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와 후기]7/13 『한국의 민중봉기』10~13장

작성자
bomi
작성일
2019-07-03 19:02
조회
1405
7월 13일에는 『한국의 민중봉기』 10장부터 13장까지 공부합니다.
- 세미나 시작 전에 토론거리를 게시판에 올려 주세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적극 권장합니다!)
- 토론거리는 게시판 위 고정란의 <역사 비판 세미나 토론 방식에 대해>라는 글을 참고해 정리하시면 좋습니다.
다음 시간은 『한국의 민중봉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꼭 참석하셔서 '한국 민중봉기'의 마지막 그림을 함께 그리면 좋겠습니다! 토요일 저녁 7시 30분 다중지성의 정원 3층 세미나실에서 뵙겠습니다.


6/22 세미나 기록,
『한국의 민중봉기』8,9장

근황토크>

장미: 2주의 생활 속에서 공유하고 싶은 경험을 나눠보자.

팬지: 이번 달부터 다지원에서 벤야민 세미나를 함께 하고 있고, 정치철학 공부도 하고 싶어서 참여하게 됐다.

동백: 종강했다. 논문 써야 한다.

장미: 종강했다.

튤립: '궁금한 이야기 Y'를 보고 화가 났다. 장자o 사건과 윤지o 증언에 대해 잔뜩 기대하고 봤다. (윤지o가 캐나다로 떠난 후) 지금까지 제대로 인터뷰 한 언론이 없어서 기대하고 봤는데, 점점 인신공격으로 흐르더라. 윤지o 1인대 공격자 10명을 배치하고, 윤지o의 춤추는 모습이나 웃는 모습들을 (악의적으로 편집해 방영했다.) 너무 화가 났다.

모란: 어제 이대에 안도 다다오 건축 관련 영화를 보러 갔다가 중간에 나와서 핸드폰으로 '궁금한 ooo Y' 영상을 봤다. 그 영상이 처음 제안됐을 땐, 세월호 사건을 다루었을 때처럼 침몰당한 생명을 구조해 주는 듯한 분위기로 방송을 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윤지오는) 요청에 응했던 건데, 방송에 나온 건 정반대였다. 한 생명을 수장하는 방송이었다.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개인에 대한 증언자를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게 해서 다시는 증언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그런 의도가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는 자o한국당이나 검찰, 조o일보와 같은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우파쪽이 총선전략에 윤지o를 활용하려 하고 있다. 왜냐면 문제o 정부하에서 윤지o가 촛불과 미투의 부름을 받아서 증언에 응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주당이나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작업과정에 개입해서 윤지o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과거사조사위원회에서 장자o을 끌어올리고 윤지o를 데려와서 공격수로 내세운 이 모든 것이 설정이라며, 이를 정치적인 문제점으로 공격함으로써 다가오는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정치적 플랜이 있다. 거기다 가해권력의 자기 보신책이 더해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당들, 검찰과 같은 적폐세력들의 자기 보신적인 행동이나 제집권 전략 같은 건 늘상 들어왔고 이미 알고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람들이 동조하고 어쩌면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들이 윤지o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수로 나서게 되는, 이러한 군중의 행동이 더 중요한 지점이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 이 군중이라고 하는 게 시민사회에서 보면 분명한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이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체제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자본가 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우파와 더불어 자유주의 중도파나 좌파같은 경우에도 여기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20대의 남성층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 지지세력, 4,5십대는 더더욱 그렇지만 가부장의 혜택을 못 받는 20대, 오히려 여성들에게 밀려서 일자리 얻기도 더 힘들고 이제는 일자리에서 우월한 지위도 누리기 힘들고 (...) 이 세대층이 기존의 성차별주의를 활용해 자기네들의 뒤떨어진 역량을 보완해 살아보려는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시사인에서 3회동안 연재했던 '한국의 20대 남성이 문제o의 지지를 철회하는 성향'에 관한 기사를 보면, 문제o 정부가 친 여성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20대 남성의 지지철회가) 나타나는 걸로 민주o은 독해한다. 20대들이 자신들의 삶의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를 근원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여성들과의 경쟁에서 온다고 단순해석해서 성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모습. 민주당도 여기에 영합해서, 페미니즘 지지를 철회하고, 여성주의적 쟁점이 거론 되지 않게 하는 발빼기 전략(을 취하고 있다.) 군중의 구성부분이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동조경향. 군중들의 살벌한 느낌이 있다. 이런게 어떻게 보여져야 하고, 어떤 적절한 대응이 있어야 할 것인가. 시민들의 적절한 행동이 나타나야 한다.

