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 사라진 삐라ㅣ김명환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9-04-01 14:50
조회
249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13


사라진 삐라






1938년 10월 18일 새벽,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위원회’ 선전담당 김재갑에게, ‘철우회’ 선전담당 이재선이 체포됐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연락이 오지 않고, 선전부원 정진태가 왔다. 보안수칙 위반이었다.


아지트 정리는 금세 끝났다. 문제는 인쇄소였다. 인쇄소에 지난 밤 늦게 인쇄를 끝낸 『노동자신문』 36호가 있었다. 날이 밝는 대로 배포선을 탈 예정이었다.


“자네는 먼저 가게. 나는 신문을 폐기하고 가겠네.”

정진태가 말했다.

“인쇄소엔 내가 가겠네.”

김재갑이 말했다.

“자네는, 조직의 지도부네.”

정진태가 말했다.

인쇄소를 알고 있는 네 사람, 김재갑과 정진태와 이재선과 선전지원담당 송별립. 넷 중 하나에게 일이 생기면, 인쇄소를 버리고, 신속하게 원산지역을 벗어나 안전을 확보하고, 연락선을 개설하는 것이 보안수칙이었다. 하지만, 조직의 생명과도 같은 신문을 적에게 넘겨줄 순 없었다.


조직의 지도부……. 두 눈이 마주쳤다. 정진태와 보낸 지난 몇 년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경성제대 독서회 시절, 새파란 문학청년이었던 정진태는, 빛나는 혁명가가 되어있었다. 지하 비밀인쇄소, 등사잉크냄새와 종이먼지 속에서 보낸 나날들. 원고수발과 교정교열윤문, 등사물품 보급투쟁, 인쇄와 배포까지, 살얼음을 가려 딛고 전진해왔다. 정신없이 삐라를 만들었다. 빛나는 시 한 편 쓰지 못했지만, 그는 그 어떤 혁명시보다 빛나는 혁명가였다.


정진태는 인쇄소로 향했다. 철필로 긁은 글자 하나하나가, 문장 하나하나가, 일제와 맞서는 총칼이었다. 조직의 총칼을 적에게 빼앗길 순 없었다. 조직은 선전을 통해 조직원과 만난다. 조직원은 선전을 통해 정세와 전망과 투쟁방침과 임무를 공유한다. 조직과 조직원이 만나는 접점에 선전이 있었다. 선전을 기획하고 원고를 조직하고 정확한 언어로 필경을 하고 등사를 하고 배포를 하고, 그것이 조직원의 손이 아니라, 조직원의 눈이 아니라, 조직원의 머리가 아니라, 조직원의 가슴에 꽂히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37년 7월, 원산행 열차에 몸을 싣고 용산역을 떠날 때도, 차창 밖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렁찬 기적소리와 함께 정진태는 원산으로 떠났다.


1937년 6월, 정진태는 보성전문 교수 최용달을 만났다. 최용달은 경성제대 조교 시절, 김재갑이 주도하던 독서회를 지도했었다. 정진태는 독서회 회원이었다.

“현장에, 활동가가, 가야 하는데…….”

최용달이 말했다. 말을 꺼내기까지 고심한 흔적이 목소리에 묻어있었다.


원산에서 상경한 이주하는 최용달에게 “원산그룹”과 “성대파”의 제휴를 제안했다. 이주하는 원산의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 준비기관” 지도자였다. 경성제대 출신 활동가들을 “성대파”라고 불렀다.

최용달이 이주하를 만난 것은 36년 7월이다. 폐결핵 요양을 위해 원산에 간 최용달은 김월옥의 연락으로 이주하를 만났다. 김월옥은 정태식의 애인이었다. 정태식은 “경성공산주의자그룹 사건”으로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와 함께 구속되었다. 김월옥은 이주하의 동생 이예분과 친분이 있었다.

최용달은 베를린 유학에서 돌아온 이강국과 논의, “원산그룹”과의 제휴를 결정했다.


“현장 어디요?”

정진태가 말했다.

“원산.”

원산……, 조선의 모스크바!

“무슨 일이지요?”

