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10장 앞부분

작성자
outis
작성일
2019-01-19 19:40
조회
526
3부 10장
금융적 명령과 신자유주의 통치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중과 함께 시작해야한다. 자본의 ‘천재성’과 그것의 신자유주의 ‘혁신’은 내생적 발전인 양 그 용어자체로 이해될 수 없다. 대신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증가하는 힘을 포함하려는 시도로, 저항과 반란에 대한 반응으로 파악되어야한다. 신자유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혁명의 과정 이후의 많은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반동적이다. : 낭만주의와 민족주의의 몇몇 긴장은 계몽주의와 그것의 보편주의의 혁명적 흐름에 반응했고, 파시즘은 혁명운동에 대항하여 일어났고, 국가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리즘에 반대했으며, 권위주의 정권은 대중 봉기에 대응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이와 유사하게 반응인 것은 맞지만 철학과 정치보다는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행위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신념’이기보다 ‘과학’이며, ‘교회’의 권위보다 자본의 명령을, 네이션 정체성보다는 시장의 힘을 동원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다수적이고 다양한 배치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성취한다. 반면 신자유주의가 직면하는 다중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생산적 지형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그 스스로의 자원과 부, 그리고 지성을 갖는다. 이것은 전투의 용어들을 설정한다.

신자유주의의 표준적 전술 하나는, 국가를 탈민주화(de-democratize)하기 위해 착취와 억압의 새로운 경제적 도구를 발명하는 것이다. 케인즈주의가 - 복지, 경제 규제, 공적 통제의 국가 구조와 함께 - 가장 저속한 이에서 가장 정교한 이에 이르기까지, 로널드 레이건과 밀턴 프리드먼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제프리 삭스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 첫 번째 적으로 일관되게 선언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케인즈주의의 증오는, 진보적 성격뿐 아니라 사회적 힘들을 포함하고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타협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960년대 후반까지 사회운동은 강력하게 도전했고 복지국가의 징계체제를 지양했다. 새롭게 출현하는 위협의 가장 명쾌한 (그리고 정직한!) 통역자 중 한 명인 새뮤얼 헌팅턴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 노동자, 여성 및 유색인 모두를 포함하여 대다수 인구를 구성하는 - ‘주변부 사회적 그룹’의 저항과 해방운동이 케인즈주의 국가에 과부하가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흑인, 인디언, Chicanos, 백인 에스닉 그룹, 학생, 여성들의 사회 참여 확대는 현저하게 높은 수준의 자의식에 반영되었다. 그들 모두 ‘행동’과 그 보상에 대한 적절한 몫이라 여겨지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동원되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헌팅턴의 진단은 정치시스템이 “민주주의의 질병”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었고, 유일한 치료법은 국가를 탈민주화하고 전문가의 손에 힘을 유지시키며 다중의 힘과 참여를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즉 ‘주변적’인 것을 그들의 주변적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헌팅턴은 많은 다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만 인정했다. 케인즈주의 국가는 파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요구의 홍수에 직면했을 때 그것은 자본과 그 징계체제를 취약하게 만드는 약한 방어이고 결함있는 세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한 가지 과제는, 사회적 투쟁이 일어나는 구조를 해체시키고 자본주의적 명령과 사회적 요구 사이의 매개를 깨는 것이다. 경제 위기는 케인즈 정부 정책에 대한 투자를 약화시키고 정치적 신념을 부정하는 이 전투에서 근본적 무기가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정치적 위기와의 콜라보 속에서 이 프로젝트는 추출과정과 빚의 메커니즘이 사회 전반에 걸쳐 착취를 확산시키는 점유(약탈) 경제를 - 돈과 금융적인 힘의 새로운 용도를 통해 - 일반화할 수 있다. 슘페터에서 폴라니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예견한 사회주의 방향의 경제의 ‘거대한 전환’은, 새로운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폭력을 동반한 국가 제재에 의해 전복되었다.