동백: 시사인이 분석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란: 다 읽진 못했다. 일단 시사인의 분석은 왜 20대의 남성들이 문재인 정부의 지지에서 후퇴하고 있냐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통계상에서는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는 게 팩트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식의 (통계) 양식이 보이는 건 사회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 기존의 성차별적인 이데올로기로 대응하는 것이므로 잘못된 시각이라고 본다. 이 20대 남성 세대의 고통은 (사실상) 여성들의 고통과 똑같은 것이다. 미세한 부분을 제외하면 고통의 원천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체제의 필요가 그 세대들에게 아주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겪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므로 남성 여성이 경쟁적으로 대응해서는 (분할)의 룰이 먹혀들어 가게 된다. 남성 여성 혹은 다양한 성들이 연합해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싸워야한다. 남성들이 그런 식으로 대응하면, 여성은 역공을 취하게 될 텐데 그건 더욱 분할을 심화시켜서 (오히려) 금융자본가들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적 자본가들에게 큰 혜택을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민주당의 정책적 대응은 이러한 특별한 (분할) 움직임에 오히려 영합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별 간 연합을 끌어내려는 지도적 관점이 아니고, (오로지) 투표율이라는 산술적 관심에서만 움직이고 있는데, 그건 큰 실수라고 본다. 안o석처럼 윤지o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던 사람도 몸을 사리고 후퇴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일보등 보수적 언론들이 형성한 여론에 업혀 가자고 부정적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시선. 언론화되고, 페미니즘 이슈에서 후퇴. (...) 공천받기 힘드니까. 기회주의적 방식으로 손때면서 자기 보신 (하는 것이다.)

동백: 여혐이니 남혐이니 혹은 대결 구도 이런 방식의 인식이 자꾸 확산하는 와중에 같이 싸운다는 건 어떤 방식인지 잘 몰라서, 쉬운 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대 남성이란 특수집단이 있냐 없느냐를 제쳐두고(라도 이런) 좀 특이해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모란: 20대 남성의 감성 구조라거나 어떤 감응 양식들을 파고들어서 지금은 여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걸 해체해야 한다. 여혐이라는 건 결과다. 그게 인성적으로 남자들이 (본래부터) 마음속으로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성질을 가지고 다니는 종자라는 건 인종적 관점이다. 특정한 종을 습성에서 보는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해결방법은) 전쟁밖에 없다. 상대를 죽여야만 해소되는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임으로써만 그 종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 것처럼. 천성적, 종적으로 내모는 건 전쟁으로 가는 관점이지 공통common으로 가는 관점이 아니다. 남성 세대가 왜 그런 감정의식을 가지게 되는지를 해부하면서 그 감정을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 것이냐에서 접근해야 common이 가능해진다. 다른 방식이 없다. 계속 대립적인 걸로 가면 좋아할 사람은 따로 있다. 자본에는 적대를 만들어내는 게 유리하다.

