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6_발제] 제11고원(p.604-617)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19-03-16 16:07
조회
14
제11고원. 1837년-리토르넬로에 대해

p. 604-
따라서 오히려 영토적 모티프는 리듬적 얼굴 또는 리듬적 인물을 형성하고
영토적 대위법은 선율적 풍경을 형성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인물, 하나의 주체 또는 하나의 충동에 하나의 리듬이 연결되는 단순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때 “리듬적 인물”이 탄생한다. 그렇게 되면 리듬 자체가 “인물화”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율적 풍경도 결코 특정한 풍경과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선율이 아니라 선율 자체가 음의 풍경을 이루며, 잠재적 풍경과의 모든 관계 역시 대위법에 따르게 된다. 이런 식으로 플래카드나 포스터 단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토를 표시하는 플래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영토와 내적 충동 또는 외적 상황과의 관계를 표현해주는 모티프와 대위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음악적 재능이 있는 새와 음악적 재능이 없는 새를 구별해주는 것은 이처럼 모티프와 대위법을 구사할 수 있는 소질에서 찾을 수 있다. 모티프와 대위법은 리듬을 명확하게 하고 선율에 화성을 붙임으로써 가변적인 경우건 아니면 불변적인 경우건 새를 포스터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즉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이행) 기쁨과 슬픔과의 관계, 태양과의 관계, 위험과의 관계, 완성성과의 관계가 주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티프와 대위법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 아무튼 바로 이 모티프와 대위법 속에서 태양, 기쁨, 슬픔 또는 위험은 소리가 되고, 리듬이 되고 선율이 되는 것이다.

뱅퇴이유의 소악절은 종종 예술 애호가인 스완에게
불로뉴 숲의 풍경 또는 오데트라는 인물과 그녀의 얼굴
(플래카드처럼 기능)
어떤 특정한 차원이나 시점에서 보면 분명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다수의 모티프들과 연관성을 갖게 되면 각각의 모티프는 자신에게 고유한 판을 획득하며, 드라마의 줄거리, 충동과 상황으로부터의 자율성도 커져간다. 또 인물이나 풍경으로부터도 점점 더 독립하게 되어 자체적으로 선율적 풍경이나 리듬적 인물이 되며, 모티프는 상호간의 내적 관계를 끊임없이 풍요롭게 한다.
따라서 모티프는 비교적 강한 항상성을 갖거나 아니면 반대로 증대와 감소, 증가와 감쇠를 일으키며 모티프의 전개 속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모티프에는 박이 없으며 위치가 결정되는 경우도 없다. 상수들조차도 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상수는 가정된 것인 만큼 점점 더 경화되며, 연속적 변주에 저항하면서도 결국은 변화를 돌출시키고 만다.

바그너 식 모티프가 바로 이런 생명력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 최초의 선구자 중의 하나가 바로 프루스트였다.
즉 모티프는 더 이상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모티프 자체가 매번 나타날 때마다 그 자체로서 리듬적 인물을 만들며 “실제로 하나 하나가 하나의 존재인 수많은 음악들로 채워진 충만한 음악”속으로 몰입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뱅퇴이유의 소악절은 특정한 풍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여러 풍경(하얀 소나타와 빨간 제7중주곡)을 자기 내면 속에 담아 발전시키는 것이다.

틀림없이 선율로부터 비롯되는 풍경과 함께 리듬으로부터 인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예술이 소위 간판 위에 그려진 말없는 그림이 아니게 되는 예술상의 중요한 계기를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예술의 최종 단계는 아닐지라도 하여간 예술은 이와 같은 발전 단계들을 경유한다. 새와 마찬가지로 자기-전개를 나타내는 모티프와 대위법을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스타일로 되어 간다.

p.607-, 영토
영토란 우선 같은 종류에 속하는 두 개체간의 임계적 거리를 말하며, 이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다. 내 것이란 우선 내가 가진 거리를 말한다. 나에게는 거리밖에 없는 것이다. (...) 이처럼 임계적 거리는 표현의 질료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관계이다. 따라서 가까이 다가오는 카오스의 힘을 멀리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 마니에리슴. 에토스는 동시에 거주와 방식, 고향이자 양식이다.

