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7_발제] 제14고원(p.938-953)

작성자
objectapple
작성일
2019-07-06 18:36
조회
40
제 14고원. 1440년-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미학 모델 : 유목민 예술

1 원거리 파악과 근거리 파악
2 광학적 공간과 촉지적 공간

우리에게는 <매끈한 것>이야말로 근거리 파악의 특권적인 대상인 동시에 (촉각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이고 청각적일 수 있는(눈 자체가 광학적 기능 이외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 촉지적 공간의 요소처럼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홈이 패인 것>은 오히려 원격 지각, 좀 더 광학적인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 항상 그렇듯이 여기서도 역시 변형 계수를 통한 수정이 필요한데, 이를 통해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간의 이행이 필연적인 동시에 불확실하게 되며, 그런 만큼 더더욱 놀랍다.

떨어져서 보더라도 그림은 가까이에서 그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곡가도 듣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멀리서 듣는 반면 작곡가는 가까이에서 듣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자는 긴 기억을 갖는 반면 작가 자신은 짧은 기억을 갖고 쓴다. 촉지적이고 근거리 파악적인 매끈한 공간의 첫번째 측면은 방향 좌표, 접속의 연속적 변주에서 찾을 수 있다. (...) 어떤 “정면”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단지 어떤 것 “위에” 있을 뿐이다.)

“단자(monades)론적” 관점은 오직 유목적 공간에만 접속될 수 있다. 전체와 부분들은 그것들을 보고 있는 눈에 광학적인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동물성으로, 눈에 의지하더라도 정신이 손이 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 홈이 패인 공간은 원거리 파악의 요구들에 의해 규정된다.

홈이 패인 것과 매끈한 것은 단순히 포괄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으로만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홈이 패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은 아직 상대적인 것인 반면 매끈한 것에서 국지적인 것은 이미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파악하면 공간은 이미 시각적인 것이 아니다. 눈 자체가 광학적인 것이 아니라 촉지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 유목민은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는 국지적 통합으로 존재하며, 접속들과 방향 변화들을 무한대로 연속시키면서 매끈한 공간을 구성한다. 이는 생성 자체 또는 과정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절대성이다. 바로 이것이 이행의 절대성으로서, 유목민 예술에서 이 절대성의 출현과 혼융된다.

이와 반대로 원거리에서 파악된 공간, 홈이 패인 광학적 공간에 눈을 돌린다면, 이 공간의 특성인 상대적 포괄성 또는 절대적인 것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절대적인 것은 수평선 또는 배경, 즉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인데, 이것 없이는 포괄적인 것도 또 포괄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배경 위에서 상대적 윤곽 또는 형태가 부각된다. 절대적인 것 자체는 <포괄되는 것> 속에서 출현할 수 있지만 오직 중심처럼 분명하게 제한된 특권적인 장소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으며, 이 장소는 포괄적 통합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한계 밖으로 밀어내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도 매끈한 공간은 여전히 존속되지만 오직 홈이 패인 공간을 산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따라서 포괄하는 것 자체가 대지의 중심에 나타나는 경우 이것은 이차적인 역할을, 즉 아직 매끈하고 계량되지 않은 채 존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심연 속으로, 사자들의 나라로 밀어 넣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가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원성을 환기시키는 것은 “촉지적인 것-광학적인 것”, “근거리 파악-원거리 파악”이라는 차이 자체도 이러한 구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부동의 배경, 즉 평면이나 윤곽에 의해 촉지적인 것을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혼합된 상태, 즉 촉지적인 것이 홈을 파는 데 기여하고 다른 공간을 유도하기 위해서만 그것의 매끈한 성분들을 이용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촉지적인 기능과 근거리 파악은 우선 매끈한 것, 즉 배경도, 평면도, 윤곽도 갖지 않으며 방향 변화와 국지적 부분들의 접속만 가질 뿐인 매끈한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발달된 광학적 기능은 상상적인 보편적 가치와 범위를 부여함으로써 홈 파기를 새로운 완전성의 지점으로 밀고 나가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은 빛을 해방시키고 색을 변조시키며 또 평면들이 서로 간섭하는 제한되지 않는 장소를 구성하는 일종의 대기적인 촉지적 공간을 복원함으로써 매끈한 것을 다시 줄 수도 있다. 요컨대 먼저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을 그 자체로 규정해야 한다. 촉지적인 것과 광학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상대적 구분은 바로 여기서 파생되는 것이다.