백합: 우선 몇 구절 읽어보겠다. -그림책 『전쟁』의 작가, '안드레 레트리아' 나미콩쿠르 수상소감- "오늘 밤 우리는 이곳에 모여 연대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대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상호 간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주 끔찍한 행동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측면이 저를 오늘 밤 이 자리에 서게 했습니다. 이 상을 받게 해준 일러스트레이션이 바로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다룬 책에 삽입되기 위한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최근 인류의 역사에서 끔찍했던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두 작가의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5년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우리는 공포와 증오가 전 세계에 만연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는 위험하게도 재앙의 서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처음 방문한 이 멋진 나라 한국도 여전히 일상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전쟁에 대한 또렷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이 언제든지 위험한 곳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실수가 되풀이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이 책은 이러한 행동을 촉구하는 취지에서 탄생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행동은 그저 과거를 상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권리라는 것을 상기합니다. 민주주의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합시다. 자유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합시다. 상기하는 행동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저항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행동 중 첫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히 일러스트레이터, 삽화가 이런 차원에서만 이 발언을 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종합되어 있는 발언이어서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모모에피파니(*에피파니: 겉으로 나타난다.)라는 영화제가 있다. 그 에피파니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정말 세상의 곳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분(안드레 레트리아)의 작품을 보고, 엉엉 울고 싶었다. 세계 곳곳에서 모든 분야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리: 순천에 와서 처음으로 '여순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여순사건'을 주제로 한 공식 행사 외에 카페에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이야기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옆 테이블에서 5,6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 두 분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은 것이다. 그 대화의 주제는 크게 2가지였다. 첫째는 '여순사건'을 반드시 '여순봉기'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충무공 이순신의 효심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게 좀 생뚱맞게 느껴지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 두 이야기가 하나의 신념(?)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모란: 효와 충은 가부장 질서를 뒷받침한다. 국가를 유지 재생산하는 것, 즉 애국주의라는 것과 봉기가 어떻게 연결될 것이냐의 문제다. (추측해 보자면) 여순항쟁, 그러니까 봉기 당시에는 국가라는 게 아직 명료하게 구축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48년 10월, 건국으로 치면은 불과 몇 개월밖에 안 된 시기다. 급조된 치안 질서가 위로부터 구축되어갈 때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열망도 (동시에 구축되어 갔던 것이고) 군인들도 반은 민중 군대였다. (민중 군대는) 동내에서, 그러니까 애향심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위로부터 강제되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다. 충과 효가 살아있는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열망. (이승만 정부에 저항하고) 가족과 국가를 제대로 갖자는 충심(과 효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백합: (당시에는)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급, 그리고 민중들이 입대해서 군인이 된 거였다. (그러다가 오히려) 내 가족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효심 속에서 나(와 내 가족)을 지키고자 한 것. (그때는) 군대 구성 자체가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시대였다.


<본격 토론>

장미(사회자): 9장과 10장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이후에 성장하고 변화하는 운동의 흐름을 보여준다. 운동이 점점 성장하고 확장해서 6월 봉기로 클라이맥스를 맞이한다. 광주 민주항쟁 이후에 벌어졌던 여러 일들. 그리고 87년 6월 봉기가 어떻게 벌어졌는가가 연속적으로 읽힌다. (...) (운동의) 주체성에서는 명망가 중심에서 예술가, 학생, 노동자……. 계급 연합적 형태의 민중이 등장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자.

질문1>------------------------------------------
87년 6월봉기 당시의 혁명 세력은 크게 국본지도자들, 자율적인 학생조직, 넥타이 부대, 보통 사람들(혹은 시민사회)로 나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보통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처 혁명 세력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 혹은 이름을 숨긴 사람들?