(케인즈주의 국가 추종자로서 헌팅턴이 자본주의 통제 전략을 인정한) 신자유주의는 저항과 해방 운동에 대한 반작용이면서 억제 시도로 가장 잘 이해되었다. 예를 들어, 프레이저는 복지국가 가부장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국가 정책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와 제2의 페미니즘 물결(1960년대와 70년대의 다른 해방 투쟁들과 함께) 사이에 충격적 공명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명은 그녀에게 “제2의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필수적인 기여를 했다”고 결론짓게 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페미니즘(또는 일반적 해방 투쟁)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투쟁에 반응하고, 어떻게 그 투쟁이 표현된 주장과 개념을 왜곡된 형태로 전유하는지로 읽는다. II부에서 분석한 새로운 힘은 이제 자본의 발전과 현대사회의 통제 메커니즘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반응은 모든 형태로, 심지어 평화의 외관을 하고 있을 때조차 마치 추출의 금융 방식이나 다른 점유(약탈) 메커니즘의 경우처럼, 끝나지 않는 전쟁의 폭력을 이용한다는 점을 명심해라

신자유주의는 일반적으로 경제적 얼굴을 보여 주지만 정치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시장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국가를 재발명했다. 계급투쟁과 사회적 요구로부터 벗어나고, 사회적 갈등의 위험에서 벗어난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과 실천을 끌어오며, 완전히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를 종속시키면서. 신자유주의의 이 ‘정치적’ 형태는 시스템 다른 모든 부분에 만연한다.

케인즈주의라든지, 이전에 국가의 행위를 통해 사회적 요구와 계급투쟁과의 균형을 만들고자 했던 다른 해결책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늘날 불가능하다. 복지를 제공하고 사회적 갈등을 억압한 국가의 사회적 모델은 생산 양식의 전환에 보류되었다. 신자유주의와 그 지배형태를 반대하고 전복시킬 유일한 가능성은, 신자유주의가 포함하도록 고안된 것과 동일한 사회적 힘, 즉 다중과 그 해방 프로젝트에 있다.


금융적 포획과 사회적 가치
금융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생산의 자본주의 양식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경제와 사회 전체 형성에 지배적 역할을 한 산업자본에 대한 강력한 보완이 되었다. 금융은 추상화와 중앙집중화의 도구 -제조에서 대기업의 지배와 독점에 이르는 통로를 닦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 기획의 무기고에 무기를 제공하는- 를 제공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산업과 금융의 관계가 뒤바뀌어 이제는 생산과 착취의 근본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금융이 우세해졌다.

우리는, 금융의 규칙과 점점 더 복잡해지는 도구를 염두에 두며, 자본이 자연의 선물인 무주지(terra nullius)의 가치를 포획하고 추출하는 것을 통해 축적된다는 것을 살필 것이다. 금융자본은 땅과 사회에 묻혀 있는 가치들인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지만, 물론 이 가치들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생산되고 그 추출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우리는 추출이 가져올 파괴 뿐 아니라 저항과 반란의 잠재성도 인식하기 위해 아래로부터 자본의 추출과정을 추적해야 한다.

금융자본의 힘이 어떻게 강화되었고 실제로 금융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금융이 전체 경제와 사회에서 지배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 무엇이 바뀌었는지 볼 것이다. 우리의 가설은 이 경우에도 역시 아래로부터의 관점, 즉 사회적 생산과 저항의 측면을 채택할 때, 플레이의 힘들과 해방의 잠재력들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금융자본과 추출의 작동과 관련해 더 깊이 파고들기 전에 이 가설이 거시적 차원에서 보이는 것을 간략히 살펴보자.

