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얼마 전에 본 영화가 재밌어서 올려봅니다.

작성자
absinth
작성일
2019-01-01 14:21
조회
64
정연샘이 저더러 대립을 극복하고자 엄청 노력한다고 하셨던 적이 있는데 이 리뷰도 왠지 그런 노력의 일환인 것 같아서...

<서던리치 : 소멸의 땅>이라는 영화에 대한 리뷰입니다.


1. 들어가면서

누군가 이 영화가 ‘무엇’에 대한 영화냐 묻는다면 나는 ‘죽음’이라 답할 것이다. 근데 이 말은 사실 순환논증이다. 영화의 원제가 즉 <소멸>이니까 당연히 죽음을 다루고 있지 않겠나.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질문을 조금 다르게 해봐야 한다. 2018년 9월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되짚어 본 이후, 우리는 추석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대상에 대해 Ti esti?라는 그리스의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다시금 적용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무비에 따르면, <서던리치 : 소멸의 땅> (이하 <소멸>)의 장르는 “모험, 드라마, 판타지, 공포, 미스터리, SF, 스릴러”다. 공포에 미스터리에 스릴러라니.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일종의 공포물 계열 안에서 다뤄봐도, 따라서 죽음이라는 소재를 공포물이라는 맥락과의 연계 안에서 다뤄봐도 괜찮을 것 같다. 전형적인 공포물은 언제나 죽음을 다룬다. 그곳에는 언제나 희생자가 있고, 그 희생자를 옭죄이는 무엇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소멸>이, 장르적 혼합성을 차치하더라도, 전형적인 공포물에서의 ‘죽음’과는 다소 다른 종류의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본 리뷰는 이 ‘다른 종류의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다. 그렇다면 먼저 일반적인 공포물들 안에서 죽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가볍게 검토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2. 공포영화의 분류 – 누가 죽이는가?

흔히들 밥 먹다가 서양 공포물보다 동양 공포물이 더 무섭다느니, 오컬트물보다 슬래셔물이 더 끌린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간혹 술이 곁들여지는 경우에는 의견의 일치를 못 보다가 싸움으로 번진다고도 들었다. 바벨탑 이야기 속 인간들이 마지막에 피터지게 싸웠던 이유는 공통의 언어가 없었기 때문 아니겠나. 내가 제기하는 분류 방식이 작게나마 논쟁을 일소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우리는 “누가 죽이는가?“의 관점에서 공포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라는 주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한 차원 더 끌어당겨 좀 있어보이는 말로 ”대상의 특성“에 대한 분류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의 특성에 따르면 공포 영화는 거칠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특정한 공포 대상이 존재하는 경우다. 미국의 전형적인 슬래셔 무비들은 이러한 특징을 갖는다.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 : 이들은 모두 어떤 형체를 가진 대상이고, 이들은 희생자를 잔인하게 살인함으로써 관객에게 공포감을 준다.

둘째는 대상이 불가해한 경우다. 동양 쪽 공포물이 이런 특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귀신이나 혼령을 등장시키는 영화들이 그렇다. 물론 명확한 형체를 가진 ‘괴물’조차 맥락에 따라서는 불가해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주로 스티븐 킹 류의 공포물들이 그러한 특징을 갖는데, 가령 <미스트>(프랭크 다라본트, 2007)에서는 출처와 기원을 알 수 없는 괴물들이 튀어나와 세계를 혼돈스럽게 만든다. <샤이닝>(스탠리 큐브릭, 1980)의 경우에서도 중요한 것은 미친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미치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 대자연조차 이런 불가해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해프닝>(M. 나이트 샤말란, 2008)이 그렇다.

셋째는 둘째 방식이 좀 더 진행된 것으로, 대상을 넘어 자기 자신조차 불가해한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관객들이 끝까지 해답을 얻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더 불안하고 답답하게 만들곤 한다. 이런 영화들의 클리셰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주는 방식 바로 그곳에 있다. 가령 마이클 잭슨의 기념비적인 뮤직비디오 <드릴러>(존 랜디스, 1983)에서, 악몽에서 깨어난 여주인공을 친절하게 깨우는 남친 마이클 잭슨을 보라. 여주인공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방을 나가다가 얼굴을 돌린 그의 눈 속에 늑대인간의 눈동자가 비친다. <소멸>의 경우에서도 이런 측면이 나타난다. 남주인공인 케인과 여주인공인 리나가 함께 포옹을 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우리는 이상한 빛이 그들의 눈동자를 휘감는 것을 본다.


