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호] 페미니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바깥’으로 나아가는 힘ㅣ이수영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9-07-01 14:50
조회
310
 
 

페미니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바깥’으로 나아가는 힘


이수영 (미술작가)


 

 

재생산 노동력의 이름 ‘여성’


향단이, 함안댁, 아씨, 중전마마를 모두 한데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인종, ‘여성’은 1900년대에 만들어졌다. 함안댁이 생물학적 특징을 빌미 삼아 감히 마님과 동급의 사회적 신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봉건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서며 돌쇠와 도련님과 최참판 모두가 가문과 농토에서 놓여 난 그냥 남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성이 상식과 이성을 갖춘 균질한 자본주의 노동력 상품이라는 새로운 국민 주체로 태어날 때, 남성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재생산 노동력의 이름은 ‘여성’이었다.


노동력과 재생산 노동력이라는 쌍은 제국주의-식민의 쌍과도 함께 움직였다. 일본제국 천황에 대한 충성과 복종의 하이어라키(권력적, 신분적, 기능적 상하 서열 관계가 정돈된 피라미드형 체계)를 이룬 부계질서로서의 인종질서에 편입된 대동아 공영권 건설의 주체, 그리고 그 주체 재생산을 담당함으로써 제국 질서에 포함되는 후방의 인종인 여성의 탄생이 그것이다.


여성은 마이너 인종이다


노동력 상품의 재생산 노동력으로서의 여성이든, 대동아 공영권, 민족, 국가의 주체들을 재생산하는 노동력으로서의 여성이든, 이 재생산 전문 노동력은 자연화되어 자본적 착취에서도 가부장적 착취에서도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여성이 매번 삭제됐던 경험을 통해 권명아는 “신체적 특징으로 차별화된 집합성을 만들어 내고 차별을 구조화하고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여성을 인종”으로 볼 것을 강조한다.


메이저 주체를 재생산하는 마이너 인종이자 계급인 여성은 메이저의 특징인 이성과 합리, 평화, 선(善)을 재생산하기 위해 광기, 비합리, 불온함 등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교정되고 관리되어야 할 여성들 덕분에 메이저들은 마이너들의 인권을 위임받고 대신 보호해 주는 진정한 메이저들로 재생산된다.


서구로부터 위협받는 아시아를 구해낼 대동아의 주체를 재생산하던 여성은 한국전쟁 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주체들을 재생산하기 위해 100일 기도로 남편을 승진시키고 자식을 대학에 입학시키는 놀라운 주술 능력을 수련했다. 그렇게 공들인 가족이지만, 되레 집에 잘못 들어와 서방을 잡아먹고 자식을 잡아먹기도 했던 식인종 여성은 국가도 잡아먹을 수 있는 미모의 북한 여자 스파이 ‘모란봉 3호’가 되는 변신술도 부렸다.


사실 주술에 능한 것은 메이저 주체들이었다. 그들은 선거 때가 되면 북한 무장공비나 간첩이 내려오고, 권력 비리 사건이 터지면 연예인들이 히로뽕을 들이켜며 문란한 연애를 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맡은 중요 정치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선량한 남성을 꼬드겨 강간죄를 범하게 하는 꽃뱀들이 기어 다니게 하는 놀라운 주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행동이 하늘에 닿아 인간사에 개입하는 천인상응의 고대적 정치력이 아직도 가능한 것이다.


#MeToo, 너의 분노와 용기에 내가 공명하는 ‘증강신체’


착하고 순진하여 이데올로기에 기만당한 무력한 피해자의 수난사를 구성하려는 게 권명아의 목적은 당연히 아니다. ‘소수자’는 피해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다수자의 중력장을 넘어서는 다른 힘들의 이름이다. 여성은 남성·여성이라는 두 성으로 구축된 사회적 신체와 가치를 넘어서 N개의 성을 생산하는 생성의 이름이어야 한다.


고문하고 살해하고 통제하는 정권을 무너뜨리겠다, 대통령을 직접 뽑겠다, 더 이상 위임하지 않고 거리에서 직접 우리가 하겠다. 우리 근현대사는 거리와 광장에서 직접 말하고 움직이며 성장한 공통장의 역사였다. 하지만 그 거리와 광장에서도 조국의 운명은 항상 위태해 여성차별 해소와 페미니즘적 주장들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들이었고, 시국이 엄중할 때 말해선 안 되는 사소한 것이었다.


이번 미투(#MeToo) 운동은 가부장적 권력에 의한 성차별과 성폭력이 정계 재계 언론계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함께 밥 먹고 술 먹던 우리 안에 있었음도 드러냈다. ‘우리’였던 진보진영이든, 시대의 맨 살갗으로 먼저 아파했던 문단이든, 거짓에 물들 수 없는 진리의 상아탑이든, 저항의 다른 이름인 예술계든 그 속에서 짐짓 못 본 척, 못 들은 척, 그런 적 없었던 척 해왔던 것들을 미투는 대낮에 밖으로 끌어냈다.


그 벌건 부끄러움과 분노가, 참담함이 권명아의 용어 ‘증강신체’를 이루었다. 너의 분노와 용기를 내가 느끼는 연결되고 증강된 신체. 삽시간에 공명하는 힘. 증강된 신체들의 공통장.


불안과 혐오, 내 안에 있는 파시즘을 넘어서


중심질서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경쟁, 배제당할까 하는 불안. 위기, 몰락, 공포는 혐오 대상을 구성한다. ‘너 때문이야’의 ‘너’가 필요하다. 불안과 혐오를 권명아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자양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파시즘은 지칠 줄 모르는 욕망, 탈주, 창발과 자유를 포획하며 운동한다. 파시즘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등이 되는, 모든 노동이 감정노동이 되는, 발칙하고 신선한 것이 상품이 되는, 스스로 예속되기를 바라는 지각, 취향, 감각 안으로 스며든 욕망들. 국가와 정부와 가부장적 남성에 대해 분노하기는 쉽지만, 정동화된 미시적 파시즘을 보이게 하기란 쉽지 않다.


권명아는 그러므로 배제와 증오를 넘어설 다른 가치인 안심, 반려, 행복이라는 정동(affect)정치의 필요성과 그 길로 나아갈 힘을 페미니즘으로 보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차별의 구조였던 배제의 공포와 증오의 지배적 정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정동정치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공통장을 식민하려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바깥을 향한 페미니즘.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를 환영한다.


*



※ 편집자 주 : 이 서평은 2019년 6월 15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bit.ly/2XkJY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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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2)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난 20여 년간의 변화와 낙차(落差)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슬픔, 외로움, 사랑, 위기감, 불안 등 정념의 키워드들을 통해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들을 넘나들며 조망한다. 더불어서 시대를 초월한 여성 문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며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변화를 통합적이며 힘 있게 그려내고 있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 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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