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호] 신자유주의 시대 맑스의 '자본'은 유령인가?ㅣ조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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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9-01-08 23:53
조회
1139
 
 

신자유주의 시대 맑스의 '자본'은 유령인가?


조현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초까지 서구의 자본주의 ― 엄밀히 말해 유럽의 자본주의 ― 는 케인즈주의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서 이른바 복지국가로의 발전노선을 채택하였다. 체제대립이라는 이념적 영향 하에서 서구의 자본주의는 이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자신의 체제 내적인 공고화를 추구하였다. 물론 복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있었기는 하지만 이러한 발전노선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 나라에서 19세기말부터 존재했던 강력한 노동자계급 ― 1875년 독일의 사회민주당을 필두로 ― 의 이익을 지지하는 정당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나 복지국가에 대한 발전노선도 1970년대 제1차 석유파동과 더불어 강력한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하이에크, 프리드만 등과 같은 통화주의 사상가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로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는 ‘신우파’(New Right)의 출현으로 이어졌고, 1979년 영국에서 보수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새처리즘’을, 미국에서는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를 등장시켰다.


그 당시에 영국의 수상, 새처는 이렇게 외쳐댄다. “국가여! 물러가라”, “사회와 같은 그런 물건은 없다. 단지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 유모국가는 의존의 문화를 초래할 뿐이고, 이것은 시장에서 선택의 자유로 간주되는 그런 자유를 해칠 뿐이다. 국가는 최소국가의 역할만을 해야 하며, 그리하여 개인의 자립, 책임 그리고 기업가주의가 들어선다. 이 이념들은 통제받지 않는 시장자본주의의 효율성이 성장과 포괄적인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국가의 영역 ― 특히 복지 부문 ― 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세계사적 정치지형 속에서 대단한 위세를 부렸다. 1990년대 이후 실존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더불어 “역사의 종말”, “지구화”라는 용어로 곱게 치장한 자본논리적인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인간들의 일상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하나의 굳건한 논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외쳐대면서 국가의 불간섭은 곧 ‘시장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반면, 국가의 간섭은 ‘시장의 실패’를 초래한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추상적인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 정치지형 속에서 과연 맑스의 『자본』은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가? 이미 오래전에 “맑스주의의 위기” 소에서 “죽은 개” 취급을 받았던 맑스의 『자본』이 지니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해리 클리버의 책 『자본의 정치적 독해』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에서 맑스가 제시한 노동가치론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론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란 무엇보다 사회를 조직하고 우리를 통제하는 근본적인 수단으로서의 노동가치임을 강조한다. …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전 지구적 노동기계이며 우리의 삶을 노동에 끝없이 종속시키는 것에 기반한 시스템이다. 여기서 노동은 자본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명령할 수 있도록 자본에 의해 조직된다. 노동의 부과는 … 여전히 자본주의의 기본 특성으로,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문제들의 계속적인 근원으로 남아 있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노동을 부과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침식하는 우리의 투쟁 능력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클리버의 이러한 고민은 사실상 맑스가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를 논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맑스는 1867년 발간된 『자본』 1권 제1판 서문에서 “어떤 학문에서든 처음 시작하는 것은 어려우며” 특히 1장의, “상품분석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경제학 일반 혹은 “고전정치경제학”(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은 맑스가 논의하고 있는 상품분석에 관해 전혀 다루지 않았다고 하겠다. 맑스는 “자본의 생산과정”을 다루고 있는 『자본』 1권에서 상품에 관해 논의하고 상품에 관해 분석하고 있다. 그는 “정치경제학비판”을 상품분석에서 시작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집적으로 나타나며, 각각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는 상품분석에서 시작한다”. 그의 상품에 관한 분석은 1절, “상품의 두 가지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실체 ― 가치크기)”, 2절, “상품 속에 표현된 노동의 이중적 성격”, 3절, “가치형태 혹은 교환가치”, 그리고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등으로 구성된다. 맑스 역시 지적했듯이 1장은 이해하기에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만약에 독자들이 『자본』, 즉 “정치경제학비판”을 하나의 경제이론에 관한 서적으로 이해하고 1장, 상품분석을 읽다보면 어쩌면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장이 부르주아 경제이론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말이다.


