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와 후기]6/22 『한국의 민중봉기』8.9장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06-19 15:02
조회
133
6월 22일에는 『한국의 민중봉기』8,9장을 공부합니다.
- 세미나 시작 전에 토론거리를 게시판에 올려 주세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적극 권장합니다!)
- 토론거리는 게시판 위 고정란의 <역사 비판 세미나 토론 방식에 대해>라는 글을 참고해 정리하시면 좋습니다.
토요일 저녁 7시 30분 다중지성의 정원 3층 세미나실에서 뵙겠습니다.


6/8 세미나 기록,
『한국의 민중봉기』5,6,7장

<근황토크>

김정: 맑스 코뮤날레를 했고, 열심히 다음 책을 만들고 있다. 제목은 『열정과 망상』. 학계의 여러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학계에서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책이다.

김형: 열심히 책을 읽고 있고 세미나 준비도 하고 있다. 함석헌 기념관에서 개최하는 에세이 공모전도 준비하고 또 일도 하고 있다.

김예: 맑스 코뮤날레에 처음 가봤다. 공부하시는 분들 사이에 의견갈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소리들이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들이 재밌었다. 갈 길이 멀다고…. 그분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서로서로 빨리 운동하자고 하는 얘기들. 빨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종: 3.1 운동 관련한 책이 많이 나와서 그걸 읽고 있다.

김형: 추천할 만한 책은?

이종: 『3.1 운동의 밤』 자율주의 관련 개념과 공명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3.1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사유와는 다른 관점의 책이다. 대표되지 않은 대표들에 관한 이해.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3.1 운동을 이해하는 게 재밌다. 또 다른 책으로는 『1919』. 3.1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사유와 크게 다르지 않게 민족 지도자들 33인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전개. 『3.1 운동의 밤』과 『1919』는 대척점에 있는 것 같다. 각기 다른 관점으로 3.1 운동을 볼 수 있는 두 책이다.

박상: 맛시모 데 안젤리스의 『역사의 시작』 강연회에 참석했는데 재밌었다. 우리의 모든 부분에 대안 가치가 있다. 대안 가치 발명을 노력하자. 어렵고 모호하긴 하지만,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넘어서려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힘들긴 하다. (웃음)

아멜: 맑스 코뮤날레에서 <공통장 감수성의 징후들과 예술인간-예술체제의 동선>이라는 까다로운 제목으로 발표했다. 주로 윤지오 사건을 다루었다. 발표 전후해서 한 달 반 동안 윤지오 논란을 통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작업을 계속하는 중이다.

손보: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재밌었다. 강력추천한다.

신은: 맑콤 특판을 했다. 맑스 코뮤날레가 9회째다. 18년 동안 맑콤을 했는데, 그동안 어떻게 됐는가? 이번의 특징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다지원에서 섹션을 했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돼서 재밌었다. 학회평론이라고 이전에 다지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 중에 한 친구가 와서 발표하는 것을 보았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우리의 모습도 되돌아보게 됐다. 출판사 중에는 이번에 유일하게 갈무리만 3일 내내 참여했다. 이게 말하는 게 뭘까? 규모가 줄고 참여자가 줄고 맑스 코뮤날레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지만 어쨌든 계속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각축을 벌이는 내용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분명 흥미로움은 더 깊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멜: 맑콤에 여성단체들이 참가한 건 얼마 안 됐다. 그전에도 개별발제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많은 단체가 참가한 건 최근 일이다. 코뮤날레가 맑스를 공부하는 여러 조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거라 원래부터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번엔 오히려 그렇게 심한 경우가 아니었다. 코뮤날레 초창기에는 서로 삿대질을 할 정도로 논쟁이 격렬한 적도 있었다.

<본격토론>

토론1--------------------------------------------->

[질문] 5장에서 학생들은 박정희 사후 한국 노총 건물을 점거하고 있던 동일방직 노조 활동가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전두환의 12.12쿠데타의 실상을 설명하고, 노동자들에게 시위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카치아피카스의 서술에 의하면 "시위 참여가 한국 노총 개혁 투쟁을 침해할 것으로 생각한 노동자들은 학생들에게 건물에서 나가 달라고 요구했다."(263) 이 부분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큰 괴리가 느껴졌다. 어떤 조건에서 기인한 것일까? 광주항쟁 이전 전두환 쿠데타에 대한 일반 노동자들의 인식은 어땠을까?