영토적 춤 (바로크적 혹은 마니에리슴적) : 분명 각각의 포즈와 움직임이 임계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 포즈와 자세, 실루엣, 스텝이나 음성을 구사하려면 대단한 기량이 필요하다.
분열증에 걸린 두 사람의 경계와 영토의 법칙에 대한 대화 : 카오스에 위협당하고 있을 때 운반 가능하며 공기와 같은 영토를 그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필요하다면 내 영토를 나 자신의 몸 위로 옮겨 내 몸을 영토화해 보기로 하자. (거북이의 등딱지나 갑각류의 껍질, 신체를 영토로 만드는 문신들)
임계적 거리는 박자가 아니라 리듬이다. 그러나 이 리듬은 인물들 상호간의 거리를 없애버리는 되기를 통해 얻어지며, 이것을 리듬적 인물로 변화시킨다. 이 인물은 멀거나 가까운 거리를 취하며 긴밀하게 혹은 느슨하게 짜맞추어진다.(바로 이것이 음정이다.)

- 종과 성이 같은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 적대시하는 상황 : 한 마리가 자기 영역에 혹은 영역의 중심에 다가가는 경우 그러한 적대시의 리듬은 “증대”하고 다른 녀석이 자기 영토에서 멀어짐에 따라 감소 (이 양자의 경계선 상에서 동요가 일종의 변수로서 성립)
- 한 동물이 다른 성의 상대방 동물에게 자기 영역을 개방하는 상황 이 경우 이중주에 의한 복합적인 <리듬적 인물>이 형성되는데,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때까치처럼 노래의 교환, 즉 노래를 주고받는 현상이 나타남.
- 영토를 특징짓는 두 측면 : 영토는 같은 종의 구성원의 공존을 보증하고 조절하기 위해 구성원들간에 거리를 둚. 서로 다른 종이 가능한한 많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종을 분화시킴.

풍경은 인물로 충족되고 인물은 풍경에 소속되기 때문에 동일 종의 구성원들이 <리듬적 인물>로 변하는 동시에 여러 종이 <선율적 풍경>으로 변하게된다.