클리버의 『자본의 정치적 독해』에 관해 서평하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 맑스의 『자본』은 하나의 경제이론에 관한 서적이 아니라 ‘사회비판이론’으로서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책이다. 맑스 “정치경제학비판”의 주관심사는 스미스와는 달리 경제적 범주가 담지하고 있는 하나의 사회적 관계를 고찰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자본은 동산, 혹은 부동산 등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 간에 발생하는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며, 그래서 하나의 사회적 관계를, 그것도 하나의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맑스가 말하고 있지 않던가! 『자본』의 “궁극적 목표가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폭로하는 데 있다”고 말이다. 그는 이러한 “근대사회의 운동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갈망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가치의 관한 학문”을 재정립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질서를 염원했다고 하겠다. 간단히 말해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은 단지 정치경제학과 “고전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치경제학의 근본적 구조와 내용을 완전히 다르게 탈바꿈하고 있다. 클리버가 『자본』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주장할 때, 염두에 두었던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클리버의 『자본의 정치적 독해』는 거의 정확히 『자본』 1권의 1장, 상품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먼저 그는 맑스 독해 ― 여기서 다른 맑스에 대한 연구흐름들은 제외하고서 ― 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철학적 독해, 둘째, 정치경제학적 독해, 그리고 정치적 독해가 바로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맑스에 대한 철학적 독해는 그의 저작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독해는 역사적 유물론의 틀 내에서 『자본』을 경제이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클리버는 철학적 독해와 정치경제학적 독해가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 독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수동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맑스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리버는 맑스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강력하게 제시하면서 『자본』 1장이 담지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정치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수행되는 맑스에 대한 전략적 일기를 지시하는 것에 국한하여 사용”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맑스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모든 개념의 의미와 관련성을 당면한 노동계급 투쟁의 발전에 비추어 규정하는 방향으로 그것들의 접근법을 자기의식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구조화하는 읽기”로 정의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독해는 “구체적인 투쟁의 총체성 속에서만 개념들을 파악하기 위해 개념들이 그 투쟁의 총체성의 결정을 지시하도록, [계급투쟁에서] 분리된 모든 해석과 추상적 이론구성”을 피하고자 하는 그런 독해를 말한다. 클리버가 맑스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러한 독해야말로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맑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접근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클리버는 『자본』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독해와 관련하여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경제학이 가졌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 정치경제학은 정치경제학과 정치학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면서 맑스의 『자본』을 경제학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정치학의 영역(예를 들어 정치와 국가에 관한 이론)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클리버는 이 논의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칼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룩셈부르크, 레닌, 힐퍼딩, 오토 바우어, 부하린 등)의 입장들을 정리하면서 이들이 자본주의의 성장과 축적을 노동계급의 주도성과는 별도로 분석했다고 비판한다. 이들 대부분은 일방적으로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자본』을 독해하고 그런 나머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불안정성이나 그 착취적 성격만을 분석하는 그런 한계점을 노출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클리버는 맑스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독해가 지니는 한계를 정리하고 있다. 즉 정치경제학적 독해는 정치경제학을 경제적 영역 혹은 하부구조에 그 연구를 국한시켜 『자본』을 자본주의 공장과 그 임금노동자들만의 이론으로 협소화시켰다는 점이다. 클리버의 맑스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독해가 경제영역에 그 분석을 한정시켰다는 비판은 적실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클리버 역시 지적하고 있듯이 맑스에게 있어 자본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자 관계이며, 자본주의에서의 경제적 관계는 맑스의 분석에서 계급적 관계를 반영하며, 그런 이유로 정치적 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운동과 정치적 운동의 엄격한 이분법은 적어도 맑스의 사유체계 속에서는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정치운동은 개별적인 경제운동의 필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클리버는 맑스에 대한 철학적 독해를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그 두 가지 관점이란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정통주의는 “가장 편협한” 관점으로 엥겔스에서 스탈린주의 시대를 거쳐 알뛰세와 그 동반자들에 의해 재정식화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수정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등장한 새로운 요소들에 비추어 재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들로 규정한다. 이 수정주의에는 맑스에 대한 헤겔의 영향을 강조한 서구 맑스주의, 신칸트주의, 실존주의, 현상학적 맑스주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연관이 있는 비판이론 등의 아주 다양한 조류들이 포함된다. 클리버에 따르면, 이 두 관점이 지니는 첫 번째 요소로는 『자본』의 철학적 독해를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활시키려는 알뛰세의 시도이고, 두 번째 요소로는 서구 맑스주의와 비판이론에서 선진 자본주의 문화 영역에 대한 분석이다. 그런데 클리버는 알뛰세로 대변되는 이른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하부구조의 분석에 역점을 두어 『자본』을 계급투쟁과는 무관한 자본 개념을 분석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자본과 노동 간에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자본』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강조하는 클리버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이다.