박상: 광주 이전 신군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에 궁금증이 생겼다.

김형: 노동자 투쟁에 참여하는 조직이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가 호도될 수 있다는, (따라서) 학생들이 신군부에 반대하는 것과는 선을 긋고 싶어 하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노동운동이 정당과 연결되면서 솔직한 민중의 요구를 흐려버리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것 같다.

박상: 박정희의 정책을 민중은 반겼을 수 있다.

김형: 박근혜 탄핵 때 이대에서도 외부에서 도와주려는 걸 거부하는 흐름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촛불 때도 (주요) 의제 외적인 걸 이야기하면 지금은 그런 걸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여기에도 정치적 전략에 의해 (운동이) 호도되는 걸 경계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 같다.

아멜: 책에는 한국 노총이라고 되어 있다. 한국 노총이라고 하면 원래 기원은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이 있다.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는 새로 만드는 노조를 민주적 노조로 만들려 하고 한국 노총이라는 노조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곳은 기존의 노총을 민주화하려는 등 모든 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힘이 있는데, 이때는 그런 건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여성들이 있는 경공업 노조와 주로 남자들이 있는 중화학 계통 기업체의 노조의 성격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노조가 좀 더 레디컬했다고 생각한다. (...) 80년대 중반, 노학연대가 하나의 슬로건으로 구체화 되어서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건설이 성공하거나 (...) 전노련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 싸움이 즉각적으로 학생들이나 시민사회단체에 의해 보호되는 등의 운동이 활발했다. 80년대 중 후반 90년대 초, 전노협이 해체되고 95년에 민주노총이 결성되면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노학연대가 깨져 나갔다. 책에 나온 대로 노동자들도 이제 학생들의 의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또 학생들의 생각이 너무 관념적이기도 했다. 공식민주노조로 운동의 방향이 결정되어 갔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학생들이 노동자들 집회에 가도 참여할 여지가 많이 없어졌다. 집회에 가면 모두 노동자 제복을 입고, 앉을 때도 각 노조별로 대오를 지어서 앉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기에 끼는 것 자체가 어색한 형태가 되었다. 학생들이 배제당하고 꼭 필요할 때만 자위대나 선봉대 등으로 활용되니까 그들도 화가 나서, 더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학생운동이 학내 운동으로 돌아갔다. 90년대 중반부터 학생운동은 등록금 운동, 커리큘램 투쟁 등으로 방향전환 했다. 노동자와 학생의 거리가 벌어졌다. 책에 나오는 건 그 이전이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광주항쟁에 대한 이론적 성찰 속에 두 가지 가닥이 있었다. 첫째는 학림. 노동자들은 잠재적으로 혁명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데 선도력이 없으므로 학생운동이 선도적으로 쳐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학생운동 선도 투쟁 주도. 둘째는 무霧림. 광주항쟁의 실패 요인은 공장노동자의 참여가 미진하고 룸팬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투쟁이 주도되었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지녔다. 학생들이 공장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취한다. 공장노동자들을 본격적으로 조직하는 게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안개처럼 밑바닥으로 가라앉아서 퍼져나가야 한다는 생각. 이는 주로 공장으로 들어가는 걸 택했던 사람들이 쁘띠브루주아적 존재로부터 자신을 프롤레탈아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에 반해 학림은 학생 신분을 유지한 채로 하는 운동이었다.

김형: 전태일 사망 이후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성찰하려는 움직임이 학내에서 대대적으로 있었다. 이때 야학도 생겨났다. 광주항쟁이 노동자의 참여가 미진했다는 진단. 그런데 피카스에 따르면 광주항쟁에서는 오히려 노동자가 더 많았던 것으로 나오는데…….