3. ‘누가?‘, 그리고 피아식별의 문제

사실 공포물에서의 이 ’누구‘와 관련된 문제는 피아식별의 문제와 바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죽는자가 있고 죽이는 자가 있다. 공포물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는 자가 죽임을 행하는 자를 처단하거나 회피하는 식의 서사를 따르거나, 혹은 회피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회피에 성공하지 못하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왜 그토록 많은 공포물에서 ’도망‘이라는 주제가 나타나는지 생각해보라)

이처럼 대상의 문제와 식별의 문제는 언제나 함께 간다. 대상이 규정되면 내가 있고, 그로서 나와 나 아닌 것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피아식별의 문제는 공포를 해소하는 방법까지도 규정한다. 가령 앞서 말한 첫째 방식의 공포물은 피아가 모두 식별되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여기서 주인공이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죽이는 것 뿐이다. 물론 제이슨이나 프레디는 죽여도 죽여도 다시 또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어쨌든 영화는 그들을 ‘죽여야’ 끝난다. 피아식별이 명확한 만큼, 공포에 대한 해결책도 단순하다.
둘째 방식의 공포물은 ‘아’ 즉 나는 식별되지만 상대 즉 적은 식별이 되지 않는 경우다. 여기서 해결책은 한 단계 더 복잡해지는데, 그것을 죽이기에 앞서 그것이 무엇인지 먼저 식별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식별되지 않는 공포의 대상을 식별 가능한 것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미스트>, <해프닝>, 그리고 <소멸> 모두에서 괴물, 자연, 그리고 ‘그것’의 기원을 탐색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렇다.

셋째 방식의 공포물은 ‘피’와 ‘아’ 모두가 식별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는 경우로, 대표적인 영화로 <우주의 침입자>(필립 카우프만, 1978년), <괴물>(존 카펜터, 1982)(이 영화의 원제는 이다. 제목 자체에서부터 식별되지 않은 존재의 구조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의 번역은 이런 뉘앙스를 살리지 못하는 단점을 갖는다)이 있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외계인과 인간을 구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점을 보여줌으로써 주인공과 관객 모두를 혼란 속에 몰아넣는다. 여기서 극 중 인물들은 자신의 친구, 애인, 심지어 가족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괴물>은 이러한 피아식별 불가능성에서 오는 공포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남극 기지 안. 주인공은 외계물질이 금속물을 흡수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고는, 대원들을 일렬로 세운 뒤 총을 겨누고 그들의 입을 벌려 금니가 있는지 차례차례 검사한다. 관객은 주인공을 따라 누가 감염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그리고 나중에는 주인공조차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빠지면서 특유의 서스펜스와 공포를 느낀다. <소멸>에서도 사실 이런 장치들을 마주칠 수 있다. 점점 몸이 변해가는 동료 군인의 배를 가르던 케인의 모습이나, 세 명의 대원에게 총구를 겨눈 아냐의 모습을 보라. 우리는 거기에서 <괴물>의 주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본다. 그렇지만 <소멸>에 나타나는 공포감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형태를 취한다. 거기에는 ‘피‘를 식별가능한 것으로 규정하려는 노력도 있고, ’피아‘가 식별되지 않는 상태에서 오는 혼돈도 있지만, ‘아’ 자체의 경계가 규정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지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극 중 조시가 ‘굴절’이라고 부른 현상은 쉬머(소멸의 땅을 뒤덮고 있는 장막) 안의 모든 존재자를 관통하며 그들의 유전정보를 마구 뒤섞어 놓는다. 사슴들의 뿔에서는 나무가 자라고, 악어의 이빨은 상어의 이빨을 본따 자라난다. 식물들은 인간의 형상을 따라 자라나고, 조시의 몸에서는 나뭇잎이 자라나온다.