클리버에 따르면, 문화 영역에서의 부르주아의 문화적 헤게모니라는 비판이론의 개념 역시 하나의 결함을 갖고 있는 데, 그것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사실로 상정함은 전능한 기술적 합리성을 사실로서 상정하는 것과 같이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성장을 인식하거나 이론화할 수 없는 무능력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사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폴록,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은 노동계급의 능력에 대한 비관주의적 견해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맑스에 대한 정치적 독해의 관점에서 클리버는 비판이론들이 지니는 한계들을 설명한 후에 주장하기를 자본주의적 지배구조 연구가 유익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조가 자본이 노동계급에게 부과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전략들로서 인식될 때뿐이며, 혁명적 전략은 관념적 비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투쟁의 끊임없는 현실적 성장 속에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노동계급의 역량을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 위해 노동계급의 힘의 발전 양식에 대한 전략적 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클리버는 역설하고 있다. 사실상 그의 정치적 독해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투쟁에서 이루어진다는 맑스나 룩셈부르크의 진술처럼 노동자들의 현실적 투쟁은 노동자 자신의 투쟁이며, 노동자들의 공식 조직의 투쟁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평가의 출발점은 노동계급의 자기활동성 혹은 노동계급의 자발성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리버의 『자본』에 대한 정치적 독해의 핵심은 『자본』이 “쌍방적” 분석(계급적 분석)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범주들과 관계들의 성격에 관해 근본적 통찰, 즉 자본의 관점 대 노동계급의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 클리버는 철학적 독해나 정치경제학적 독해가 빠져들기 쉬운 한계에 대해 다시 한번 경고하고 있다. 즉 이 독해들은 자본의 결정이 어떻게 노동계급에 부과되는지,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항하는 투쟁에 의해 어떻게 조형되는지를 분석하지 못하고 자본 자체의 일방적 관점을 기술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은 계급관계이며, 계급관계는 또한 투쟁의 관계이다. 또한 이 투쟁관계는 자신의 사회질서를 유지 및 확대하고자 하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자신의 자율적 이해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의 계급적 대립인 것이다. 맑스의 『자본』에 대한 정치적 독해가 규명하고자 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정치사회적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클리버는 『자본』과 자본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노동계급의 전략적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2장, 상품형태를 사회적 과정인 계급투쟁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본적 사회(세포)형태로 규정하면서 3장 가치의 실체와 크기, 그리고 4장 노동의 이중성과 5장 가치형태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장들의 개별적 내용들에 대해서는 논평을 접어 두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그 내용들에 대한 심각한 오류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본』 1장 상품에 관해서는 무수히도 많은 내용들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클리버는 맑스에 대한 독해를 세 가지로 분류한 다음 정치적 독해야말로 『자본』에 대한 적실성 있고 현재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런데 클리버는 맑스에 대한 독해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누면서 철학적 독해와 정치경제학적 독해가 지니는 한계들에 대해 지적하고는 있지만 과연 이러한 독해가 그 자체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론과 실천의 차원에서 혹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은 이 세 가지 종류의 독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정치경제학비판”은 정치경제학에 대한 단지 비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등장하는 주요 범주들이 지니고 있는 은폐된 사회적 관계들을 규명함에 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정치경제학비판”은 가치관계 속에 담겨 있는 지배와 피지배의 담론에 관한 실천학문의 성격을 갖는다.


클리버는 『자본』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 철학적·정치경제학적 독해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그런 독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클리버는 이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분명히 말해야 할 사항이 있다. 맑스는 『자본』에서 하나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정치이론이나 국가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자본』의 구절들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정치이론이나 국가론을 정립할 수는 있겠지만 맑스 자신이 직접 이 이론들을 구체적으로 정립하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의 역량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클리버는 노동계급에 대해 다소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물론 지금까지의 유럽의 노동운동사를 볼 때, 비록 자본의 폐지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노동계급의 현상태 ― 물론 나라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 는 노동계급의 투쟁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이나 덜 발전된 나라들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노동계급의 자율성이나 그 역량이라는 점에서 볼 때 노동계급의 역량에 대한 클리버의 낙관적 견해에는 좀 의문이 든다.


내가 판단하기에 한국 노동자의 노동조건들은 수백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기업적 구조라는 현실을 감안해보면 실제적인 의미에서 별로 개선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축약시킬 수는 없겠지만 국가와 자본가계급의 동거 그리고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의 미성숙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클리버의 『자본』에 대한 정치적 독해는 그 견해들이 어느 정도로 실천의 장으로 전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예단할 수는 없지만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이 담지하고 있는 함의들을 잘 파악하고 있는 책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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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18년 12월 29일 <대자보>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bit.ly/2VBGY5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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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빠띠스따(해리 클리버 지음, 조정환‧서창현 옮김, 갈무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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