확실히 어떤 설명력을 지닌 금융의 부상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세계시장의 증가하는 역할, 그리고 이에 부응하여 국가적으로 조직된 산업경제의 쇠퇴를 강조한다. 1970년대에 시작한 긴 경제위기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또는 해체)와 함께 통화 통제는 네이션스테이트에서 글로벌스탠다드로 이동했다. 그리고 공적부채에 대한 통제는 점차 주권국가 독립체로부터 벗어나, 금융자본 보유자들에 의해 세계시장에서 결정된 가치의 메커니즘을 따르게 되었다. 공적부채에서 주식시장으로의 이동과 함께 마라찌가 설명하듯 “금융시장은 과거 케인즈주의 정부의 책임이었다. 즉, 지속성장 보장에 필수적인 효과적인 수요 창출 역할을 했다.” 세계화 및 세계시장의 증가하는 힘과 직면하여, 지배적 나라들에서 산업생산 조직은 주권에 기초하는 네이션 스테이트의 정당성과 기능의 핵심요소를 잃는다. 산업의 중요성이 쇠퇴하는 것은 - 특히 산업생산이 지배적 국가에서 후발국가로의 지리적 이동을 하는 것 - 금융의 중요성이 부상하는 것과 거의 상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융의 부상은 세계화와 부합하긴 하지만 사회적 저항과 반란의 힘들의 결과로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더 잘 이해된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지금 논쟁의 개요만 살핀다. 복지구조, 제도 노조, 제국주의 체제와 함께 2차 대전 이후 출현한 지배적 국가에서 “개혁주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 운동과 해방운동, 기타 사회적 투쟁을 포획하도록 고안되었다. 그것은 아마 민주적 규칙에 따라 사회적 습성들을 규율했다. 이 시스템에 대항한 반란은 자본주의 규율과 제국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운동의 글로벌한 순환 속에서 1968년 무렵 절정에 달했다. 식민지들이 남반구에서 독립을 얻자 지배국가의 노동자와 예속된 대중들은 점차 강력한 요구를 했다.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한 국채는 빠르게 재정위기를 낳았다. 20세기의 마지막 수십년에 걸쳐 전세계 나라들에서 반복된 재정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은 공적부채를 민간은행으로 넘기고, 그 과정에서 공공 거버넌스 메커니즘을 금융시장의 지배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부채의 구조가 공공에서 사적인 것으로 이동함에 따라 경제발전과 사회적 정의 모두 글로벌 시장과 금융의 통치에 종속되었다. 결국 신자유주의 행정부는 공공부채와 주정부 거버넌스의 이중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금융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국가를 재조직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순서를 밟았다. 저항과 반란 → 정부지출 → 재정위기 → 금융화.

일련의 반란 → 공공부채 → 재정위기의 작은 규모의 버전은 특히 미국 주요 도시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1960년대의 사회적 저항과 도시 반란의 다양한 형태는, 특히 1967년 Newark과 디트로이트 폭동과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 1968년 폭동의 확산 등의 인종반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반란의 주기 이후 10여 년간 드라마틱한 도시 재정 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도시들에서는 재정위기가 주로 지출증가가 아니라 대도시 중심에서 공공자원의 이동과 도시 바깥으로 이동하는 부유한 백인 대중에 의한 과세 기반의 급속한 감소에 기인했고, 건강과 주택으로부터 안전과 물공급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사회적 서비스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런 위기는 공공재의 큰 몫을 전용하고 공공기관의 민주적 기능을 약화시키기 위해 ‘비상사태’를 이용하는 민간은행과 재정자금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 뉴욕은 1970년대 이 과정의 고전적 사례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뉴욕 재정위기의 관리는 1980년대에 레이건과 IMF를 통해 민주적이고 국제적으로 신자유주의 과정을 위한 방법을 개척했다.”고 했다. 금융기관의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재정위기 ‘해결’은 비극적인 사회적 결과를 수반하며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행정과 금융 통치의 창조는 대규모의 프로세스가 아니라 어떻게 가치 창출과 관련해 금융(재무)기능이 이루어지는데 초점을 맞출 때 더 잘 이해된다. 금융에 대한 통상적 비판은 대개 그것이 가치 생산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 가치의 소유를 간단히 이동시킨다. 그런 비판은 종종 지배적 국가들이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한다는, 모든 ‘진짜’ 생산은 중국에 있다는 식의 애도를 수반한다. 금융에 대한 가장 인기있는 묘사는 주식이나 상품선물(commodities futures) 또는 주택시장이나 통화 혹은 고위험 베팅과 같이, 금융을 도박 혹은 카지노 자본주의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는 확실히 어떤 진리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심지어 금융을 약탈 기구라기보다 도박으로 묘사하는 학술적 논의가 진실에 가깝다. 금융은 철도나 전화 시스템, 산업 또는 국가의 문화유산 같은 공공재이 개인소유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기능한다. 그것은 또한 금속, 석탄, 석유 같은 자연의 부에서 사적축적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금융이 확실히 관여하는 ‘원시축적’의 이런 과정들 하로 돌아갈 것이다. 도박에서 약탈까지의 이런 설명은 부의 발생이 아니라 단지 부의 이동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아래에서 봤듯 도박 투기들과 더불어 금융은 사회와 자연세계의 가치를 포획하는 장치로 기능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금융 자본의 생산양식이 어떻게 기초되는지, 또 한편으로 사회적 협력의 제어(통제)와 사회적 삶의 무수한 회로에서 생산된 가치 추출, 그리고 또 한편으로 우리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지구와 자연적 부의 다양한 형태들로부터의 가치 추출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금융은 헤게모니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데, 공통적인 것은 탁월한 생산력과 가치의 우세한 형태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추상/추출
금융자본에 대한 최초의 위대한 분석은 그것의 근본적으로 추상적인 본성을 강조하여 생산자와 생산을 제어하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증폭시켰다. 20세기 초, 루돌프 힐퍼딩과 블라디미르 레닌은 기업가에서 은행가에 이르기까지 제어의 이동과 관련되는 금융자본의 신기함을 파악했다. 비교적 생산과정에 가깝게 관여하고, 생산적 협력의 배치를 지시하는 기업가와 비교할 때 은행가는 생산으로부터 거리가 멀고 추상적이다. 이 증폭된 거리는 직접적 조직과 노동자 착취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으로부터 이동(전환)에서 나타난다. 레닌은 “화폐(money)자본은 산업자본이나 생산자본과 분리되고, 그리고... 전적으로 화폐자본 소득으로 살고 있는 임대인은 기업가나 그리고 자본관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이들과 분리된다.”고 설명했다. 모든 임대창출(rent-generation) 활동처럼 금융은 생산으로부터의 추상(추출)과 멀리서 통치할 능력에 의해 성격지워진다. 게다가 은행과 산업 사이에서 점점 조밀해지는 관계망과 함께, 그리고 자본이 은행을 통해 산업자본가들에게 배타적으로 사용가능해짐에 따라, 금융자본은 생산에 대한 중앙집중적 제어(통제)를 용이하게 했다. 추상화는 중앙집중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힐퍼딩과 레닌은 중앙집중화는 경쟁을 없애고 몇몇 거대은행에 통제를 집중시키는 경향을 만든다고 말한다. 금융은 독점, 생산을 지배하는 돈의 독점을 야기한다. 레닌은 계속 말한다. 금융자본의 독점은 유럽 제국주의 체제의 핵심적 기둥 역할을 했다고.