최용달이 『노동자신문』 창간호를 내밀었다. 가리방으로 긁은 등사판이다. 1936년 11월,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 준비기관”에서 발행했다.


과거 조선의 혁명적 노동자계급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광포한 백색테러와 소부르주아 종파주의자의 발호로 인하여 여지없이 파괴되어버렸다. 이러저러한 편향의 발생과 투쟁회피, 비혁명이론의 질식할 것 같은 범람은 미숙한 조선 노동자계급 앞에 다대한 시련과 장애를 가져다주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지도하에 투쟁진영을 건설했다가는 파괴당하고, 일어섰다가는 좌절되었다.


-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 준비기관, ‘노동자신문 창간선언’ 부분


‘창간선언’은 『노동자신문』의 임무를, 정확한 정세와 전망을 제시하고, 올바른 투쟁방침과 그에 따른 임무를 각인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유려한 문장이었다. 유려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선전담당이 신문 여섯 개를 만들고 모스크바로 갔다네. 몇 달째 휴간인데, 아무도 나서지를 않는다는군.”

최용달이 말했다.

쉽게 결단할 수 없었다. 혁명운동을 한다면 현장활동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삐라를 만드는 것보다는, 보이는 곳에서 대중과 만나고 싶었다. 조선인민의 핍진한 삶, 그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여기는 식민지조선 아닌가. 시대의 요구와 자신의 희망이 맞아떨어진다면 그야말로 행운이겠지만, 그런 행운아가 혁명운동사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희망과 요구 사이에서 정진태는 번민의 날들을 보냈다.


1937년 7월, 정진태는 원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정진태는 눈을 감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시대의 요구에 답하는 것! 단지 그것일 뿐이다. 아침 해가 망막 깊숙이 이글거렸다. 원산의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정진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6년 2월 16일, “제1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이주하가, 징역 5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 원산으로 돌아왔다. 4월에는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전태범이, 징역 2년 6개월 형기를 마치고 출옥, 원산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운동일선에 복귀할 것을 결의하고, 일제의 전향공작을 이겨낸 비타협적 활동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1927년 5월, 프로핀테른의 지도하에, 태평양 연안 국가의 좌익노동조합들이 중국 한구에 모여 태평양노동조합 제1차대회를 열었다. 대회는 상설기관으로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를 상해에 설치했다. 1931년 10월, 비서부는 조선노동운동에 대한 지침 ‘조선의 범태평양노동조합비서부 지지자들에 대한 동 비서부의 서신’(“10월서신”)을 발표했다.


10월서신은, 조선노동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얻을 만한 조직적·정치적 지도가 부족하며,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안에서 강력한 대중투쟁을 전개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광범위한 노동대중 속에 들어가 투쟁을 통해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원산지역 활동가들은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탄압이 집중되었다. 저항은 계속되었다. 1931년 제1차, 32년 제2차, 33년 제3차, 34년 제4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으로 많은 활동가들이 체포되었다. 활동가들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과 고문을 이겨내고 원산으로 돌아왔다.


이주하를 지도자로 하는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가”들인 “원산그룹”은 신흥 기간산업 및 중화학 분야의 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집중하였다. 1936년 10월,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 준비기관”인 “무명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이 결사는 이주하, 전태범, 송별립, 김국보, 이영훈, 장서림 등 일제의 전향공작을 이겨낸 비타협적 활동가들과 방용필, 나창빈, 석표원, 유유록, 김여섭 등 원산 철도사무소 관내 선진노동자들의 결집체였다. 1936년 11월,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 준비기관은 기관지 『노동자신문』 창간호를 발행했다. 선전담당은 김진성이었다. 김진성은 『노동자신문』 창간호부터 6호(37년 2월)까지를 내고, 코민테른과의 연락선 개설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선전담당 없이 몇 달이 흘렀다.


1937년 6월, 원산그룹은 경성제대 출신 최용달, 이강국 등 “성대파”와 제휴했다. 이들은 코민테른 제7차대회의 테제들을 검토하고 정세토론을 거듭한 결과 새로운 정치노선을 결의했다.