예술은 인간을 기다리지 않은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뒤늦게 인공적인 조건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예술이 오랫동안 예술 자체와는 본성이 다른 노동이나 의식에 머물러왔다는 것도 자주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예술은 인간과 함께 시작된다는 지적보다도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의 영토 내에서 두 가지 효과, 즉 기능들의 재조직과 힘들의 재결집을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1)기능들의 재조직 : 한편으로 기능적 활동은 영토화되면 반드시 새로운 양상을 띤다. 바로 여기서 특수화 혹은 직업화라는 모티프가 등장하게 된다. 영토적 리토르넬로는 직업적인 리토르넬로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직업적인 리토르넬로는 예를 들어 물건을 팔 때 부르짖는 소리처럼 환경 내에서 뒤얽힌다. 그러나 각각의 리토르넬로는 하나의 영토를 표시한다. 따라서 영토들 안에서 같은 활동이 벌어지거나 같은 소리가 울리는 경우는 없다. 바로 이것이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똑같이 통용되는 임계적 거리의 규칙으로서, 이를 통해 비로소 경쟁이 가능해진다. (한 행상이 보도의 이 부분은 내 것이라고 주장) 요컨데 기능들의 영토화는 기능들이 “노동”이나 “직업”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종간에 한정된 공격성 또는 특수화된 공격성은 필연적으로 영토화된 공격성이게 된다. <내 구역> 이처럼 영토화된 공격성은 영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결코 영토의 성립을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영토의 중심에서는 모든 활동이 새로운 실천의 양상을 띤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예술이 예술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노동이라는 기능의 출현을 조건짓는 영토화의 요인 안에 이미 예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힘들의재결집 : 영토화의 또 다른 효과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이 아니라 의식이나 종교와 관련되어 있는 이 두 번째 효과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영토는 다양한 환경에 포함된 모든 힘을 결집시키고 대지의 힘들을 모아 하나의 다발로 만든다. 흩어져 있는 모든 힘이 용기 혹은 토대로서의 대지로 귀속되는 것은 각각의 영토의 가장 심원한 곳에서만 일어난다. (...) 대기나 물의 힘, 그리고 새나 물고기는 이리하여 대지의 힘에 의해 변모해간다. 더욱이 외연으로서의 영토는 대지의 내적 힘들과 카오스의 외적인 힘들을 떼어놓는다 해도 “내포”에서는, 깊이에서는 사정이 일변해 두 유형의 힘이 서로 결합해가며 오직 대지만을 선별 기준이나 목표로 한 힘 겨루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토에는 모든 힘들이 합류해 에너지들이 격투를 벌이는 수목이나 숲과 같은 장소가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식의 격투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대지이다. 이러한 강렬한 중심은 영토 자체의 중심에 위치하는 동시에 엄청난 편력을 마친 몇몇 영토가 조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영토 바깥에 위치하기도 한다. 이처럼 바깥에 위치하건 아니면 안쪽에 위치하건 영토는 반드시 이 강도의 중심과 통해 있다. <내심, 외심>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고향으로서의 이 중심은 우호적이거나 아니면 적대적인 모든 힘을 낳는 대지의 원천으로서,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따라서 여기서도 역시 인간과 동물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교가 영토를 점유하는 것은 바로 이 종교가 노골적으로 영토화를 행하는 미학적 요인에 의존하기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처럼 영토화하는 미학적 요인이 환경의 기능들을 노동의 형태로 조직하는 동시에 카오스의 힘들을 결합시켜 의식과 종교로, 대지의 힘들로 전환시킨다. 영토화의 지표들이 모티프와 대위법으로 발전해가는 것과 기능들을 재조직하고 힘들을 결집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것만으로도 완전히 영토는 이미 영토 자체를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풀어놓게 된다.

p.611-,
우리는 끊임없이 이 “순간(moment)”으로 되돌아온다. 리듬이 표현-되기로 나가고, 표현에는 고유한 질이 나타나며, 나아가 표현의 질료가 형성되어 모티프와 대위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노출되었건 아니면 가공의 것이건 이 순간을 포착하려면 어쨌건 하나의 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코드와 영토 사이의 엇갈림을 확인하는 것이다. 영토는 자유를 보장한 코드의 여백에서 출현하는데, 이것은 한정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른 형태로 한정된다. (코드 변환이 아니라 탈코드화 차원) 다시 말해 코드 내에서의 변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여백이란 이른바 이중화된 유전자 또는 정해진 숫자 이외의 염색체를 말하며, 이것은 유전자 코드에는 포함되지 않으며 기능 면에서도 자유로와서 변이에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는 질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료가 돌연변이와는 무관한 새로운 종을 만드는 일은 이와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 개입해 유기체와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을 증대시키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다.

영토화는 다름 아니라 동일한 종의 코드의 여백 위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요인으로서, 이 종에 속한 각각의 개체들에게 분화의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영토성은 동종의 코드와의 관계에서 엇갈림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간접적으로 새로운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영토성은 어디에 나타난든 동종의 구성원들간에 임계적 거리를 성립시킨다. (...) 이 모든 의미에서 탈코드화는 영토의 “음화”로 나타난다. 그리고 영토를 가진 동물<영토성>과 영토를 갖지 않은 동물<영토화> 사이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덜 코드화되어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

p.612-, 영토에서 일어나고, 영토에서 비롯되는, 틀림없이 영토에서 일어나는 창조에 관한 평가

카오스의 힘으로부터 시작해 대지의 힘까지
환경들에서부터 시작해 영토들에 이르기까지
기능적인 리듬으로부터 시작해 리듬의 표현-되기까지
코드 변환 현상에서 탈코드화 현상까지
환경 기능에서 영토화된 기능까지
이것은 진화라기보다는 이행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다리나 터널과 비슷하다. 이미 환경들은 끊임없이 상호 이행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환경들이 영토로 이행한다.