돈의 집중과 은행의 생산 통제는 또한 경제 부문들과 세계시장에서 이윤율의 균등화에 대한 일반적 경향을 만든다. 균등화는, 더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이동을 통해,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한 생산영역에서 다른 생산영역으로의, 그리고 일자리와 더 나은 임금을 위한 나라와 나라 사이 노동자의 이주를 통해 부분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자본주의 기업의 이동성과 노동의 이동성조차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요소들, 즉 ‘실제적 마찰’(맑스의 말대로)에 심하게 제약받는다. 금융과 신용 시스템은 돈의 이동성이 노동자나 기업의 그것보다 덜 제한적이므로 균등화 프로세스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금융자본이 가장 크게 회수할 수 있는 곳으로 흐를 때 그건 울퉁불퉁한 지형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처럼 평평한 표면을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은행의 생산에 대한 제어의 집중과 중앙집중화, 그리고 이윤의 비교와 균등화 경향은 세계시장 창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세계시장을 가로지르는 잉여가치와 착취의 균등화의 일반적 비율의 확립은 맑스가 말했듯 단지 경향이고, 그리고 모든 경제법칙처럼 이론적 단순화이지만 별로 현실적이지는 않다.

은행과 돈의 손아귀에 독점된, 생산에 대한 제어의 추상화와 중앙집중화, 그리고 이윤과 착취의 비율을 동등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세계시장을 가로지르는 이 힘의 확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융의 주요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금융은 단순히 ‘실제’ 산업생산에 기생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따라서 금융의 커지는 중심성은 전체 자본의 부패하고 불안정한 토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금융자본과 그것을 지배하는 생산은 산업자본과 똑같다. 주요 차이가 있다면, 생산, 특히 생산적 협력은 자본의 직접적 개입 바깥에서 조직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금융(그리고 자본주의 축적)의 핵심은, 다른 곳의 가치, 즉 지구의 부 그리고 사회적 협력이자 상호작용의 산물인 부로부터 어떻게 가치가 추출되는지이다. 이것은 추상화와 추출 사이의 연결이다.