아멜: 광주의 들불야학(1978~1981)이 있다. 야학은 그보다(광주항쟁 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다. 야학 운동의 선두는 기독교 개통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야학은 계몽주의 운동이라서 학생들한테 진보적 사상을 가르치기보다는 교양을 가리키는 운동에 치중되어 있었다. 80년대의 야학도 당연히 교양을 가르치지만 편집된 진보적 사상을 담은 유입물도 함께 읽게 함으로써 정치 의식화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전 야학과 달라진 점이다. 광주항쟁의 참여 주체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프롤레타리아가 주축이었다고 생각한다. 촉발은 전남대지만, 그래도 공장노동자들이 선두에 서거나 했다. 광주항쟁 당시에 들불야학 지도자이기도 했던 윤상원은 학생운동 출신으로 후에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가, 준비하고 있었던 전노련의 광주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은행원을 그만두고 광주에 내려가서 (들불야학을 하는 동안) 준비 중이던 상태였다. 그래서 윤상원은 노동운동으로 넘어가던 학생운동 출신으로 볼 수 있다. 시민군 참모총장이라 부를 수 있는 시민군의 군사적 지위를 가진 (...) 시민군 지휘를 했다. (그는) 공장노동자는 아니고 산업 프롤레타리아도 아니고 룸펜 프롤레타리아 성격을 강하게 가진 사람이다.
[김군]이라는 영화를 이번에 봤는데, 지만원이 이야기하는 '광수 1호'가 누구인가를 파고드는 영화다. 광주의 수상한 사람 1번, 장갑차 위에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는 3,40대 (남자를) '광수 1호'로 지목해서 북한에서 내려온 누구라고 선전했다. (그 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북한에서 온 사람으로……. 영화 [김군]은 이를 하나하나 분석해 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분석해낸 건, 이 사람은 광주의 전형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었다. 그런 것만 보더라도 전라도라는 곳이 공장이 크게 발전한 곳도 아니고, 주로 농촌 지역 그리고 자영업자들이 있었다. 노동자의 성격을 가진 가장 큰 집단은 택시, 버스 노동자들이었다. 공장노동자로 기록된 사람들은 아시아 자동차 노동자들이 있다. 아시아 자동차는 전시에는 무기생산공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 노동자들이 광주항쟁에 직접 참여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운동에 동조하면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시위대에 대거 넘겨주었다. 광주시의 시민들이 시를 장악한 후에 도시와 공장이 오히려 정상화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근해야 했고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좀 더 움직일 수 있었다.

손보: 벤야민의 책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 제정기의 파리』에 맑스를 인용한 부분이 있다. 맑스가 일시적 음모가와 직업적 음모가를 구분하는데, 당시 광주항쟁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이에 따라 구분해 볼 수 있을까?

아멜: 음모라는 게 우리 말에는 주로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다. 어떤 초월적 계획을 지배적인 것으로 보려는 관념적 해석이 음모론에 많기는 하다. 이루미나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금융자본이라는 특정분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역사 전체를 설명해 버리려 하면 역사 전체가 깔끔하게 설명된다. 하지만 현실의 복잡다단한 투쟁이 없어져서 역사가 생기가 없어져 버린다. 맑스가 이야기한 역동적 계급투쟁이 무의미한 것으로 떨어져 나가 버린다. 음모라는 말을 결정론적 무게를 두지 않고 받아들여 보면 이는 중요한 설명력을 가진다. 모든 생명은 제각기 음모를 품고 있다. 각자 자기의 미래를 가지고 있고 플랜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현재로 가지는 고유한 플랜, 자기의 전략과 스케줄이 있다. 그런면에서 모든 생명은 음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 많은 존재의 음모, 그 복수적 소용돌이 속에서 우연들을 가지고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직업적 음모와 일시적 음모. 이는 (맑스에게서) 혁명의 논리학으로 확장되어 가는데…. 전위라는 건 직업적 혁명가 집단으로 (그 외에는) 일시적 혁명가 집단으로 논리 정식화가 이뤄진다. 들불야학 집단, 열흘 내내 있었던 시민군 조직 같은 경우, 즉 중앙사령탑, 중앙 편집부 조직실(기관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직업적으로 열흘 동안을 움직인 직업적 혁명가 집단으로 볼 수 있고, 아시아 노동자들의 경우는 부분적 참여, 즉 일시적 혁명가 집단으로 일정하게 대입시켜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이후의 모든 운동을 설명하는 논리로까지 가져가는 건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촛불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토론2--------------------------------------------->