팬지: 민주화 운동이 여러 가지가 있고, 보통사람들이라는 개념이 어쨌든 (윗세대의) 보통사람들로 묶일 수 있는 일을 하셨던 분 들을 말하는 것 같다. 일로 엮이지 않았던 분들이 이해관계로 묶인 학술적인 모임으로 발전이 된 (경우도 있다.) (...) 우리는 보통사람이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정치화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치적인 인간 혹은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공동체라는 개념 속에는 어떤 학생조직 넥타이 부대 (등이 모두 등장한다.) 넥타이 부대면서 학생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개인이기도 한, 범주화시킬 수 없는 부분이 있을 때 그 자체가 보통사람이지 않을까. 책에서 말하는 보통이 노말, 즉 정상성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모란: 노태우는 보통사람(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두환이 워낙 특이한 사람이어서 그런 이미지를 역이용해서 보통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했었는데, 카치아피카스의 관점은 그 이후의 시간대에서, 또 노태우 이후에 많이 사용된 보통사람이라는 말을 이용해서 87년의 역사를 조명한 것 같다. 두세 겹의 겹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중 대중 군중. 민중. 아나키스트. 잡종. 여기서는 잡종이 보통사람과 가장 가까운 말이다. 다양한 주체 개념화 방식들이 있다. 보통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정파 개념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범주를 삽입하고 있다. 과학적 범주로 삽입하고 있다. (...) 보통사람이라는 말을 삽입한 건 피카스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정치적 관점이다. 오늘날로 치면 멀티튜드에 상응하는, 많은 사람 속에 있는 자율성, 조직되지 않은 하지만 사람들에 이미 내재하는 항쟁 적 요소를 지칭하기 위해서 87년의 항쟁 속에 보통사람이라는 어떤 부분을 말하고 싶어 한다. 국본은 보통사람으로는 환원할 수 없고, 열렬한 전위활동도 아닌 사람이다. 명망가들이 위주다. 학생이나 정파 운동은 좀 더 이념적 무장을 단단히 한 사람들을 일컫고, 넥타이 부대는 사무직 노동자들. 이들은 초기에는 창문으로 (운동을) 내다보기만 한 사람들이다. 언론사의 사무직이거나 금융사무직 그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부분일 텐데, 산업노동자와는 좀 다른 위치다. 교육수준을 보더라도 완전히 보통사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나이로 치면 넥타이 부대는 24살 최소한 27살 남성이다. 이 정도면 학번으로 치면 최소한 83학번이다. 이들은 학생 때 조금 운동 쪽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대학과는 친연성이 있었던 집단이다.

장미: (보통사람들은) 엘리트가 주도하지 않았다는 범주 같다. 기존의 고유명들이 여기에 속했다. 6월 혁명을 이야기하는 기존의 서술방법을 택하기보단 보통사람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법을 택한다.

백합: 체험적으로 보면 보통사람들은 조직화 되지 않은 삶의 기층 민중이었다. 노동자라고 하는 계층 속에서 떠밀려서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 아닌 곳에 있었던 분들이다. 주부라거나 등등 여러 호명될 수 없었던 곳에 있었던 많은 사람이 거대한 물결을 이뤘다. 이미 내면에 있던 항쟁적 (에너지가) 차고 넘쳐서 이 무리가 물결처럼 늘어났다. 87년 당시 아현동 고가를 넘어가는데 아현동에서 (그 물결을) 보고 많은 사람이 뛰쳐 내려왔다. 그 물결이 점점 불고 불어서 광화문 쪽으로 (...) 그 불어남을 생각해 보면,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지나가니까 당시에는 자기도 모르게 움직이는 사람도 매우 많았을 거다. 넥타이 부대도 (...) 부화뇌동하여 같이 움직였겠다. 부화뇌동…. (그러니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거대한 흐름에 함께 휩싸였던 사람들도 많았다.)

??: 촛불지도부는 지도부임을 거부한다. 코디네이터다. 비상 행동이 일정한 리더쉽을 필요로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의식상에서는 지도부가 아니야. 라고 자기 부정을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87년은 현실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휩쓸려서 국본이 지도한다고 느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국본의 마인드는 (지금과 달리) 굉장히 강했다. 실질적인 움직임은, 즉 전략 전술의 문제의 상당한 부분은 국본이 움직였다고 봐야 한다. 노동자 전위 조직 활동도 있었고, 조직적인 움직임들이 굉장히 활발했던 시기다. 또 (한국 운동 과정에서) 조직과 비조직 대중을 갈라서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모란: 피카스는 현대의 시각을 오히려 많이 투사한다. (하지만) 오히려 당시에는 조직된 힘들이 강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이 꿈꾸는 것들의 움직임이 분명히 있었지만, 조직된 부분들을 압도할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은 동원을 스스로 하지만, 그때는 미리 조직 속에서 결집한 힘이 있었다. 그 조직된 부분들이 지금은 오히려 와해되고 없다. 운동권이라는 흐름이 이상한 집단으로 느껴지는 것은 패밀리를 유지하고 중앙집권적인 걸 유지하고 그걸 현실 속에 관철해 나가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운동권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게 서로의 마인드였다. 나서는 사람을 그때는 지금처럼 쳐다보지는 않았다.

