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6/22 『한국의 민중봉기』 9장 토론거리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06-22 19:23
조회
896
『한국의 민중봉기』 9장

정치인들의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국본의 공식회원에서 배제됐지만 학생들은 한두 명의 '참관인'을 국본 회의에 파견했고 서울의 국본 지도자들과 비밀 대화를 유지했다. 다른 도시에서 학생단체들은 국본 지역 조직에 참여하거나 국본이 취약한 경우 국본을 대체해 스스로 광범위한 연합이 됐다. 많은 국본 정치인들은 학생운동을 불신했고 정부는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묘사했지만, 학생들은 6월 10일 투쟁을 직접 책임졌다. 학생들은 거리로 대규모 동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고, 체포와 최루가스, 구타를 기꺼이 무릅썼다. 학생들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의 중심에 있었고 커다란 에너지를 갖고 조직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담당했다. 학생들의 놀라운 자기조직화 역량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6월봉기를 촉발한 요소였다. (444)

6월 9일 오후 2시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특히 격렬했던 대치도중에 광주 출신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의식불명에 빠졌다. 친구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겼고, 이한열의 부상은 즉각 폭넓고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수천 명의 연세대 학생들은 밤새 머물면서 행진하고 노래하고 시위 대형을 연습했다. (447)

도심 고층 빌딩에서 시민들이 호기심으로 퇴근길 시위를 구경했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갈채를 보내고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학생들에게 가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구든지 거리로 나서면 체포되거나 구타당할 위험이 높았다. 시청 주변에서 차량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적을 끊이지 않고 울렸고, 수천 명의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448)

모든 사람의 예상을 넘어 6월 10일 22개 이상의 도시에서 40만 명 이상이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서 벌어진 강력한 투쟁은 심지어 성공회대성당에 갇혀 있던 국본 지도자들마저 놀라게 했다. (449)

국본 지도자들이 연행되자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두 가지 핵심적 결정을 내렸다. 날마다 시청으로 돌아올 것과 명동성당을 점거할 것. 6월 10일 전투경찰과 최루가스를 피해 달아난 수백 명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450)

그날 용감하게 거리로 나선 수만 명의 학생들이 없었다면 봉기가 시작됐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학생들의 용기는 주목할 만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기조직화 역량 때문에 그들은 다음날 6시에 시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다음날도 그랬다. 국본은 6우러 11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돌아오라는 지침을 아무도 내리지 않았어도 학생들은 그 뒤 4일 동안 매일 계속 모였다. 매번 40~50명의 학생들이 아주 야만적으로 공격당해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마침내 수천명의 보통 사람들, 학생들이 '넥타이 부대'라고 부른 사무직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합류했다. (...) 부끄러움 때문이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든, 그들의 참여는 누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수준을 넘어 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올려놓았다. (452,453)

국본과 다양한 학생조직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거의 보통 사람들 수천 명의 자율적인 의사 결정이 6월봉기의 지도적 입장을 구성했다. 우리는 이 자율적 행동 역량이 지속적으로 봉기에 영감을 준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봉기가 그렇게 빨리 확산될지 몰랐습니다. 봉기는 우리 예상보다 더 극적으로 발전했고,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요할 수 있었어요." (471)

질문1.
87년 6월봉기 당시의 혁명 세력은 크게 국본지도자들, 자율적인 학생조직, 넥타이 부대, 보통 사람들(혹은 시민사회)로 나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보통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처 혁명 세력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 혹은 이름을 숨긴 사람들?
'보통 사람들'을 다른 혁명 세력들과 동등한 층위에서 이야기하는 서술전략에 어떤 문제는 없을까?

질문2.
6월 봉기를 이야기하는 피카스의 서술에 '언론'의 역할이나 실천 등은 거론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언론'은 오늘날만큼 큰 영향력이 없었기에 배제한 것일까?
당시 신문 등의 언론에 실렸던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6월 봉기에 끼친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다고 평가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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