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주석달기(2)_ 유재숙

작성자
pongdang119
작성일
2019-04-18 10:22
조회
73
[ 정리 16~29 중 ]

정리 15 >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

정리17 > 신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하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는다.

정리 18 >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
정리 19 > 신(은 영원하다), 즉 신의 모든 속성들은 영원하다.

< 제목 :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

우리는 누구의 키가 큰지 작은지, 누구의 피부색의 검고 하얀지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마음이 따뜻하고 차가운지, 어떤 이는 오래 만나며 마음을 주고받아야만 알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일을 확고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지만 모든 일들이 항상 우호적이지도 않다.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무절제한 욕망과 희망과 공포 사이에서 비참하게 동요하기 쉬운 나약한 존재다.

반면 어린나이에 일찍 성공하는 것과 같이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번영을 맞이하는 시기에 있을 수 있고, 불운한 시기라면 넘치는 지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도 잘 풀리지 않는다. 이런 한계성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공포에 빠진다. 행복을 불행의 전조라 느끼기도 하고, 실망을 불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불확실성 앞에서 확실성을 찾게 되고 오직 ‘신’만이 여러 가지 속성으로 실체의 본질을 파악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인간과 인간의 행복 또는 영원성으로 이어주는 매개자가 아니다. 에티카 정리17에서와 같이

“신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하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는다”

신의 역량을 마치 자신을 위한 군주라는 상상은 위 정리17에서 말하는 신의 속성과 거리가 멀다. ‘너는 할지니’와 같은 신의 음성을 통해 인간의 활동 또는 결정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오직 신은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하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안에서 강하게 열망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상황과의 연결을 신에게 요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정리 18,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

(정리 19, 즉 신의 모든 속성들은 영원하다.... 까지 연결은 어렵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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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1부 처음 ~ 정리 15 중 ]


정리 11 > 실체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정리 12 > 어떤 실체의 속성에 근거하여 그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한, 그 실체의 어떠한 속성도 참되게 파악될 수 없다.

정리 13 >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정리 14 >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 없다.


< 제목 : 에티카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

<에티카> 정리11에는 “실체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체란, 눈에 보이는 것 또는 보이지 않는 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어떤 부연설명 또는 재 개념 화 등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즉, 존재 그 자체로 자신의 모든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부가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둘로 나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예를 들면 신과 인간을 둘로 나누었고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고, 또 다시 인간과 동물로 구분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도 선과 악으로 이원화 하였고, 고통과 평화를 분리하고, 진리와 비 진리를 나누었다. 이런 구분 속에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 하나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눈에 보이는 속성을 가진 통나무를 예로 들어보자면, 통나무는 물에 강하고 불에는 약하다. 잘라질 수 있으며 다듬어 질 수 있다. 이런 자신의 속성을 근거로 변형이 가능하다. 무기도 될 수 있고, 땔감도 될 수 있다. 장식장이 될 수도 있고, 그릇 또는 장신구도 될 수 있다. 자유자재로 변형 가능하다. 하지만 나무의 본래 속성을 위해 장식장, 그릇, 장신구 등의 변형된 상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성을 생각해 보자면, 지성의 정의는 ‘어떠한 것을 지각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이다’ 다시 말해, 지혜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지혜는 판단력, 통찰력, 처세술, 은폐와 기만 등으로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다른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확장된 개념은 더 새롭고 완전한 무언가로 또 다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확장된 개념들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지성으로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도 이런 것이 아닐까 ? 스스로가 자유롭게 선택하여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안정을 생각해야하고 그 속에서 상황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요동치는 나의 정서도 생각해야 한다.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를 보자면 그 어느 때 보다 자유로운 국가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적 안정과, 보호, 안전과 평등이라는 이름아래 국가가 시행하는 정책들이 자신의 삶속에 침투하여 한계 짓는 것도 많다. 동시에 우리 또한 국가를 상대로 평등과 자유, 안정과 보호를 요구하는 것도 많다.
이렇게 정신과 물체의 개념들이 형성되고 확장하며 최 상위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나누고 세분화 하는 작업에만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에티카 정리 12에서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어떤 실체의 속성에 근거하여 그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한, 그 실체의 어떠한 속성도 참되게 파악될 수 없다”

이 분할된 것들을 정리하고 통일하기 위해 여기서 어떤 속성을 고유한 본질이라고 한다면, 이 본질을 찾기 위해 경험과 우연적 사건들을 모두 합하고 이 다양한 조합들 속에서 뜻을 하나로 모으면 되는 것일까?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잡겠다고 노력한들 혼란한 머리는 눈앞의 세상이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려고만 한다. 여기에 절대적 속성을 더해,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을 행복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고 그것에 만족하려한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 속에서는 끊임없이 또 다른 나를 꿈꾸게 되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현재의 나를 부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할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통일화 하는 것은 또 다른 확장으로의 범위 일 뿐 속성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주변에는 반드시 가난과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자신만의 모종의 희열을 생명력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나의 삶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생명력 넘치는 삶속에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욕망으로 변덕의 죽을 끓이고, 실망과 기대에 어긋나있는 현실 속에서 희망으로 자기 부정을 눈 덩이처럼 뭉치는 삶 말이다. 여기서 인간은 마음을 돌려 지성을 사용하여야 한다.

에티카 정리 13 >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이 분할 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믿는 다는 것은 ‘어떠한 인간의 욕망과 환경의 조합에 의해 세상위에 군림하는 신’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모든 순간의 행동에 ‘원인으로서의 신’의 작용이다. 그리고 이 삶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이 무한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나를 주관하는 어떤 힘을 인정하게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창조주로서 신을 인정하는 것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