원산그룹은 과거 대중활동이 노동자층에만 국한되어 있었음을 자기비판하였다. 그들은 “종래의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의 확대·강화 방침에서 한걸음 전진하여 일제타도 구호를 높이 들고 이 공동의 목표 아래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라 농민, 소부르주아 학생 지식인, 종교단체, 기타 민족개량주의 및 반동단체 속에까지 침투할 것”을 결의했다.


원산에 도착한 정진태는 송별립을 만났다. 송별립은 경성제2고보 출신이다.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 항만하역업을 하고 있었다. 원산그룹 선전활동 지원을 맡았다. “자금 6백여 원과 종이(미농백지) 4천여 장을 제공”했다.


정진태는 송별립이 소개한 집에서 하숙하며 철공소에 다녔다. 보름에 한 번 송별립을 만나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예비조직원 수습과정이었다. 37년 8월, 송별립이 정진태에게 『노동자신문』 7호를 주었다.


『노동자신문』 7호는, 신문의 휴간이 “운동에 대한 대중의 신임을 저하”시켰으며 “노동자를 이론적으로 훈련하고 유능한 지도자로 향상시키는데 큰 지장”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배포선의 기밀유지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의 기관지 『노동자신문』을 놈들의 핏발선 수색 탐색 하에서 종전보다 수배의 긴장과 용의주도한 비밀보장에 의해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출판물의 종이 한 장이라도 또 그림자마저도 놈들의 손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자.


- 『노동자신문』 7호 ‘사고’


송별립이 쓴 글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말투가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삐라의 그림자라니! 정진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정진태는 보름 간격으로 『노동자신문』 8호와 9호를 받았다. 신문을 읽은 소감을 송별립과 토론했다. 10월과 11월엔 신문을 받지 못했다. 선전활동 기본 교양자료를 받았다.


신문은 원칙에 철저한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항상적이고 주요한 또 긴박한 과제인, 선전·선동을 위해 필요하다. 개인적 행동과 단편적인 선동을 일반적·체계적 선동으로 강화시키고, 운동의 분열상과 지역성을 단일한 전국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제1보가 전국적 신문을 설립하는 일이다.

신문은 정치적 신문이 되어야 한다. 정치적 신문은 정치적 불만과 항의의 모든 요소를 집중하여 혁명운동을 활성화하는 임무의 수행을 가능하게 한다. 조금이라도 정치의식을 가진 모든 계층 속에서 정치적 폭로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정치적 폭로의 전국적 연단이 신문이다.

신문의 역할은 이념의 유포, 정치교육, 동맹세력의 규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문은 집단적인 선전·선동가일 뿐 아니라 집단적 조직가다. 신문은 조직이, 조직원들로 하여금 정치적 사건들을 주의 깊게 파악하도록 하고, 그 사건들이 미치는 효과와 의미를 평가하도록 하며, 그러한 사건들에 혁명적 당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발전시키는 항구적인 조직이, 신문의 도움으로, 신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게 할 것이다.


- 레닌,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부분


1901년 5월, 레닌이 『이스크라』 4호에 쓴 글이다. 원산행을 고민하면서, 수없이 읽고 또 읽었다. 송별립에게 받은 교양자료에서, 레닌의 글을 다시 읽으며, 정진태는 자신이 혁명의 시작점에 다가가고 있다고 믿었다.


“신문은 안 나오나요?”

정진태가 말했다.

“만들 사람이 없네.”

송별립이 뜸을 들였다. 정진태가 침을 삼켰다. 『노동자신문』 7, 8, 9호는 송별립이 만들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미적댈수록 조직에 누가 될 터였다. 김재갑과 정진태는 열정과 헌신의 활동가였다. 하지만 조직은 결정을 미루기만 했다. 송별립이 나자빠지고 나서야 조직은, 새로운 선전부 구성을 결정했다.

“자네 한 번 해보겠나?”

송별립이 웃고 있었다. 송별립의 눈이 예비조직원 수습과정이 끝났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영광입니다!”

정진태가 짧게 대답했다.