4. 피아식별과 경계의 문제

그렇다면 우리는 피아식별의 문제에 있어서도 ‘경계가 있는 피아식별’과 ‘경계가 모호한 피아식별’의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소멸> 이전에 기술한 공포물들은 모두 확실한 ‘피’와 ‘아’의 경계가 규정돼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식별불가능성 자체가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맞지만, 결국 영화는 ‘피’와 ‘아’를 식별하는 것으로 결론 맺고, 설사 ‘피’가 명확한 형체를 띤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피’와 ‘아’는 최소한으로나마 구분되는 경계를 가진 상태로 나타난다. <우주의 침입자>나 <괴물> 모두 ‘아’조차 식별되지 않는 지점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여기서 식별 불가능성은 ‘아’가 사실은 ‘아’가 아니라 ‘피’라는 사실로 드러나지, ‘아’와 ‘피’가 뒤섞여 경계가 흐려진 상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부정’의 문제가 개입한다. 다시 말해 ‘나’와 ‘내가 아닌 것’의 대립 관계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부정과 대립이 매개되는 경우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화는 언제나 ‘죽음’이라는 해결책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 공포의 대상이 죽는 과정이 단순하냐(첫째 방식의 공포물) 복잡하게 꼬여 있냐(둘째, 셋째 방식의 공포물)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영화는 악당이나 귀신 혹은 괴물이 죽어야만 끝난다. 이런 경우 공포물은 필연적으로 공포의 대상을 악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공포의 해소는 악의 처단이고, 공포는 죽여 없앰으로써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 <소멸>에서 피아식별의 문제는 ‘모호한 경계’의 문제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진정한 ‘부정’으로서의 죽음의 문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악에 대한 규정도 모호해지고, 따라서 등대에서 단순히 리나를 모방(이 ‘모방’ 자체가 ‘그것’의 의도가 부재함을 지시한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정말 그녀를 해치려는 건지, 단지 관찰하려는 건지 알 수 없게 된다. 물론 부정으로서의 죽음이 완전히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쉐퍼드와 아냐는 분명 모두 곰에 물려 죽는다. 그렇지만 조시와 벤트리스, 그리고 주인공 리나의 죽음 또한 단순히 삶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죽음을 보여주기에 그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 죽음과 경계의 문제