1970년대 이래로 금융과 사회적 생산이 부상하는 과정에서, 파생상품 운영, 특히 어떻게 그것들이 측정과 호환측정의 메커니즘들을 어떻게 창조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창이 제공된다. 가장 기본적 형식의 파생상품은 단순히 기초자산과 지수, 또는 안전성으로부터 가치를 끌어내는 계약이다. 전형적으로 파생상품은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나타내기에 리스크 회피나 투기(추측)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다음 수확이후 6개월이 지나 브라질 돈의 특정가격에 브라질 콩을 구매하기로 계약한 일본회사를 상상해봐라. 일본 쪽에서는 파생상품을 사용하여 환율을 고정하고 엔화에 대한 실질 가치상승에 대비해 콩의 가격을 높일 수 있다. 반대로 브라질 쪽은 파생상품을 사용하여 콩의 가치를 보증하고, 계약을 손해 보게 할 수 있을 수확 실패에 대비해 보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회사들은 리스크회피를 위해서, 다른 회사들이 실질가치가 떨어지거나 콩 수확량이 풍요로울 것이라는 예측을 해야만 한다.

파생상품은 수세기동안 존재해 왔지만 1960년대까지 주로 쌀, 돼지, 밀 같은 상품에 대한 선물시장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규율적 산업질서와 재정상태가 붕괴했듯,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경제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듯, 파생상품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폭넓은 범위의 기초자산을 포함했다.

파생상품은 아주 복잡하고 비밀스러워서 그 작동에 대한 적절한 분석은 우리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주장은 파생상품의 측정의 역할 같은 특정한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노동시간의 양에 관해 리카르도나 맑스가 이론화했듯, 사회적 생산에 직면할 때 자본이 더 이상 가치를 제대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주장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더 이상 부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조하는 부는 측정할 수 없다.(혹은 더 이상 측정할 수 없다.) 지식, 정보, 돌봄이나 신뢰의 관계, 교육의 결과물, 의료서비스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 그러나 사회적 생산물과 가치의 측정은 여전히 자본주의시장에서 요구된다.

파생상품은 측정 문제에 대한 금융쪽 응답의 일부분이다. 생산활동의 실제 구조와 관련해서 그들의 추상적 입장은 파생상품이 광범위한 형태의 부 사이에서 복잡한 전환의 망을 형성하도록 한다. 많은 형태의 파생상품들, 예컨대 알려지지 않고 변동적인 자산-통화의 미래 가치 또는 우리 사례의 추수의 산물-을 잡아라. 그리고 그걸 거래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라. Dick Bryan와 Michael Rafferty는 그런 거래를 성립시키면서 “파생상품은 알려지지 않은 가치에 대한 시장 기준점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Bryan과 Rafferty는 모든 파생상품 생산이 “단지 선물상품계약이든 특별한 주식시장 지표에 대한 특별한 통화지표의 복잡한 전환이든 자본의 한 형식을 다른 것으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패키지다. 모든 이 생산들이 함께 이루어질 때 그것들은 전환의 복잡한 망과 파생상품 시스템을 형성한다. 자본의 ‘비트’가 언제 어디에서나 시공간적으로 자본의 다른 ‘비트’에 대해 측정될 수 있도록 하는. 하지만 그 가치들은 정확한가? 그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사실은 측정이 정확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가치는 알려지지 않았고 측정될 수 없으며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임의적이지만 여전히 꽤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양을 ...

비평가들은 금융- 파생상품조차- 허구적이고 기생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추출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면서 비웃는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해야 한다. 그러한 금융적 메커니즘은 위기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킨다. 우리가 보게 될 금융의 변동성은 영속적 위기를 신자유주의 통치의 주요방식으로 삼는 하나의 요소다.