우리가 미학적 질이라고 일컫는 표현적 질은 분명 결코 “순수하거나” 상징적인 질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고유한 질, 즉 소유와 관련된 질로서 환경의 성분에서 영토의 성분으로 전환하고 있다. 영토 자체는 이행의 장소이다. 영토는 최초의 배치물로서, 최초로 배치되는 것이다. 배치물도 원래는 영토적인 것이다.

때문에 먼저 영토의 내부 조직을 언급하여 영토의 성립을 말하고자 함.
먼저 내부적 배치물(모티프나 대위법)을 봐 두지 않으면 하위 배치물(포스터와 플래카드)을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배치물이나 장소로 통하는 길 위로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내부 배치물에 관해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 <리토르넬로>의 이행. 리토르넬로는 영토적 배치물을 향해 나가며 그곳에 설치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밖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표현의 질료가 모여 영토를 설립시키고 영토적 모티프나 영토적 풍경으로 발전해 갈 때 이것을 리토르넬로라고 일컫는다. 이보다 좁은 의미에서는 배치물이 소리를 내거나 소리에 의해 “지배받는” 경우에 리토르넬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왜 소리에 이처럼 엄청난 특권이 주어지는 것일까?

p.613-,
이제 내부 배치물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매우 풍요롭고 또 복잡한 조직을 갖고 있다. 영토적 배치물뿐만 아니라 배치되고 영토화된 기능들도 함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컷 굴뚝새의 집짓기 : 여기서 둥지를 짓는 기능은 강하게 영토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모든 둥지는 암컷이 다가오기 전에 수컷에 의해 준비되며 암컷은 집을 점검하고 그저 마무리를 할 뿐이기 때문이다. “구애” 기능 역시 영토화되어 있다.

내부 배치물에는 온갖 종류의 이질적인 성분이 개입되어 있다. 재료, 색채, 냄새, 소리, 자세 등을 결합하는 배치물의 지표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배치되어 하나의 모티프로 편입되는 다양한 행동의 요소들까지. 예를 들어 과시적 행동을 위해서는 춤, 부리를 울리는 동작이나 화려한 색깔의 과시, 목을 늘어뜨린 자세와 고성, 깃철 윤내기, 인사 그리고 리토르넬로가 필요하다. 여기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영토화를 일으키는 이 모든 지표, 영토적 모티프, 영토화된 기능이 완전히 동일한 내부 배치물 속에서 동시에 성립하도록 작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름의 문제이다. 이질적 요소들의 “동시적 성립”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퍼지 집합이나 이산집합을 이루고 말지만 마침내 고름을 획득하게 된다.

다시 제기하는 의문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임.
왜냐하면 많은 경우 배치되고 영토화된 기능은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배치물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독립성을 획득하며, 이렇게 해서 새로 성립된 배치물은 정도차는 있지만 탈영토화되거나 탈영토화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탈영토화의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실제로 영토를 떠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결국 방금 전까지 영토적 배치물 속에서 형성된 기능이었던 것이 이제는 다른 배치물을 조정하는 요소로, 또 다른 배치물로 이행하기 위한 요인으로 변화한다. 궁정풍 연애에서와 마찬가지로 색채는 영토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애”의 배치물에 속하게 된다. 이때 영토적 배치물은 구애의 배치물 혹은 자율화된 사회적 배치물을 향해 열리게 된다.