‘죽음’과 ‘소멸’에는 사이에는 분명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내가 분노에 차 상대방을 어떻게 해버리고 싶을 때 나는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하지 ”너를 소멸시켜버리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뱉음으로써 나는 분명하고 확고하게 ‘너의 존재를 부정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는 일종의 ‘턴 오프’시킨다는 의미가 포함돼있다. 생명을 중지시키는 것. 반면 ‘소멸’이라는 단어 안에는 어딘가 흩어 없어져버린다는 느낌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흩어 없어짐’이라는 개념이 ‘흩어진 것’과 ‘흩어지는 것’의 두 가지 전제를 가정한다고 생각한다. ‘흩어진 것’은 어떤 것이 흩어진 이후의 결과를 말한다. ‘흩어지는 것’은 흩어지는 과정 이전의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해서 생각하게 되는 경우 필연적으로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지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우리가 원자론적 사고(여기에는 현대의 생물학적 관점이 포함된다)를 따르게 되는 경우 우리는 흩어진 상태의 요소들에서 시작해 그것이 조합되고 종합된 상태로 나아감으로써 ‘나’라는 것을 이루게 된다. 이 인과관계를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열역학적 관점에서 이 우주의 엔트로피는 그대로이거나 계속해서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주 전체로 보아서는 언제나 뭉친 것에서 흩어지는 것으로의 방향이 있을 뿐, 반대 방향으로의 진행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 관점 즉 생물학적 관점과 열역학적 관점은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경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설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계로 볼 경우 엔트로피는 같거나 증가할 수밖에 없지만 한 생명체를 하나의 계로 볼 경우 그 내부에서 엔트로피의 감소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우리는 냉장고에만 관점을 국한해 생각할 경우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주 전체에서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흩어짐은 본래 흩어져 없어짐의 방향으로 가는 게 맞는 것이지만 다만 나라는 생명체에만 국한해서 본다면 흩어짐이 반대방향으로 진행될 수 도 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되는 걸까? 아니, 차라리 그런 것에 앞서, 대체 ‘나의 계’라는 것과 ‘우주의 계’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 것일까? 그건 내가 인위적으로 설정한 경계는 아닐까? 게다가 우주 전체라는 것에는 경계가 있는 걸까? 우리는 특정 양의 에너지가 차 있는 어떤 경계가 있는 하나의 단일한 우주를 가정해도 되는 걸까? 그리고 설사 그러한 우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수식에서 기술된 우주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이처럼 우리는 ‘흩어 없어짐’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경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경계가 문제가 되는 한,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규정하고 식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식별 가능해진 것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필연적인, (그러나 불가능해보이는) 임무를 떠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한에서, 우리는 ‘소멸’이 아니라 또다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오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대립과 부정이 매개된 ‘죽음’과는 다른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몇몇 철학자들은 이 ‘흩어 없어짐’의 개념 안에서 ‘흩어짐’이라는 동사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난점을 피하고자 한다. 즉, 흩어진 것과 종합된 것(흩어지는 것)을 양 극단에 두고 그 사이에 ‘흩어 없어짐‘이라는 과정을 개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모두 흩어 없어짐이라는 하나의 과정 속에서 파생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흩어 없어짐’을 그 중심에 두고 나머지 두 극단을 파생으로 다루는 경우, 우리는 ‘흩어 없어짐’ 자체가 실제로 지칭하는 과정 자체가 탄생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어떤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흩어 없어짐에서 ‘없어짐’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미 ‘흩어진 것’과 ‘흩어지는 것’이라는 두 개의 구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구별이 없어지고 나면 우리는 선후관계를 설정할 수 없고 따라서 ‘흩어 없어짐’이나 ‘종합’ 모두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소멸’을 ‘죽음’으로부터 구별해내야만 한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탄생과 죽음을 모두 예고하고 있는 그런 개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로 들뢰즈에 의해 해석된)니체, 모리스 블랑쇼, 질 들뢰즈, 질베르 시몽동은 모두 이런 종류의 ‘소멸’을 사유하고자 했던 자들이라고 보여진다. 이들에게서는 언제나 ‘두 가지 죽음’에 대한 주제가 반복된다. 이렇게 죽음을 두 가지로 구별하는 데에는 앞서 말한 ‘경계’의 문제가 관여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타인 혹은 주변의 환경과는 개별적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죽음은 부정의 형태를 취한다. 거기서는 ‘나’가 죽거나 ‘너’가 죽거나 ‘그’가 죽는다. 그렇게 부정의 방식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나는 ‘없는 것’이 된다. 애초에 나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특정한 경계를 갖고 이 세계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주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반면 두 번째 죽음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능동적 의미의 죽음이라고 볼 수도 있다. 대립과 부정으로서의 죽음이 소극적 의미의 죽음이라면 변화 자체인 죽음은 능동적 의미의 죽음이다. 질베르 시몽동은 그의 주저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에서 이에 대해 ”환경과 관련해서 부재한 개체는 계속해서 생존할 수도 있고 심지어 능동적일 수도 있다.“(번역본 471쪽)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개체는 ”사라질 때 그것은 자신의 내재성intériorité과 관련해서만“(번역본 471쪽) 죽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성intériorité이란 영어의 interiority에 해당하는 것으로, 어떤 명확한 경계를 가진 내부 상태를 말한다. 즉 이 말은 우리가 죽는다고 할 때 그것은 명확한 경계를 가진 ‘나’가 죽을 뿐이지, 그 ‘나’를 떠받치고 있는 존재의 장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몽동은 이처럼 경계를 가진 존재자들이 끊임없이 죽어 없어지되 그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꿈틀거리는 장을 ‘신화’에 비유한다. ‘신화’ 속에서는 내가 죽고, 나의 아버지가 죽고,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리고 심지어 나의 강아지도 죽는다. 그러나 이처럼 죽어 없어진 자들로서의 ”과거의 산 자는 그 영속을 후대에 의존“한다. 그들은 경계의 너머에서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존재 자체에 이미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멸>의 쉬머 속 공간은 이러한 능동적 죽음이 가시적 형태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아냐를 공격했던 곰의 울음소리 너머에서 그들이 쉐퍼드의 절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두 번째 죽음, 우리의 용어로 하자면 ‘소멸’이 그 자체로 죽음 뿐 아니라 삶과 탄생 자체를 예고하고 있는 개념이라면, 우리는 왜 우리가 영화 속 리나, 조시, 벤트리스의 죽음을 보면서 단순히 ‘피’에 대한 ‘아’의 학살만을 보지 않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가령 영화의 말미 등대 안에서 벤트리스가 (어딘가 좀 촌스럽긴 하지만) “Annihilation!”을 외치며 말 그대로 소멸하는 장면을 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어둡고 침침한 것이 아닌 형형색색의 무지개 색깔이 그녀를 휩싸고 도는 것을 본다. 게다가 리나가 마지막에 응시하던 그 꾸물거리는 물체, 정말이지 생물학에서 이야기하는 ‘Gene pool’이 그대로 들어맞는 듯 한 그 용광로의 색깔 자체도 그것이 공포의 대상이라고 규정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색깔로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힘이 있고, 강도가 있고, 에너지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인 공포물에서 죽음을 대할 때 느끼던 색깔과는 사뭇 다른 것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소멸>에서 단순히 불쾌하고 무서운 공포감만이 아닌 설명되지 않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6. 나가면서