추출의 많은 얼굴들
추출, 특히 석유, 천연 가스, 금속 및 광물 같은 천연자원의 엄청난 추출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본은 시계를 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토지취득과 무모한 추격은 Potosí의 은광과 요하네스버그의 금광에서 원주민으로부터 땅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잔인한 착취 장면을 쉽게 연상시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복, 콜로니얼리즘, 제국주의의 역사는 다양한 형태, 군대와 이데올로기의 지속적 지지와 더불어 전지구에서 가져갈 수 있는 ‘발견되고’ 자유로운 부로부터 부를 추출하는 기갈에 의해 추동되었다. 물질적 자원만큼이나 인간은 동산(chattel)으로 추출될 수 있었고, 대서양 노예무역을 통해 그들의 가치는 식민자들의 장부에 입력되었다. 땅, 귀금속, 동물모피, 향신료, 아편, 그리고 ‘모자란 인간’은 모두 식민자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들의 과감한 노력을 위해 그저 디저트로 선포된 선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추출의 중심성은 비록 그것이 너무 잔인하게 파괴적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잔재 또는 주기적인 역사적 복귀의 표시가 아니다. 현대의 추출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가이드는, 공통적인 것이 사유재산으로 추출되고 변환되므로, 실제로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에 따른다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두 가지 일반적 범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지구의 부와 그 생태계로, 일반적으로 천연자원 또는 원자재 등 경제적 어휘로 번역되고, 또 한편으로는 협력회로로, 문화생산물로부터 산물인 사회적 부, 문화상품에서 전통 지식, 도시 지역 및 과학 지식에 이르기까지 협력의 회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공통적인 것의 이 두 형식은 추출주의의 다른 면을 이해하는 첫 번째 지침이 된다.

지구와 그 생태계 - 땅, ​​숲, 강, 바다, 대기- 는 인간이 지배해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이어야(공통적이어야만) 한다. . . 온 땅 위에(창세기 1:26).. 오히려 우리는 함께 돌봄과 지속 가능한 사용의 관계를 수립해야한다. 지구의 표면과 깊이로부터 일반적으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추출하는 것은 부당한 문제뿐 아니라(일반적으로 공통적인 무언가가 사유재산이 될 때 항상 그렇듯이) 대규모적이고 심지어 파국적인 파괴의 예측까지 제기한다. 자본주의 산업과 상품화는 오랫동안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추출주의가 그 과정을 머리위로 가져오고 어떤 보상도 하지 않는다. 지구에 반하는 자본 - 하나 또는 다른 하나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둘 다 살아남을 수는 없다.

추출산업, 특히 에너지 산업의 환경적, 사회적 파괴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추 및 운송사고로 인한 대량 유출은 석유산업의 지속적 부산물이었고, 그 규모와 빈도는 갈리시아, 멕시코 만, 우즈베키스탄, 쿠웨이트, 앙골라 등등 전 지구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석탄채굴방법은 광부의 건강과 광산 주변 환경을 계속 파괴한다. Maristella Svampa가 추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고 많은 국가(걸프만 주변,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가 전망이 상승하는 화석 연료 회사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Maristella Svampa가 ...
(167쪽 2번째 단락 8번째 줄부터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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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ludante | 2019.02.10 | 추천 0 | 조회 1932
ludante 2019.02.10 0 1932
공지사항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ludante | 2019.01.27 | 추천 0 | 조회 1883
ludante 2019.01.27 0 1883
공지사항
비밀글 <어셈블리> 세미나 참가자 명단 - 2019년 1월
ludante | 2018.07.05 | 추천 0 | 조회 11
ludante 2018.07.05 0 11
95
3장 발제
july123 | 2020.03.21 | 추천 0 | 조회 501
july123 2020.03.21 0 501
94
[공지] 1월 18일 7시 모임 공지
ludante | 2020.01.12 | 추천 1 | 조회 553
ludante 2020.01.12 1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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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분량 수정본
july123 | 2020.01.11 | 추천 0 | 조회 533
july123 2020.01.11 0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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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1월 11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 공지
ludante | 2019.12.14 | 추천 0 | 조회 695
ludante 2019.12.14 0 695
91
12/14 실비아 페데리치 번역모임 정리 파일입니다.
ludante | 2019.12.14 | 추천 0 | 조회 601
ludante 2019.12.14 0 601
90
발제
rakuta | 2019.12.14 | 추천 0 | 조회 559
rakuta 2019.12.14 0 559
89
합본
july123 | 2019.12.14 | 추천 0 | 조회 635
july123 2019.12.14 0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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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p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2.14 | 추천 0 | 조회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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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토요일 5시 페데리치 번역 모임이 열립니다.
ludante | 2019.12.06 | 추천 0 | 조회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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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치
evadongpachloe@gmail.com | 2019.11.30 | 추천 0 | 조회 655
evadongpachloe@gmail.com 2019.11.30 0 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