동백: 80년대나 그 이전 시위를 공부하며 느끼는 감각은 그분들은(보통사람들은) 운동을 알 길도 없었고, 대학생 조직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 보거나 느끼거나 공간이 보장된 사람들에게만 느낄 수 있는 혁명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자발적으로든 경제적 이해관계로든, 농촌과 같은 소외된 곳에서는 어떻게 변화를 꿈꿀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백합: 카농. 카톨릭 농민회가 있었다. 전국에 조직이 있었고 마을마다 대부분 거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카농을 중심으로 해서 농민 대부분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다. 적어도 그곳에서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시대였다. 아마 (농촌에 있던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백: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한 것은 다르다. 부모님 세대는 (거의 들어서 아는 것이다). 동년배 중에서도 대학을 못 간 사람들이 훨씬 많을 테니 말이다.

백합: 지금 6월 항쟁의 계급 분석. 계층 분석을 보면, 일정하게는 엘리트 중심으로 흐름이 만들어져 온 게 사실이고 아마도.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부분이 필연적인 게 아닐까?

모란: 역사에서 보면 주도적인 세력은 파도가 치듯 변화하며 운동이 일어난다. 식민지 시대, 일본강점기. 그 시기에는 농민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강력했다. 농민들의 협동조합적 구성이라거나 내적 조직화가 굉장히 강력해서 농민투쟁이 무시할 수 없는 (주도적) 세력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농민들이 대부분 역사를 이끌어 왔었는데, 농민들의 양극 분해가 나타나고, 이전이라면 다 지주와 소작 관계에 있었는데, 기업농 경영형 소작농들이 새롭게 나타났고, 농촌 내부에서도 부르주아지라 부를 수 있는 계층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부르주아가 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로 바뀌는 계층이 나타났다. 이러면서 전통적인 농민들의 운동조직들이 와해 되어 간다. 30년대 후반이 되면, (...) 공산당은 오히려 괴멸되어 가는데 농민의 자율적 조직은 굳건했다. 초기에는 인민위원회에 농민들의 구성이 강했었는데,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토지를 다 나눠주는 식으로, 남한에서는 농지개혁으로 상당한 농민들이 자작농으로 바뀌면서 거의 70%가 쁘티브루주아, 자기 농지에 대해 자작농이 되었다. 농민이 농지개혁의 여러 체제를 서포트 하는 쪽으로, 즉 체제 안정세력으로 바뀐다. 농촌의 보수화가 이뤄진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있었던 경제개발 1년에서 노동자층이 새롭게 형성되어 나오고, 여성 노동자가 주된 층이었다. 따라서 6, 70년대 여성 노동자가 운동의 주도적 세력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87년의 첨단 산업화 이후에는 남성 중심으로 노동 개혁이 재편된다. 울산, 거재 이천 등의 중화학 산업에서 주도적으로 되면서 남성 노동운동이 부상한다. 노동자 헤게모니가 강화된다. 이걸 계기로 농민운동도 강화되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연합세력이 8, 90년대 운동의 새로운 세력을 구성한다. 지금 농민들이 어쨌건 농촌 내에서 나름대로 연대조직을 만들었던 게 전농이고,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91년 5월부터 해산되긴 했지만 전노협이다. 빈민들의 전국 조직.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각급 연대조직들이 다 생겨났던 게 80년 말의 풍경이다. 농민들의 운동은 식민지 (정부에 대한) 반발로 농민조직이 제 활성화된다. 89년도의 이경해 같은 사람의 할복. 세계인들 놀라게 한 아주 레디컬한 농민운동이었다. 세력들이 파동을 친다. 영구히 운동에서 멀어져 있는 관망세력은 없다. 구성 속에 그 파동을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

동백: 항상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점차 아무런 언급도 없어지고,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지라는 궁금증이 든다. 농민운동, 여공운동 등…. 지금 그걸 얼마나 조망하고 있는가도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요즘 주로 조명되고 있는 것은 386세대다. 꿘충 혐오가 지금 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다 "민주화 세력이라는 게 다 정치세력과의 결탁라인이지 않겠는가?" 라는 사고가 만연하면서, "꿘충은 안 돼"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다.