3 추상적인 선-구체적인 선
보링거는 추상적인 선이라는 관념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바로 이 선이 예술이 시작되는 점 자체 또는 예술 의지의 최초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기계로서의 예술. (하지만 보링거는 추상적인 선은 기하학적 또는 결정적 형태로, 즉 가능한 한 직선적인 이집트 제국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함.) 하지만 우리는 이와 반대로 추상적인 선은 우선 “고딕적” 또는 오히려 유목적인 것이지 직선전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추상적인 선이 갖는 미학적 동기나 추상적인 선이 예술의 시작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한다.
이집트의 직선적(또는 “규칙적으로” 둥그스름한) 선이 지나가거나 유동하며 변화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라는 부정적 동기에서 비롯되고 항상성과 <즉자(En-soi)>의 영원성을 수립하는 데 반해 유목적인 선은 이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추상적이다. 이 선은 다양한 방향을 갖고, 점이나 형상이나 윤곽 사이를 지나가기 때문이다. 불안감을 몰아내고 매끈한 것을 종속시키기 위한 홈 파기가 아니라 이 선이 그리는 매끈한 공간에 이 선의 긍정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다. 추상적이 선이란 매끈한 공간들의 변용태지 홈파기에 호소하는 불안감이 아니다.

“원시 예술은 추상적인 것 또는 전-구상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 예술은 처음부터 추상적이며 그 기원에서부터 추상적인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었다.”

즉 항상 [구상적이라는] 또 하나의 극을 구성할 수 있는 모든 선들에 의해 항상 전체되는 하나의 극인 이상 이 추상적인 선은 “시작점”에서부터 존재했다. 추상적인 선은 선사시대의 연대 확정뿐 아니라 역사적 추상 작용 그 자체 때문에 시작점에서부터 존재한다. 따라서 추상적인 선은 정주민 예술의 제국적인 선과 상호 작용, 영향력 행사, 투쟁을 계속하면서도 결코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유목민 예술의 독자성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보링거의 글 중에서 가장 빼어난 부분은 추상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을 대립시키는 대목이다. 유기적인 것은 재현된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재현의 형식이며 나아가 재현을 주체에 결합시켜주는 감정(감정이입)을 가리킨다. “예술 작품 안에서 인간 안의 유기적인 자연적 경향에 대응하는 형식적 과정들이 전개된다.”
그러나 입체나 공간성에 종속되어 있는 그리스의 유기적 선은 입체나 공간성을 평면으로 환원시키는 이집트의 기하학적 선을 계승한 것이다. 대칭성, 윤곽, 안과 밖을 지닌 유기적인 것은 여전히 홈이 패인 공간의 직선적 좌표계와 결합된다. 유기체는 그것을 더 먼 곳에 연결시켜 주는 직선들 속으로 연장된다. 인간이나 얼굴이 우선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러한 표현의 형식 자체, 즉 최고의 유기체인 동시에 모든 유기체와 계량적 공간 일반과의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이 도주적인 이동성을 통해 기하학에서 벗어나면 이와 동시에 삶도 제자리에서 소용돌이치고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유기적인 것에서 몸을 뺀다. <추상 작용>에 고유한 이러한 생명력이 바로 매끈한 공간을 그린다. 유기적인 재현이 홈이 패인 공간을 주재하는 감정이듯이 추상적인 선은 매끈한 공간의 변용태이다. 이리하여 촉지적-광학적, 가까운-먼 이라는 구분은 추상적인 선과 유기적인 선이라는 구분에 종속시켜 [두 유형의] 공간들의 일반적 대립 속에서 구분의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태도 제한하지 않고 계속 방향을 바꾸는 선.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홈 파기와 매끈하게 하기라는 조작에서의 다양한 이행과 조합이다. 즉 어떻게 공간은 그 안에서 행사되는 힘들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홈이 파이는 것일까? 또 어떻게 공간은 이 과정에서 다른 힘들을 발전시켜 이러한 홈 파기를 가로질러 새로운 매끈한 공간들을 출현시키는 것일까?

빠르건 느리건 운동만으로도 종종 다시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물론 매끈한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매끈한 공간에서 투쟁은 변화하고 이동하며, 삶 또한 새로운 도박을 감행하고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해서 새로운 거동을 발명하고 적을 변화시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는 절대로 믿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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