박상: 두 번째 질문이다. 카치아피카스는 광주항쟁의 직접민주주의가 파리코뮌을 훨씬 능가하는 운동으로 보았다. (308) 그 차이에 대해 논의해 보자

아멜: (과거 유럽의) 코뮌은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결합한 형태였다. 광주는 대의민주주의가 굉장히 약하고 직접민주주의가 매우 큰 상황이었다. 코뮌은 노동자들이나 농민이나 여러 부분에 직업집단의 대표들이 형성되고, 이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결정을 하는 정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코뮌은 대의 민주주의가 굉장히 강한 것이다. 물론 그 아래에는 그 대표들을 선발 선출하는 대중들의 자기 조직화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민주주의가 있었다고 해야 한다. 즉 양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광주는 들불야학도 누가 주도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나서서 만든 것. 시민군도, 박남선이 시민군 지휘를 맡긴 했지만, 당시 그가 총을 지참했던 사람들을 통제할 순 없었다. 통제가 안 먹혔다. 지휘권을 가진 자들에 대한 일정한 인준은 있었지만, 대표성은 없었다. 그에 따른 장단점도 나타난다. 박남선이 총을 수습하는데 4, 50프로정도 밖에 수습이 안 됐다. 이는 시민들과 대표를 자임하는 사람들 사이에 괴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총을 든다는 것은 내가 나를 무장한다는 것이지 내 무장을 누가 대신 해제하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 좋게 말하면 자기 조직화가 잘 되어 있는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통솔 불가능한 상태였다. (코뮌과 광주 사이의) 그런 차이를 분명하게 말해 볼 수 있겠다.

박상: '광주코뮌'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광주의 직접민주주의를 가려버리게 될 수 있을까?

아멜: 어떤 코뮌이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19세기 후반 정치 조직화가 재탄생 돼서 나타난 코뮌은 지구 전체적 시각으로 봐서는 모방해야 할 성격은 아니다. 프랑스의 특수성이 당연히 반영되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걸 기준으로 광주를 평가하는 건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광주는 코뮌과 같은 형태의 조직된 정치 공통장. 시민들 사이의 굉장히 강한 공통성이 형성되었던 사례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코뮌보다 더 코뮌적이다. 더 코뮌적인 특성, 절대 공통체적 성격이 있었다. 광주와 파리는 다른 것이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김형: 그런 점에서 광주는 재헌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것 자체가 광주의 항쟁공동체에는 국가 폭력에 대한 자기방어적 성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참된 국가에 대한 이념(이 무엇일까?). 국가권력에 또 다른 국가권력, 또 다른 국가체제의 드러남이라고 하면 오히려 광주공동체를 협소 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 같고. 광주공통체의 특성을 외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멜: 제헌 권력이 무엇이냐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 보통 제헌 권력이라고 하면 네이션 스테이트차원에서 제헌 권력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광주를 이해할 때, 광주가 어떤 유형의 제헌을 하려 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제헌 권력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물론 광주는 중앙집권적인 일국 형태를 추구하는 제헌적 권력과는 다르다. (하지만) 나중에 도청으로 집결을 한 것은 일국적 관점에서 또 해석할 수 있다. 도청이라는 것이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이다. 거기를 장악하고 점거하고 끝까지 사수하려 했다는 것은 국가 권력적 표상을 가지고 움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지지가 아주 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남도청은 고립됐으니까 말이다. 모든 광주시민이 그곳을 정말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마지막 밤에 거기가 그렇게 썰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청 점거라는 전술이 광주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모두 각각의 꿈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도청 점거는 그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5월 광주를 (단순히) 재헌권력이다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김형: 5.18이 국가적 측면이 분명 있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아멜: 18일~22일까지는 국가형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절대 공동체, 자발적 투쟁들의 연합체가 지배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 과정이 계엄군에 의한 무차별적 학살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고 이는 시민들이 방어적인 무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거기에 또 바로 이어지는 생각이 이렇게 죽느니 계엄군과 잘 타협해서 얻을 건 얻고 무장을 해제하자는 생각이 출현했다. 수습위원회가 그런 생각을 통해 상당 정도의 무기를 수거해서 계엄군에게 반납하려 한 것이다. 이는 수습이라는 형태로 국가가 출현하는 형태다. 개혁적 정부의 출현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박남선이다. 그가 수습위원회에 찾아가면서 수습파와 항쟁파의 분리 과정이 이어졌다. 이때는 절대 공동체라 불렸던 자발적 연합적 공동체 내에서 우리가 국가형태라 부를 수 있는 그 형태의 향방을 둘러싼 경합이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습파는 기존의 국가권력을 자신의 모델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반해 항쟁파가 어떤 형태의 꿈을 꿨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항쟁파는 끊임없이 궐기대회를 통해서 이론, 이데올로기, 혹은 노선을 찾아내려 했다. 시민들로부터 명령을 받으려 했다. 이런 노력이 여섯 번인가 연속적으로 계속 이루어졌다. 궐기대회는 국가? 혹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아래로부터 정부 형태를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형태는 아니라는 강한 의식이 함께 있었다. 궐기대회에 사람들이 나올 것을 독려하고, 좋은 발언을 하도록 하고……. 공동체라면 공동체. 어쨌든 뭔가 우리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어떤 정부 형태를 찾아내려는 움직임이었다. 마지막 날의 썰렁한 도청이 말해주는 건 무엇일까? 이 무수한 움직임이 있었던 후에 사람들이 (계엄군) 소식을 듣고 분할되었을 때, 더는 궐기대회가 불가능해졌을 때 최후로 남은 사람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무엇이었을까? (어쨌든) 뭐라고 이름 붙이기 힘든, X라고 할 수 있는 정부 형태를 모색하는 과정이 항쟁파에 있었고, 이를 제헌 권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토론3--------------------------------------------->