모란: 여성운동에 관한 학술적 연구가 있다. 고혜경 교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60, 70년대는 노동자가 완전히 주도 세력이라는 걸 실증적으로 다 입증하고 있다. 처음부터 지금 보이는 모습을 가졌을 거로 생각하면 안 된다. 왜곡되고 변질되는 과정이 있다. 7, 80년대 초중반. 87년대 운동은 굉장히 열정적이었고, 자기 헌신적인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백: 그 당시 운동이 문제라기보다는, 운동의 재현방식, 자기들 스스로가 민주투사라고 이야기하는 그 방식이 문제라고 본다.

백합: 왜곡해서 이용하는 거다. 자기를 피알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근현대에서 농민들이 싸워온 게 엄청나다.

팬지: 괴물을 잡으려면 괴물이 돼야 한다(는 말도 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에서는 사람이 표현하는 게 굉장히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백합: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거칠고, 단호하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상태다.

팬지: (운동을 공부할 때) 레닌과 관련된 걸 배우고 철학적으로 몰아가고 하는 게 있다. 나이가 들고 시대가 바뀌고 다시 공부했을 때, 그 당시 천착했던 게 이제 와서 보면 너무 (협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화 항쟁운동에 있어서 여성과 아이의 마이너한 부분이 주는 힘은 (...) 운동을 부드럽게 만든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여성이 만들어내는 힘이 굉장히 강하게 두드러지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표현하냐의 문제인 것 같다.

백합: 386세대가 촛불을 겪으면서 참 행복했다. 촛불을 통한 그 섞임이 좋았다.

모란: 어린애들을 태운 유모차들, 쌍코(쌍화차 코코아) 회원들, 연예인 커뮤니티 등…. 촛불집회를 군사적 성격 없는 운동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었다. 여성적 힘, 여성이 나서야만 가능한 일이다.

튤립: 그래서 윤지o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30대를 살아온 우리와 감응하는 부분이 많다. 윤지o처럼 안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부당함을 당했을 때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팬지: 우리가 여성을 보는 이중적인 면도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바라보는 우리가 이중적인 잣대만 분별하면 될 텐데, 매도당하는 게 많다는 게 문제다. (...) 거짓된 프레임이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재구성되고, 그런 걸 믿는 게 너무 무섭다.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목소리를 어떻게 낼 것인가(가 문제다.)

질문2>------------------------------------------
6월 봉기를 이야기하는 피카스의 서술에 '언론'의 역할이나 실천 등은 거론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언론'은 오늘날만큼 큰 영향력이 없었기에 배제한 것일까? 당시 신문 등의 언론에 실렸던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6월 봉기에 끼친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다고 평가해 볼 수 있을까?

장미: 전통적인 맥락에서의 언론은 지금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가 (운동에)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훨씬 더 많은 미디어가 있지만, 더 큰 영향력을 끼쳤던 건 그때였다. 정권에서 언론을 탄압하며 광주도 보도하지 못하게 했고, 이한열 열사의 사진도 싣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의 힘이라는 것은 곧 지식인의 열정과도 같았다. 오늘날은 언론이 상업주의적으로 변화됐지만 말이다.

백합: 이한열 사진이 온 사방에 실렸다. 박종철 이후로 (정부가) 언론을 통제할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의 힘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제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을 싫을 수밖에 없었다.

