 행동을 합리적으로 개선시키는 테일러식 방법이 새로운 형태의 테일러리즘으로 바뀌었다. 때로는 컴퓨터 체계, 인공지능, 그리고 알고리즘algoruthm이 인간의 노동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기계가 완성할 수 없는 수많은 디지털 작업이 존재한다. 인간들은 머쉬닉한 행정machinic administration을 지원하고 콜 센터call center 또는 쳇 메커니즘chat mechanism을 통해서 사용자에게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제공하기 위해서 하찮은 “클릭하는 작업 clickwork”을 완성하는 일만 하게 된다. 모든 행정 단위들, 모든 은행의 부서들, 모든 사업체들은, 스크린 앞에서 적절한 form field에 조직화되지 못한 데이터를 입력하고 규범적인 질문에 답을 하고, 어떤 다른 일상화된 업무를 하는 노동자 대군an army of workers들을 필요로 한다. 때때로 이 디지털이 주는 무료함은 국내에서(in-house)에서 끝이 나지만 자주 이것이 인도나 중국 같은 하위국가로 아웃 소싱(outsourcing) 된다. 역설적으로 이 업무들은 이처럼 일상적인 것이 되어 머리를 쓸 필요가 없지만, 이 업무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교육을 요구한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상승하는 더 높은 교육 수준은 “미래가 없는 졸업생 graduate with no future”을 생산해 낼 뿐만 아니라 디지털 무료함이라는 미래를 가진 많은 졸업생을 배출한다.
베버에 의하면 근대의 관료적 조직의 도래가 비기계적인 것non-mechenical 에서 산업적 기계화로 이동하는 것과 비교되듯이, 근대 행정을 넘어서는 지금의 이동은 기계적인 것에서 머쉬닉machinic (=related to machine)한 것으로, 산업적 기구로부터 디지털 알고리즘digital algorithm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 세대 이상의 과학소설 science fiction이 지능기계intelligent machine의 여명(黎明)/시작이 인간적인 것의 객관화의 강화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상상해 왔다: 기계가 생각할 때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머쉬닉 생산은 산업의 주체-객체 industrial subject-object 관계를 반복하지도 않고 산업화 이전의 비기계적인 배치로 돌아가서 개별 인간 주체의 손 안에 디지털 기계를 쥐어 주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 머쉬닉은 주체-객체 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우리 과거듸 집단적 지능이 디지털 알고리즘으로 구체화 되는 것만큼, 지능 있는 기계들은 머쉬닉 집합machinic assemblage을 구성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핵심적 부분이 된다.
자본이 객관적인 계량(計量)calculation을 요구하는 것과 생산자의 머쉬닉 주체들 사이에 놓인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생산의 현재 단계에서 하나의 패러독스가 생겨난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점점 생정치학biopolitical이 되갈 때, 말하자면, 인간의 주체성 생산 production of human subjectivity이 가치 창조의 중심부가 되어 갈 때, 노동자의 몸과 마음이 상품commodity (사고 팔 수 있는 노동력)으로 변형 되어야 한다고 자본은 여전히 요구한다. 노동력labor power의 객관적 특징은 자본의 기능과 이익 생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자의 상상(capitalist imaginary)은 산업화 기계가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의 산업이 가진 주체-객체 관계에 여전히 매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정치학적인 생산biopolitical production에 필요한 머쉬닉 주체들은 계량, 측량, 그리고 객관화를 끈질기게 거부한다. 노동력으로 그들의 행위를 사고 파는 것은 살아있는 노동으로써 진정한 신체적이고 지적인 생산성에 점점 더 저항을 하고, 그리고 주체성의 가치가 자본주의적 가치매김 과정에서 주어진/정해진 객관적 단위objective measure를 항상 넘치고 그것을 초과한다. 자신들의 생산성이 주로 공장에 존재한다는 점에 의존하는 산업 노동자들과 대조적으로, 머쉬닉 주체들은 협동의 순화 속에in circuits of cooperation 사회적 공간 안에서 몇 가지 제한된 폭의 자율성을 종종 생산해 내고 그래서 그것들을 실현한다.
노동자들이 고정자산 fixed capital을 재전유re-appropriate하고 가치 매김valorization 과정에 협조하는 행위자로써, 다양하게 그리고 때로는 혼란스럽게, 자신들을 표출하는 한, 그들은 안정될 수 없이 불안하지만(precarious)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가치 매김에 자율적인 주체가 되기 때문에, 자본과 관련해서 노동 기능이 전도(轉倒)inversion되는 경향이 있다. 이제 노동자는 자본이 자연을 변형해서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배치하는 도구가 아니지만, 노동자들이 생산 도구tools of production를 가지고 있고incorporate 인류학적으로 이미 변신하였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자본과 분리해서 그리고 자본에서 떠나 자율적으로 생산한다. 이런 풍토 위에 우리가 생정치학biopolitical적 이라고 부르기에 적절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가 열린다.
생자본주의 biocapital [주체들 subjectivities]과 생산적인 머쉬닉 주체들 productive machinic subjectivities 사이의 모순은 두 가지 극 중에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극복되어 질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해 내기를 바란다면 노동자들을 제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치에 적절한 지형이고, 그것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지만 결정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풍토가 된다. 생산적인 주체productive subjectivities들에게, 정치는 “제도적으로 institutionally” 다중multitude을 구성한다는 것을, 즉 다중의 사회적 경험을 정치적 구성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제3장에서 보았듯이 구성하는 권력constituent power과 구성된 권력constituted power 사이에 있는 관계의 현대 부르주아 모델을 넘어서서 이 작동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성하는 행위constituent action가 사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단일 권력unitary power의 구성 속에 그것이 닫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란revolt은 있는 그대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세력counterpower의 과정을 개방하고 [열어 놓고], 자본주의 기계가 만들어 내는 포획물의 항상 새로운 기구에 도전하고 새로운 머쉬닉 주체들이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종류의 사회를 창조해 낼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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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3장 발제
july123 | 2020.03.21 | 추천 0 | 조회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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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공지] 1월 18일 7시 모임 공지
ludante | 2020.01.12 | 추천 1 | 조회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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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16쪽 분량 수정본
july123 | 2020.01.11 | 추천 0 | 조회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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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1월 11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 공지
ludante | 2019.12.14 | 추천 0 | 조회 690
ludante 2019.12.14 0 690
91
12/14 실비아 페데리치 번역모임 정리 파일입니다.
ludante | 2019.12.14 | 추천 0 | 조회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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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발제
rakuta | 2019.12.14 | 추천 0 | 조회 552
rakuta 2019.12.14 0 552
89
합본
july123 | 2019.12.14 | 추천 0 | 조회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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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p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2.14 | 추천 0 | 조회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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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이 열립니다.
ludante | 2019.12.06 | 추천 0 | 조회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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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치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1.30 | 추천 0 | 조회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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