손보: 피카스가 이야기하는 "과감한 직관의 초기형태"(225~226)는 무엇일까? 또 '급진적'(243)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박정희에 대항하는 운동은 어떤 급진성을 띄었기에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걸까? '과감한 직관의 초기형태'와 '급직적'이라는 두 말이 피카스에게서 대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주제로 논의해 보자.

김형: "과감한 직관의 초기형태"가 아닌 것으로 이어 피카스는 빡빡한 수사학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자본주의, 독재 모두에 반대하는, 일반 대중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을 '과감한 직관의 초기형태'라고 말하고 있다.

박상: 민중의 지혜, 혹은 직관 같은 말이 6장에도 나온다.

김형: 조금 불만인 건. 피카스는 순수한 직관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자유에 관한 서술은 부족한 것 같다. 순수한 자유의 직관 같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구호를 반대로 신좌파의 경향과 바로 연결할 수 있는 걸일까? 순수한 자유의 직관?

아멜: 피카스는 그리스 태생이다. 아우또노미아 중에서도 운동의 여러 조류 중에 무정부주의적 경향에 좀 더 가깝다. 아우또노미아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이탈리아 운동에 대해서 7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데 피카스처럼 아나키즘에 좀 더 가까운 사람도 있고 마오주의에 가까운 사람도 있고 레닌주의적 성격의 사람도 있다. 네그리는 그들의 중간쯤이다. 하나의 운동권처럼 아우또노미아권이 생겼다. 피카스는 대충 그 정도로 위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과감한 직관의 초기형태". 조직된 국가형태들은 제대로 된 자유를 실현하지 못하는 형태였다는 생각. 그런 의미로 4.19 당시에 있었던 구호를 적극적으로 해석해가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신좌파적 성격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피카스 방식의 해석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달랐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즉각적으로 (구호로) 내세우기 힘들어서, 모호한 구호를 사용했을 수 있다. 피카스의 해석은 이 구호의 잠재적인 걸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방식이지 이를 현실 운동과 직결시켜서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급진적"이라는 말은, (당시의 구호는) 독재 타도로 충분한 것인데 (빡빡한 수사학으로) 뭔가 모든 것을 다 끌어넣으면서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 이는 굉장히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대중들과의 괴리가 있지 않았냐는 해석이다.