모란: 피카스가 언론 이야기를 안 하는 이유는, 항쟁 이후에 한겨레 신문이 생겼고 그 이전의 신문은 전부 관제 언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언론 보도와는 달라서 83, 4년 그 무렵에는 신문에 노동자라는 말도 쓸 수 없었고 다 근로자라는 말을 써야 했다. 혁명이라는 말도 아예 쓸 수 없었다. 언론이라는 건 전부 정권의 스피커였지 국민의 스피커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실리는 건 언론이 주체적 선도적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아래로부터 힘이 올라오니까 보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보도해나간 것이었다. 그래서 비제도 언론이 오히려 발전했었다. 인문사회과학 서점들도 각 게 대학에 1, 2개씩 반드시 있었다. 그날이 오면, 백두책방, 김o겸이 백두책방 사장이었다. 연대 앞에도 두 개씩이나 있었고, 이대 앞에 다락방, 성대 앞 풀무지, 논장등... 대학가 주변 루트로 조직된 그룹이 있었다. 색깔이 있는 조직들이 자신의 기관지들을 배포했다. 책방이 당시 합법 책뿐만 아니라 비합법 책도 다 발행했다. 운동 가요들도 발행했다. 제도권 신문이 선도하지 않더라도 그 나름의 독자적인 언론이 형성된 시기였다. 제도 언론과는 다른 비제도적 언론 (...) 당시 집회에 갈 때는 꼭 바구니를 들고 가야 했다. 상설 집회에서 엄청난 문건들이 배포됐다. 자체적인 신문제작 활동도 굉장히 활발했다.

나리: 당시 제도권 언론이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민중이 언론을 전유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까?

모란: 전유라기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자기 뜻에) 따르도록 제도권 언론을 섭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제도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제도 권력을 부릴 수 있는 제헌 권력을 가진 아래로부터의 섭정이었다. 그 위에 놓여있는 언론들의 선택도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이었다) 판매 부수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사기업적 언론들의 변화도 그렇고, 섭정의 지극히 다양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때 신문들이 윤지오 팬클럽처럼 움직이다가, 지금은 또 사기꾼으로 몰아가고 있다.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지금 언론의 성격은 아니기 때문이다.

튤립: 추가적인 질문이 있다. 8장을 보면 NL PD 설명이 나오는 데 왜 CA는 나오지 않을까? 왜 CA는 언급되지 않았을까?

모란: 운동사에 해당하는 거다. 80년대에 무림, 학림 두 개의 흐름이 생겼다. 학림은 선도투고 무림은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였다. 무림을 주로 움직였던 경향은, 하나는 기독교 중심의 야학 운동이고 또 하나는 NL적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북한과 연결된 NL 말고, 민족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대중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대중과 함께 대중과 사랑을 나누면서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림과 다른 무림적 경향이었다. 학림 인물에는 장o표와 김o태(?)가 있다. 장o표는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태일주의다. 전태일은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었다면 하고 (운동하면서 느낀) 고독감을 표현했다. 장o표가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자고 하면서 공장으로 들어가는 루트를 (만들었다.) 김o태(?)는 다 아래로 들어가면 싸움을 벌일 수 없다는 선도투였다. 민족민주주의 ND노선의 선구자다. 그걸 뒷받침해서 학생운동권에 주요 인사가. 김o태(?) 그의 후배 문방사우(?), 아프리카티비도 하는 문o식. 깃발 논쟁이 있었다. 안개처럼 살아가지 말고 깃발을 들자는 (...) 김o태(?)의 ND노선을 강화하면서 뒤에 (생겨난) 레닌 노선이 CA다. CA는 (...) 85년부터 노동화 운동의 재현에서 부과된 흐름이다. 노동자 주체성을 민족민주와 결합하려는 (...) 민족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는 ND에서 PD가 나오는 것이므로 한 가닥에서 양 갈래로 나가다가 나중엔 비슷해진다. 민족개념을 상대적으로 얼마만큼 강조하느냐에 따라 PD파와 NL파가 다른 색이 된다. 카피스는 민족민주에 더 호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도 민족성의 문제는 포기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있다. NL을 뺀 PD는 분단상황을 빼버린 (...) 극단적 PD다. PD 대부분도 NL의 경향에서 PD를 더 강조하는 것이지 NL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강조점이 주사파는 원체 NL을 강조 PD의 P에서 계급성을 매우 약하게 훼손하므로 NL이라 부르는 것이고 (...) NL없는 PD만을 강조하는 것은 극단적 흐름이다. 공유된 NLPDR을 극단화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운동을 연합적으로 끌고 나가는 흐름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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