정진태는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 준비기관” 선전부에 배치되었다. 비밀인쇄소에서 정진태는 김재갑을 만났다. 김재갑이 원산에 와있었는지는 그날 알았다. 7월에 헤어지고 다섯 달 만이었다. 헤어질 때도 서로는 행로를 밝히지 않았었다. 정진태는 김재갑과 함께 『노동자신문』 10호(37년 12월)부터 36호(38년 10월)까지를 냈다.


아지트 지하에 인쇄소를 차린 원산그룹 선전부는, 인쇄소에 “등사기, 긁개판, 철필, 종이 그밖에 각종 문헌”을 비치해놓고 선전물을 발행했다. 『노동자신문』 창간호부터 36호까지 매호 30부씩 발행했다. 『노동자신문』은 “원산그룹이 지향하는 운동의 강령·전술·조직상의 방침을 천명”하고 “원산의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한 폭로와 함께 당면 정치정세의 특성과 그에 따른 노동자들의 투쟁의 임무”를 제시했다. 선전부는 대중조직 ‘철우회’의 기관지 『신호기』를 창간호(38년 6월)부터 6호(38년 10월)까지 매호 70부씩 발행했다. 『신호기』는 “반전의식고취와 반제반전투쟁의식을 선전”했다. 이밖에 코민테른 제7차대회 결의, 국제혁명기관의 조선문제에 관한 각종 테제, ‘지원병제도의 실시를 반대하여’ 등 10종의 팸플릿을 간행했다. 원산그룹은 “격문이나 기관지 등도 조직원에 한정하여 회람하는 방식을 취하고 공장이나 직장의 미조직 노동자 대중에 대한 무차별적 살포방식은 엄격히 금지”하였다. 원산그룹의 선전물들은 “조직대중에 대한 정치·사상적 교양재료로 이용되었으며 원산그룹내의 통일성을 높이는데 활용”되었다.


원산그룹은 원산지역 “산업부문을 철도부문, 금속부문, 화학부문의 3부문으로 구분하고 이들 각 산업부문 내에서 먼저 적색노동조합의 최하부 조직인 적노반을 가급적 다수 결성하고, 이어서 그 적노반을 영도할 상층기관인 위원회를 결성하며, 마지막으로 각 부문 내의 위원회를 통합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여 원산지방을 지반으로 하는 적색노동조합을 완성”, “지방적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순차적으로 같은 종류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을 전조선 각지에 파급시키며, 마지막으로 그것을 통합하여 전조선적 통일기관”을 세운다는 조직계획 아래 활동했다.


원산그룹은 38년 4월,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 준비기관”을 해소하고,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위원회’를 결성했다. 6월에는 대중조직 ‘철우회’를 조직했다. 원산그룹은 함남의 영흥, 문천, 덕원, 정평, 홍원, 북청, 흥남, 함북의 청진, 성진, 그리고 경성, 평양 등 각지의 노조·농조운동그룹에 공작원을 파견 연락을 맺고자 시도했다. 코민테른과의 연락선 개설을 위해 4차례 연락원을 파견했다.


원산그룹은 조직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수사망에 걸렸다. 1938년 10월부터 원산에서 110명이 검거되었다. 함남북 일대로 수사가 확대되어 1939년 9월까지 375명이 구속되었다. 일제 재판 기록에 의하면,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위원회’ 기관지 『노동자신문』은 창간호부터 36호까지 발행되었다. 일제 재판부 서기들이 번역한, 조잡한 일역본 『노동자신문』 창간호부터 35호까지가, 재판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노동자신문』 36호는 “그림자마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이 글은 심지연의 『이주하 연구』(백산서당, 2007년), 최용탁의 『남북이 봉인한 이름 이주하』(가갸소랑, 2013년), 안재성의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인문서원, 2015년), 임경석의 「원산지역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1936~38년)」(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년), 안태정의 「1930년대 원산지역의 혁명적 노동운동(1930~1938)」(한국역사연구회 편, 『역사와 현실』 2호, 1989년), 최규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년), 레닌의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레닌저작선』, 거름, 1988년)를 참조해서 썼다. 이 글을 쓴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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