이것은 성애의 상대 또는 집단 성원을 고유한 일원으로 인식했을 때 일어나는 일로 영토의 식별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상대는 고향의 가치를 가진 동물, 다시 말해 “내 집에 적당한 동물”이라고 일컬어진다.

1)집단이나 짝의 집합 속에서 개별적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환경성 집단이나 쌍 (주21-환경의 블록을 이루는 어군 유형의 ‘무명의 집단’)
2)특정한 영토 안에서만 식별될 수 있는 영토적 집단인 짝(주21-영토 내에서만 인정이 이루어지며 인정의 범위를 최대한 확대해서 ‘근접종’끼리만 구분이 이루어지는 ‘장소적 집단’)
3)장소와는 무관하게 식별 가능한 사회적 집단과 연인(주21-자율적 ‘연결 관계’에 기초한 사회)
구애건 집단이건 더 이상 영토적 배치물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사 영토 내부에서라도 구애나 집단의 배치물이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영토적 배치물이 다른 배치물을 향해 열리는 사태
오스트레일리아의 피리새 과 새들은 수컷이 집을 짓지 않고 그저 둥지를 만들 재료를 운반하거나 집짓는 시늉만 할 뿐인 경우도 있는데, 부리로 나무 가지 하나를 물고 암컷에게 구애하거나(바틸다 속), 집 짓는 재료와는 별개의 재료를 사용하거나(네오크미아 속), 구애의 초기단계 또는 구애 이전 단계에서만 풀잎을 사용하는 경우(아이데모지네 속, 런크라 속)나, 풀을 선물로 건네지 않고 쪼아먹는 경우(엠블라마 속)도 있다.

물론 이처럼 “풀잎”을 사용하는 행동은 그저 오래된 습관의 반복 또는 집짓기 행동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배치라는 관념과 비교해 보면 행동이라는 관념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수컷이 집을 짓지 않는 경우 집짓기는 이미 영토적 배치물의 특성이 아니라 이른바 영토로부터 떨어져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집짓기에 앞서 벌이는 구애 자체도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배치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풀잎”이라는 표현의 질료도 영토적 배치물과 구애의 배치물 사이의 이행의 성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몇몇 종에서는 이러한 풀잎의 기능은 점차 흔적이 되며, 계열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게 되면 점차 소멸되어가지만 그것을 흔적이나 상징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근거는 없다. 표현의 질료는 결코 흔적이나 상징이 아니다. 풀잎은 탈영토화된 혹은 탈영토화 중에 있는 하나의 성분인 것이다. 오래된 습관도 흔적도 아니며 부분 대상이거나 과도적 대상 또한 아니다. 풀잎은 조작자이며, 벡터이다. 요컨대 배치물의 변환기인 것이다. 풀잎은 하나의 배치물에서 다음 배치물로의 중개 역할을 수행하는 이행의 성분으로 기능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의 풀잎이 소멸되더라도 다른 중계 성분이 이러한 이행의 성분을 대체하거나 점차 세력을 넓혀 가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중계 성분이란 리토르넬로를 말하는 데, 이것은 그저 영토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연애나 사회와도 연관되며, 그에 따라 변화한다.

“새로운 배치물이 성립될 때 “리토르넬로”라는 음향적 성분이 “풀잎”이라는 동작적 성분보다 더 강한 유발력을 갖는 것은 왜일까? (나중에 자세히)

현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영토적 배치물의 내부에서 새로운 배치물들이 형성된다는 것을, 즉 이행과 중계의 성분들을 통해 내부 배치물이 상호 배치물로 이행하는 움직임이 발생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암컷 또는 집단을 향한 영토를 혁신적 개방. 선별 압력은 상호 배치물을 통해 작용한다. 마치 탈영토화의 힘들이 영토 자체에 작용해 영토적 배치물에서 구애나 성욕, 집단이나 사회 등 다른 유형의 배치물로의 이행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풀잎과 리토르넬로는 이러한 힘들의 인자, 탈영토화의 인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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