우리는 먼저 영화 <소멸>을 ‘죽음’이라는 개념을 매개해 접근해보았다. 일반적으로 공포물은 모두 이 ‘죽음’의 주제를 포함하며, 이 ‘죽음’의 문제는 다시 ‘누가 죽이는가?’의 문제, 즉 ‘공포를 유발하는 대상이 누구인가?’의 문제로, 그리고 나아가 ‘그 대상이 식별 가능한가’의 문제로 이어지며 결국 ‘경계’에 대한 문제로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보았다.

공포물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단초를 마련해주지만 우리가 죽음을 단지 ‘아무개의 죽음’으로 사유하는 경우 부지불식간에 경계가 명확한 피아식별의 단계로 미끄러지고, 거기에서 단순히 삶에 대한 부정과 대립으로의 죽음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죽는단 말인가? 죽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등대에서 백린탄으로 스스로 소멸의 길을 걷는 케인이 말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했어요. 난 삶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나를 케인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케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당신이었나요? 당신은 나였나요?”

우리는 영화 말미 쉬머에서 빠져나온 리나의 팔에 새겨져 있던 Ouroboros(종종 니체의 영원회귀를 상징할 때 사용된다. 영원회귀는 어떤 면에서 끊임없는 소멸에 대한 니체적 판본이라고도 볼 수 있다.)의 의미를 너무 쉽게 간과하고 만다. 그것은 단지 ‘사실 이 여자는 진짜 리나가 아님’을 지칭하는 표식, 즉 피아식별의 표식이 아닐뿐더러, 단순히 닫힌 우주 안에서 순환하는 유전체들과 생물체들의 생태를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수학의 ‘무한’표시처럼 생긴 이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은 말 그대로 소멸의 과정이 그 자체로 무한하며 그 안에서 끊임없는 생성(혹은 사멸)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한 생성의 흐름 속에서 ‘경계 자체’에 비해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내가 있은 이후로 어떤 경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경계 자체가 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외부와 내부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는, 그래서 Ouroboros의 원환처럼 계속되는 과정들이 진행되고 있는 바로 그 경계의 상태가 바로 ‘나’를 나타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경계에서 바로 죽음과 동시에 삶이 유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죽음과 삶이 뒤섞인 소멸의 현장을 지극히 아름답고도 불쾌하게, 그리고 그만큼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보여지는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uBsJgceM0KI&t=13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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