김형: 새로운 사회의 선구자들이었다는 적극적 독해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멜: 한국사회에서 68혁명이 어떻게 소화되고 전개되어왔는가에 대한 해석. 김문구(?)는 프랑스에 있으면서 68혁명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데 혁명을 아주 반공적 관점에서 해석해낸다. 김수영 같은 사람의 4.19 독해는 시적으로 표현된 나름 신좌파적인 맥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4.19 전체가 그랬다고 해석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승만 정부에 대한 항거 속에서 그 시대의 세계사적 흐름을 (...) 읽어내려는 노력은 중요했다.

토론4--------------------------------------------->

손보: 북한은 공산주의를 택하며 소련의 지지를 받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택하며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234쪽에 나오는 서술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려는 미국은 남북한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련의 입장은 어떠했기에 북한은(김일성은) 통일을 준비하는 구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혹은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미국과 남한의 관계와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아멜: 1960년. 소련으로 치면 흐루쇼프 시절. 흐루쇼프는 평화공존론을 주장했다.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과 비슷한 걸 소련이 먼저 한 것이다. 북한과 소련의 관계를 보면,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소련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달라졌다. 스탈린 치하에서 한국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박헌영과 김일성이 소련에 방문해서 원조를 요청했다. 스탈린이 처음엔 허용하지 않다가 두 가지의 계기가 마련돼서 수락한다. 핵무기가 소련에서 개발된 개 하나의 조건, 또 하나는 중국혁명의 성공이다. 두 계기가 갖추어지면서 일단 (...) 소련의 처지에서 보면 예컨대 한반도에 전쟁이 나더라도 북한이 방벽이 되니까 든든한 미국에 대한 방어벽이 생긴 샘이다. 한국전쟁 내내 실제로 싸운 건 중국과 북한 인민군이었지 소련은 아니었다. 물론 물자지원은 해 주었지만, 중국이 지원한 거에 비하면 거의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북한으로서는 흐루쇼프 쪽에서 부채 청산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소련을 오히려 완전히 불신하는 상태였다. 그 후에는 중국 의존으로 외교 관계가 발전했다. 중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필사적으로 북한을 원조해야 할 동기가 있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전쟁 후에 밀접해 졌고 이에 반해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나빠졌다. 전쟁 후부터 북한은 주체 노선을 취한다. 중국과 소련에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무렵 북한의 주체사상이 완비된다. 소련이 북한에 이래라저래라하는 아무런 권한을 가지지 않은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때 남한과 미국의 관계는 미국 군정이 3년 동안 남한을 지배하다가 대리통치로 이승만을 두고 군대가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이 다시 한반도 남쪽으로 진주하고, 그 뒤로 지속해서 미국이 남아있는 것이다. 미군이 남한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가, 전쟁이 미국의 전시지배를 공고히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과 미소의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 미국이 점점 더 큰 지배력을 가지게 된 것과 한국이 상당히 많은 차관을 받은 것은 연관이 있다.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연방제 구상이 아직 80년대에 정부 정책으로 확고히 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피카스가 책에서 '개인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연방제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민족해방전쟁에서 일차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민족해방을 수행한 방식은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방식으로 진행됐다. 북한은 유격대를 통해 남한 내에 소요를 일으키면 박정히 독재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타오르리란 예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예측이 빗나갔다. 삼척으로 보낸 유격대를 오히려 삼척 주민들이 신고했다. 당시 남한 민중의 심성을 북한이 오판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연달아 지속됐다. 그 이후에도 서울 청화대 쪽으로 김신주(?)가... 10여년을 계속 유격대, 간첩을 파견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대중들은 오히려 냉담한 상태를 유지했다. 박정히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사람도 거기에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래서 80년대에는 (북한의 통일 정책이) 연방제로 바뀐다. 북한 정권은 통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정부다. 통일을 하지 않으면 실각되는 것이다. 민족통일을 포기하는 순간 김씨정부는 붕괴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당한 기간이 흘렀고, 48년부터라고 잡으면 70년 기간 동안 세계정세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 김정은 같은 경우는 통일이라고 하는 초기 이념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금은 경제발전을 통한 민생안정이라는 것을 민족통일보다 더 중요한 과제로 내 걸 수 있고, 그렇게 하더라도 아래로부터 큰 도전을 받지 않는 상황으로 이제는 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상: 80년대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그리고 전범 기업에 대한 폭탄테러를 다룬 다큐를 보았다. 많이 비판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문부식씨도 미국문화원에 방화를 했는데 원하지 않게 대학생 희생자가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이 궁금하다. 당시 그 행위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아멜: (문부식은) 지금은 (격월간지) <말과활>을 하고 있다. <말과활>을 하기 전에는 고립된 상황을 겪었었고, 그렇게 된 게 조선일보에 기고를 해서……완전히 운동권과 멀어지는 상황이 됐다. 고립된 동안에는 카페운영도 하고, 조선일보 기고 사건 전에는 3인 당대 비평을 했는데 그것이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는 NL이 없었다. NL이 85년부터 생기니까 (...) 문부식의 NL은 북한과 상관없는 자생적인 민족주의 감성을 표현했다. 그 방법으로써의 방화라는 것에서는 유사성이 있지만 (...) 66년부터 일본에 전공투가 벌어져서 그게 67,68년에 절정을 이루는데 그때를 기록한 다큐가 아닐까. 동경대를 중심으로 해서 결집했던 전국의 아주 레디컬한 학생들의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반관료주의 투쟁을 지칭하기 때문에 내용 면에서는 문부식씨와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은: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82년인데, 그때 엄청난 사건으로 보도가 됐다. 미국을 그렇게 직접 공격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문부식씨가 직격탄을 던진 거고, 그 사건이 미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을 열었다는 평가가 있다.

박상: 당시에 시민사회의 지지도 있었나?

신은: 당시에 시민사회의 지지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센 거 아니냐는 평가들이 있었다. 운동권에서는 할 말을 해 준 것이니까 라고들 했지만 시민사회에서는 오히려 두려워했다.

토론5--------------------------------------------->

김형: 책 220쪽에 민중 연합적 사회 세력이 나온다. 저자가 민중을 두고 설명한 "계급 연합적 사회 세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자가 가지고 있는 민중에 대한 관점이 뭘까? 민중은 정의대상이 맞기는 할까?

아멜: 이는 어느 시기의 이야기인가?

경찰: 어느 특정 시기라기보단 저자가 장의 도입부에 하는 이야기다.

아멜: 민중은 번역이 안 되는 단어다. people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다. people은 영어에서는 국민개념과 비슷하게 사용된다. 한국의 민중개념에는 크게 두 가지 가닥이 있다.
1)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시민사회에서 발전시켜온 민중개념이 있다. 그 기원은 동학농민혁명기에 나왔던, 천도교 이전부터 있었던 동학의 혁명 주체세력에서부터 발전시켜 온 것이다. 거기에다가 최이환(?)이라거나 연극하는 사람들이 어떤 채색을 입혔다. 동학 이전에 있었던 판소리, 탈춤등의 전통 연희, 즉 조선 시대에 아래로부터 있었던 지금으로 치면 민중문화, 비양반 상민문화에서 나온 문화적 전통과 동학의 주체개념을 연결해서 거기서 민중개념을 끌어내 사용했다. 이런 민중개념은 전통적 공동체와 깊게 연결된 민중개념이다.
2) 80년 광주항쟁을 민중항쟁이라 부른 건 그 이후의 명명이다. 많은 토론을 거치며 이를 민주화 운동이라 부를 거냐 시민항쟁이라 부를 거냐 등 여러 논쟁 이후 민주당과 학생 운동진영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주장하고, 비주류에서는 '민중운동'을 주장하고. 개념투쟁을 벌여온 역사가 있었다. 이때의 민중은 지난 민중개념과는 뉘앙스가 많이 달라진 것이다. 88년 산업발전이 첨단산업으로 발전하고 중화학 공업이 성공하고, 인천 울산 등에 거대한 공장이 생겨나고, 산업프롤레타리아트가 다수화된 상황에서 광주를 돌아보게 됐다. 이때부터 '민중'이라는 개념에 탈춤 추는 어떤 집단이 아니라 계급적 해석이 가해진다. 85년 구로동맹파업이라든지 대우 어패럴투쟁, 87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 91년까지의 장기 혁명 투쟁등. 민중을 산업노동자로 하고, 비산업 노동자 쁘티브루주아 연합체로….
이렇게 두 해석이 경합한다. 촛불은 오히려 그 대립이 해소되어 가는 과정이다. 큰 흐름으로 보면 NL 계열은 전통적 해석을 선호한다. 비주사NL은 전통적 민중개념을 선호하고 맑스주의자는 계급적 민중개념 선호한다. 책에서는 피카스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포괄적 민중개념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뺀 계급 연합성을 고유하게 가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맑스주의자의 계급은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강한 것이다. 하지만 피카스가 말하는 민중은 큰 취지에서는 전통적 개념과 맑스주의적 개념을 짬뽕시키는 민중개념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촛불이 이런 의미에서 계급 연합적 성격이 강한 편이다. 우리가 다중이라고 부를 때도 그 내막으로 들어가면 계급 연합적 성격이 나타난다. 페미니즘이 직면한 문제도 이와 같다. 페미니즘의 주류세력은 상층이다. 따라서 하층 페미니즘을 안 좋아하는 상황. 따라서 많은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이 처해 있는 건 소외되고 있다는 긴장감이 있다. 지금은 세대별로도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 다른 것 같다.

김형: 저자는 한국전쟁을 통해 민중이 등장하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학에서 분명 그 맹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계급 연합적 세력이라 말한 점에서 민중에 계급이란 말을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각자가 이미 계급적 인식이 있는 사람들이 뭉쳤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말이다. 계급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다기보다는 보다 고유한 형태 (...) 민중이 빈자의 차원도 있고, 민중을 계급으로 환원시키는 건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토론6--------------------------------------------->

김형: 231쪽에서 서술된 것처럼, 한국의 대규모 민중봉기는 "중앙의 통제 없이도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성향을 지닌다. 이런 문구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끝으로 246쪽. 한국 교회의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는 민중신학에 대해 저자는 서술한다. "민중신학은 한국 운동에서 중요한 세력이 됐다." 그러나 당시 활발히 피어났던 이와 같은 민중신학의 운동이 조금씩 지지부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민중신학 세력이 당시 활발하게 중요한 세력이 됐음에도 운동 주체세력에서 많이 줄어들게 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 계기나 까닭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박상: 거대담론의 해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아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김진호 목사, 민중신학 공부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3세계 그리스도 연구회가 맑스코뮤날레 참여단체이기도 했다. 민중신학이 70년대에 비하면 현저히 영향력을 상실했다. 기독교는 제일 먼저 라틴아메리카 쪽에서 왔다. 제3세계 해방운동이 펼쳐지던 시기에 한국에서도 쉽게 수입되고 접목됐다. 좀 전에 민중개념 이야기를 했지만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계급연합적이라기 보다는 신의 현 형태로서 민중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등으로 많이 표현된다. 네그리도 카돌릭출신이어서 그런 표현을 많이 쓴다. 민중신학적 요소다. 어쨌든 이런 게 한국의 경제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이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민중으로 지칭할 만한 가난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지금의 가난은 지난날 (민중신학에서) 민중으로 지칭 한 그런 모습이 아니다. 비정규직 등 매우 비참한 상황이다. 본래 가난은 가난해도 협력하는 의미가 있었다. 지지리 못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가난하지만, 부유한 사람들과는 다른 풍요로움이 있었다. 나누고 단결하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비참함에 가깝다. 서울도 산동네 다 없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해체되고, 지금의 우리가 말하는 빈민은 갈가리 찢긴 빈민. 비참한 존재들로써 낟알처럼 흩어진 존재다. 과거의 가난한 자와는 다른 존재가 됐다. 그래서 이전처럼 개개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통일성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을 엮어나갈 수 있는 방법론은 이제는 신학적 방식으로는 잘 안된다는 것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자기 조직화는 전제된 commonality가 없으므로 새롭게 생성된 조건 속에서 새로운 commonality를 창출해가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빈민의 성격전환이 주목돼야 한다. 후에 이를 민중신학으로 다시 살려내려 하더라도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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